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세레스티나 윈슬렛
두두두두두두두!
드레이크를 탄 용기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로드 일행 쪽으로 몰려들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사실상 중력이 되돌아오자마자 바로 드레이크에 올라타지 않는 이상 저런 속도는 불가능했다. 로드는 방금 전, 중력이 사라지기 전에 아르곤 병사들이 신속하게 로프를 바닥에 박으며 준비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납득이 됐다. 불과 수 십초 만에 모든 준비를 끝내는 모습. 아마 저들은 몇 번이고 훈련했던 상황일 것이다.
달려오는 저 아르곤의 기룡대에서 세레스티나의 냄새가 났다. 잘 갈아진 예리한 전략이 검이 되어 목을 훑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제 저 검이 움직여 자신의 목을 떨어뜨릴 일만 남은 것이다.
‘……처음부터 우릴 병사들로부터 떨어뜨리는 계략.’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후방에 있는 어비스군 병사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올라올 채비를 하고 있겠으나,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었다.
축제의 밤, 세레스티나에게 ‘게임’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에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의 제안을 받고 조금 흥분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냥 그녀가 영토를 유린하건 말건 무시하고, 천천히 병력을 소집해 포위망을 구성했어도 됐을 텐데. 지금 와서 의미 없는 그런 생각들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야!”
갑자기 유니벨의 진홍색 눈동자가 앞으로 확 다가왔다. 깜짝 놀란 로드가 ‘앗’소리를 내며 고개를 젖혔다.
“……역시 너 요즘 이상해.”
그녀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뭐, 뭐가?”
“평상시도 그러긴 했지만 요즘 따라 더 심하게 멍 때려.”
유니벨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두 사람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로드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표정에 드러나 버렸나?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았다.
“까놓고 말할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넌 그렇게 똑똑한 사람은 아냐.”
“윽.”
그녀의 통렬한 한마디가 폐부에 파고들었다.
“조금만 상황이 안 읽혀도 답답해하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느라 코앞에서 불덩이가 날아와도 모르고 있고, 뭘 그렇게 심각하게 똑똑이인 마냥 구는 건데? 지휘관인 네가 아군 영토에서 우릴 이렇게 위기에 빠트린 것부터가.”
유니벨이 척 아르곤 진형을 가리켰다.
“넌 저 섬나라 여왕 년에게 잽도 안 된다는 거야.”
멍한 표정의 로드가 이내 피식 웃으며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래, 면목 없다.”
“그럼 물어볼게, 팬더. 그렇게 머리 짜내보니까 뭐라도 됐어?”
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뭐, 거의 코앞까지 와서야 그녀의 전략을 눈치 채고 반응하긴 했지만 결국 ‘로드라면 중간까지는 버틸 것이다.’라는 세레스티나의 그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인 꼴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뱁새가 황새 따라갈 생각 마. 그렇게 끙끙거리는 건 거유 엘프의 일이니까. 넌 달리 할 일이 있잖아.”
“……뭔데?”
“괴상한 잔머리 굴리는 거.”
로드는 풋 하고 웃었다. 상황이 상황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 그러니까 그런 죽상 짓지 말란 말야!”
“……고맙다. 유니벨.”
그래 맞다. 언제부터 이것저것 따지고 쟤기를 반복했을까. 그래봐야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그나마 할줄아는 재주는 틀을 깨고 판을 뒤집는 것. 복잡해진 머리를 비우고, 눈앞의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성이 있었다.
“어쨌거나 도망치는 건 무리겠지? 네 잔머리가 통할 부분도 아니고.”
유니벨이 팔을 빙빙 돌리면서 몸을 풀었다.
“응, 유니. 싸울 수밖에 없어.”
베아트리체가 몸 곳곳에 있는 단검들을 정리했다.
“예. 소녀도 뒤쳐지지 않겠사옵니다.”
비월이 푸르스름한 장검을 크게 한 번 휘두르며 감각을 조율했다. 세 가신들의 결연한 모습을 보며 로드도 정신을 차렸다.
“……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
그때 어디 있는지 모를 티아의 지원이 도착했다. 촤르르르륵! 세계수의 줄기가 뻗어 나오더니 네 사람이 있는 전방에 크게 들어앉았다. 이 줄기가 마치 자연 벽처럼 그들의 앞을 가로 막은 형국이 되었다.
