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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침투
그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난 후, 천공성.
이카루스의 플레이어 파스칼은 주위 경관이 훤히 비춰 보이는 실내의 왕좌에 앉아 오늘도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메뉴는 언제나와 같은 스테이크와 와인이었다.
“폐하!”
그때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령이 달려와 경례 자세를 취했다. 식사를 방해받은 파스칼이 입을 닦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또 뭐꼬?”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폰 라이더들이 근방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아르곤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음.”
파스칼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고민스러운 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아르곤이 무슨 이유 때문에 어비스에 간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어비스군이 완전한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승부를 봐야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오늘 안에는 아르곤군이 도착해 있어야했다.
“어비스 애들은 다 있제?”
“예, 매복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군도 다 숨겨놨으니 이제 아르곤 애들만 오면 되는데…….”
마음 같아선 세레스티나에게 지금 어디까지 왔냐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길을 빌려주는 역할인 그가 갑자기 연락해 궁금해 할 이유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그녀의 의심을 살 짓은 안하는 것이 현명했다.
“다 잡은 생쥐라 생각했는데 은근 사람 긴장하게 만드는구마. 라이더들에게 주요 루트 두 곳 말고도 알브헤임으로 넘어갈 수 있는 모든 루트를 다 조사하라고 해라.”
“예? 그건 너무 방대합…….”
“맞고 할래? 그냥 할래?”
“아, 알겠습니다. 폐하!”
전령이 후닥닥 뛰어나갔다.
“귀찮게 하는구마.”
입맛이 떨어진 그가 턱을 괴었다. 세레스티나가 이대로 꽁무니를 내뺄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어비스 영토내로 들어가야 했다.
“…대체 어디로 올 생각이고?”
*
그리고 같은 시각. 이카루스의 비행병들이 산과 협곡을 오고가며 아르곤의 군대를 찾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언덕을 넘어 한 무리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맞이하는 적이군.”
군세의 선두에서 아래를 굽어보던, 아름다운 백발의 여인이 중얼거렸다. 전방에 보이는 것은 울타리와 병사들. 그리고 어비스군의 깃발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예, 폐하. 이 경계만 넘으면 위그드라실까지 방해 없이 갈 수 있을 겁니다.”
아르곤의 이름 높은 명장, 레온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투박한 인상에 듬직한 덩치를 가진 그는 허리춤에 맨 두 개의 검과, 등 뒤에 자리 잡은 거대한 대검 하나, 총 세 개의 무장을 하고 있었다. 세레스티나는 가볍게 주위를 훑어보고는 말했다.
“저들도 나름대로 대비는 한 것 같지만, 뒤집을 수준은 아니구나.”
그녀가 가늘고 보드라운 손을 뻗어 전장을 가리켰다.
“쳐라.”
“와아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아르곤 기마대가 언덕을 내려왔다. 그들이 타고 있는 것은 보통 기마가 아니었다. 퇴화된 용이라 불리는 ‘드레이크’. 일반 기마들과 비교하면 조금 느리지만 온 몸이 용의 비늘로 뒤덮여 있어 갑주를 입은 것처럼 튼튼하며, 성격도 말보다 용맹스럽다.
이들이 바로 아르곤의 특화병종인 용기사였다. 로드가 다니는 희귀 용족 몬스터 드레이크를 아르곤에서는 오백 명의 전사 모두가 타고 있었다.
“크르르릉!”
울타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용의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 적습이다!”
“아르곤? 뭐야! 쟤들이 왜 저기서 튀어 나오는 거야?”
아르곤의 선봉장 레온이 팔을 들어올렸다.
“브레스 준비.”
기수들이 드레이크의 고삐를 여러 번 잡아당기자 드레이크들이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무시무시한 이빨들 사이로 시뻘건 불꽃이 맺혔다.
“발사!”
퍼버버버버버벙!
대열을 맞춘 드레이크들이 입에서 화염을 토해냈다. 소름끼치는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화염구들이 울타리에 부딪쳐 폭발을 일으켰다. 나무 파편이 터져나가고 몸체에 불이 붙었다.
“……봐, 봤냐?”
“불을 쏘다니!”