‘나이스, 티아! 기병의 차지를 막기 위한 거구나.’
차지만 없다면 영웅들의 화력만으로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드는 후방을 바라보았다. 어비스 병사들이 놀란 말을 추스르고 이쪽으로 오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뒤 돌아볼 필요 없어, 팬더.”
유니벨이 몰려오는 적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여기서 다 같이 죽을 각오로 싸우자고.”
“……그래.”
이 소녀의 가녀린 뒷모습이 오늘따라 듬직하게 보였다.
이제 기룡대가 그들의 코앞까지 왔다. 제일 먼저 이쪽의 유니벨이 하늘로 뛰어 올랐다.
- 맹약의 폭주, 융단 폭격.
그녀의 팔이 잔상을 그리며 움직이자 새빨간 강선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기룡대의 전면에 날아가 부딪치며 연거푸 폭발을 일으켰다. 가꾸러 넘어진 드레이크들이 후방 대열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미쳤다.
‘…몇 번을 봐도 저 기술은 사기라니깐.’
1인이 퍼붓는 폭격이 기병대의 진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적 군세를 완전히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폭발의 빈틈을 비집고 용기사들이 하나 둘씩 전진했다.
“저기 벽의 빈틈이 보인다!”
“돌격하라! 어비스 왕의 목을 따라!”
티아가 급하게 손써주긴 했지만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높낮이가 서로 달랐다. 용기사들은 가장 높이가 낮은 줄기의 지점을 찾았고, 드레이크가 훌쩍 도약해 그것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용기사가 줄기를 뛰어넘어 오자마자,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허공에 도사리고 있는 듯 가슴에 금이 그어지며 핏줄기를 뿌렸다.
“더 이상의 출입은 불허하옵니다.”
스릉! 일자로 곧게 뻗은 청날의 검을 세워든 비월이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푸른 광채가 영롱한 빛을 발하며 뒤이어 들어온 용기사들의 몸을 갈라놓았다.
‘…아름답다.’
로드는 이 난리 와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춤을 추듯 화려한 검술을 펼쳐가는 비월의 모습은 전장에 피어오른 한 떨기 꽃과 같았다. 피가 튀고 끔찍한 비명소리가 난무하며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참혹한 전장의 그 무엇이라도, 고상하게 검을 휘두르는 그녀를 더럽히지 못할 것 같았다. 뺨에 튀어 오른 적의 핏자국조차 검을 쥔 그녀의 각오를 연상케 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다시 만나 힘겹게 재건한 새로운 고향이옵니다.”
다시 용기사 하나를 베어 넘긴 비월의 눈에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잃지 않겠사옵니다.”
정면은 비월이 철저하게 마크했으나 우측에서 새로운 빈틈을 찾아낸 용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 모습을 본 베아트리체가 검을 바닥에 박고 소매와 허리춤, 허벅지에서 단검을 꺼내 던지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박! 단검들은 정확히 얼굴이나 갑주의 이음새를 파고들었다. 용기사들이 차례차례 드레이크에서 떨어져 내렸다.
‘…좋아. 아직까지는 버틸만해.’
로드도 그녀들의 뒤에서 전투를 거들고 있었다. 가끔 그녀들이 놓친 적을 로드가 단검을 휘두르거나 던져서 마무리했다.
“앗.”
“꺅!”
물러나던 로드와 유니벨이 서로 등이 부딪치며 화들짝 놀랐다.
“바보야! 왜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어? 시간 벌어주는 틈에 너라도 도망치던가!”
“……여기서 혼자 도망치면 바로 기병에 따라잡히지.”
“그럼 방해하지나 말고 가만히 있던가! 이 짐짝!”
그 말에 로드가 와락 달려들어 유니벨의 옷자락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후웅! 적의 칼날이 그 뒤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반격으로 던진 로드의 단검에 이마가 찍한 용기사 하나가 부들거리며 드레이크에서 떨어졌다.
“이래도 짐짝이야?”
로드가 그녀를 놓아주며 물었다. 얼굴을 붉힌 채 멍하니 있던 유니벨이 이내 빼액 소리 질렀다.
“누, 누가 구해 달래?”
‘…구해 줘도 난리야.’