어비스군 병사들은 생전 처음 보는, 완전히 새로운 적의 공격에 혼란에 빠졌다. 용기사들은 달려오면서 브레스를 연거푸 날려댔다. 제대로 맞붙기도 전에 작렬하는 브레스 폭격에 의해 어비스군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고 시작해야 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레온이 외쳤다.
“돌파하라!”
콰콰콰콰쾅! 드레이크들은 약해진 울타리와 병사들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최전방위선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르곤군은 어렵지 않게 울타리를 점령하는 듯 했다.
“섬놈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쳐라!”
“와아아아아!”
바로 그때, 양 쪽 언덕에서 대기하고 있던 예비대 병사들이 좌우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양동.’
루비를 연상케 하는 새빨간 적안으로 주위를 살피던 세레스티나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대로 용을 몰아 전진한다.”
그녀의 선택은 포위당하기 전에 돌파였다. 아르곤군은 난전양상에서도 즉시 그녀의 명령에 수족처럼 움직였다. 이미 박살난 울타리와 병력들로는 이 강대한 기병들을 막지 못했다. 결국 양동으로 내려온 병사들이 울타리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아르곤군은 포위에서 벗어난 뒤였다.
“…제길! 우리 쪽 병력을 무시하고 가다니!”
“뭣들하나! 이대로 침입을 허용할 생각이냐?”
어비스군이 즉시 추격해 왔다. 그때 저만치 앞서가던 아르곤군이 말머리를 돌렸다.
“어, 응?”
“놈들이 돌아온다!”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경계 사령관이 씩 웃었다.
“하긴, 놈들도 뒤를 내준 채 계속 나아가긴 부담스럽겠지. 피차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이다! 전군 제자리에서 방어 태세를 취하라!”
검보병들이 방패와 창을 앞세운 촘촘한 대 기마전 방진을 구축했다. 용기사들은 급할 게 없다는 듯 천천히 드레이크를 몰며 다가오고 있었다. 세레스티나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레온.”
“예, 폐하.”
아르곤의 선봉장 레온이 드레이크에서 뛰어 내렸다. 다른 기병들은 중간에 있는 그를 피해 좌우로 갈라졌다. 레온이 등에 찬 대검을 틀어쥐었다. 대검의 몸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황홀한 황금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 충전검 아누아이, 참격.
레온은 대검을 완전히 뽑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콰콰콰콰콰콰콰콰! 한 줄기의 산더미 같은 황금빛 참격이 정면으로 쇄도했다. 아누아이는 여러 충전무기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무구였다.
“히익!”
“피해라!”
방진을 구성한 병사들이 흩어지며 그 중앙으로 거대한 참격이 지나갔다. 쿠구구구구! 적지 않은 병사들이 이 참격을 피하지 못하고 휩쓸려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레온을 피해 좌우로 갈라진 용기사들이 다시 중앙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 용기사들 보다 훨씬 앞에서 새까만 드레이크를 타고 달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음침한 회색 머리카락에 까끌거리는 턱수염, 그리고 눈은 전형적인 ‘광인’의 그것이었다.
“……저, 저자는!”
그를 본 어비스군 병사들이 하나같이 외쳤다.
“미친개 제로스다!”
“제로스가 나타났다!”
아르곤 진형의 영웅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대륙 전체에 그 악명이 알려져 있는 전쟁광 제로스. 사내아이라면 대륙 곳곳을 다니며 강자들을 꺾으며 여행하는 그의 일대기를 들어보지 않은 자가 없었다.
‘……최근 소식이 뜸하다 했더니 아르곤에 있었나.’
경계 사령관조차 식은땀을 흘렸다. 제로스가 광기에 찬 웃음소리를 내지르며 드레이크 위에서 훌쩍 도약했다. 태양빛이 번쩍 하는 듯하더니 그의 몸이 혜성같이 어비스군 진형 중앙에 떨어졌다. 이어서 새빨간 창이 붉은 궤적을 일으키며 미친 듯이 휘둘러졌다.
“크윽!”
“크아아악!”
정교하거나, 혹은 한 방 한 방이 박력있는 창술은 아니었다. 짐승처럼 거칠고 제멋대로였다.
제로스의 창에 당한 병사들은 끔찍할만큼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러나 제로스도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온 터라 앞뒤 좌우에서 몰아치는 병사들의 날카로운 반격에 상처가 났다. 제로스는 치명타만 철저하게 피하며 그들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적병의 선혈이 튀어 오를수록, 그리고 자신의 몸에 상처가 생길수록 제로스의 입 끝이 더더욱 올라갔다. 동시에 그의 힘과 속도도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더! 더! 더 해보란 말이다!”
미친개. 전쟁광. 광전사. 순수한 무력만으로 적진 한복판을 헤집고 다니는 제로스의 위용은 왜 그러한 별명들이 붙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홀로 병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뭐, 뭣들 하느냐! 저 한 명을 못 막아?”
뒤에서 지켜보는 사령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우람한 덩치의 부관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제가 가서 제로스의 목을 따오겠습니다!”
“오, 믿음직스럽구나! 가거라!”
아로게쓰 출신인 그가 양 손에 배틀액스를 든 채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제로스가 있는 곳으로 가기도 전에 댕강! 목이 달아났다.
“……어어엉?”
마치 갑자기 스스로 목이 분해된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위엔 적병이 아무도 없었다.
부관뿐만 아니라 제로스를 포위하는 다른 병사들도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댕강! 댕강! 가만히 서있던 병사들의 머리가 장난감처럼 하늘 위를 날아다녔다.
부관이 고개를 돌려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챙이 긴 카우보이 모자를 기울여 쓰고, 펄럭거리는 갈색 망토를 두른 남자가 있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이 순간적으로 들썩이자, 은빛 실선이 날아가 아군 병사들의 목을 날리고 있었다.
‘저게 뭐야? 제대로 보이지도 않잖아!’
얼핏 보면 칼자루를 쥐고 가만히 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검을 뽑는 것조차 보이지 않는 신속의 장거리 ‘발검술’. 그의 칼자루가 철컥! 소리를 낼 때마다 병사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일검에 한명씩, 그러나 발검이 점점 가속이 붙으며 마치 남자의 검집에서 은빛 섬광이 계속해서 날아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으아아!”
“뭐야! 뭐에 당하는 거야?”
동료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모습을 본 병사들이 기겁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로스의 포위망 결속이 옅어졌다.
“뭐해? 새끼들아! 날 앞에 두고 한 눈 팔지 말라고!”
물러날 길이 생겼음에도, 제로스는 오히려 더욱 터프하게 달려들었다. 피처럼 시뻘건 마력을 안개처럼 풀풀 흩날리는 그는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병사들을 베어나갔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은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자들이 속출했다.
“내가 직접 간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경계 사령관이 직접 검을 뽑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악귀같던 제로스가 물러났다.
‘하하! 드디어 놈도 체력의 한계가……!’
그러나 잘못 짚었다. 제로스가 물러나기 무섭게 아르곤의 용기사 무리가 전면을 들이받았다.
콰콰콰콰쾅! 병사들의 몸이 볼링핀처럼 날아 다녔다. 이제는 자신의 앞으로도 용기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패배라는 두 단어가 그의 눈 앞에서 일렁이는 듯 했다.
‘…젠장! 병력차가 그리 심하진 않았는데 상대조차 안……!’
콰직! 지휘관의 모습이 드레이크들에 짓밟혀 사라졌다. 어비스의 경계병들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멸했다.
============================ 작품 후기 ============================
간만에 아르곤 영웅들 써보니까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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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분 애정캐에 혼란이!
LYKS / 으으음!
T스톤 / 일단 가뿐하게 배신으로 시작을...
llSongOfBladell / 기본적으로 로드도 파스칼을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욕망이 순수하다고 판단해서 잭팟을 한번 노려보는거죠
로리콤MK / 힘내라! 로리콤!
진가도 / 그렇죠. 로드의 멸망보너스의 가치는 이제 엄청나니까요
재범 / 음, 이중스파이라... 다음편을 기대해 주시길!
왜이리들다재밌지 / 다음편을 기대해 주세용! 이번편 코멘도 감사합니다
니알라토텝 / 배신은 배신에 배신을 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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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 / 오오오! 정주행 고생하셨고 앞으로도 잘부탁드려요!
@루타르 / ㅠㅠ 이렇게 종종 남겨주시는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1)... / 사실 이름부터가 악역이었어! ㅋㅋㅋㅋㅋㅋㅋ
@로아리아 / 쪼끔 전개가 다른듯 하네요. 다음편도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