유니벨이 로드의 품에서 박차듯 날아오르며 세 방향으로 동시에 탄환을 날렸다. 정확히 세 용기사의 몸에서 개화하듯 폭발이 터지며 그들이 나자빠졌다. 바닥에 착지한 유니벨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용기사 하나를 화려한 발차기로 떨어뜨렸다. 로드는 모처럼 생긴 자신감이 다시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이 괴물들은 내가 비벼볼 상대가 아니군.’
그래도 나름대로 팀플레이는 좋았다. 네 사람의 서로의 사각을 지키고, 가끔 티아가 새로운 뿌리를 일으켜 용기사들의 침입을 견제했다.
“잘 놀고 있네.”
“……!”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줄기위에 올라가 있는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은 다 풀렸냐?”
“……제로스!”
“오, 나를 알고 있나?”
제로스가 창대 끝을 두 손으로 쥐고는 훌쩍 뛰어 올랐다. 그리곤 로드를 향해 내리쳤다.
“보답으로 고통 없이 보내주마.”
새빨간 창날이 내려오는 순간 비월이 그림같이 나타나 로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까앙!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창과 검이 서로 튕겨 나왔다.
“크하핫!”
제로스는 반동으로 인한 몸의 부담도 느끼지 않는지 지면에 내려오자마자 창을 내질렀다. 새빨간 창날이 세상에 구멍을 낼 기세로 찔러 들어왔고 비월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검을 세웠다. 카가가가각! 칼날에 창대가 불똥을 튀기며 지나갔다. 두 무기가 서로 깡!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나가더니, 멀어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휘둘러지며 재차 격돌했다.
“뭐야, 꽤 하잖아!”
그제로스의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 실렸다. 카카캉! 붉은 창격과 푸른 검격이 뒤섞이며 허공을 수없이 덧칠했다. 사납고 거친 붉은 창격이 대기를 갈가리 찢어놓으면 뒤이어 펼쳐지는 푸른 검격이 달래고 다독이듯 그 기세를 죽였다.
하지만 서서히 비월이 밀리기 시작했다. 제로스는 수비를 완전히 포기한 극단적인 공격형 창술을 구사했다. 비월의 정교한 반격에 상처가 더 많이 난 쪽은 제로스였으나 그는 피를 흘릴수록 더 강해지는 고유 능력이 있었다. 반면 비월은 상처는 없었지만 합을 주고받을수록 수세에 몰려가고 있었다.
- 밴시의 저주.
아아아아아아!
베아트리체가 비명을 지르는 검을 들고 제로스의 후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제로스는 발차기를 날려 비월을 견제하고는 창을 비스듬히 세워 베아트리체의 공격을 흘려냈다. 힘만 믿고 마구잡이로 싸우는 게 아닌, 위기대처 능력도 훌륭했다. 로드는 그가 무척 까다로운 적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좋아! 얼마든지 덤벼라!”
베아트리체와 비월이 역할을 바꾸었다. 비월이 다시 정면으로 나가 용기사들의 공격을 막았고, 베아트리체가 제로스를 상대했다. 제로스는 아래로 휘둘러지는 공격을 허리를 젖혀 피했다. 일부로 살짝 맞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피부가 살라지며 선혈이 흘러넘쳤다. 아찔한 고통과 함께 다시 피가 요동치고 투기가 끓어올랐다.
“……음?”
그런데 이상했다. 상처에서 잿빛 연기가 스멀스멀 흐르고 있었다.
‘그렇군. 회복 불가능한 피해인가.’
제로스와 같이 상처를 입어가며 싸우는 광전사 전투 스타일에는 상극이라고 볼 수 있는 힘이었지만 그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그 이능을 상대하려면 승부를 빠르게 봐야겠군.”
제로스가 창을 휘리릭 돌리더니 창끝을 자신의 몸 쪽으로 향하게 했다. 베아트리체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무슨?”
촤아아아악! 찐득한 선혈이 그의 몸에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비틀거리던 제로스의 눈에 흰자가 보였다가 돌아왔다.
“크크크. 적 걱정을 해주는 거냐? 착하기도 하지.”
그의 몸 주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피 같은 붉은 마력이 폭발하듯 확장되었다.
“다시 간다, 꼬맹이.”
============================ 작품 후기 ============================
한여름에 집에 에어컨이 없다니! 몸이 녹아흐르네요.
-----------
T스톤 / 그 비슷한게 언더하임에서 발견된..!
박성빈 / 언제나 미소만을 날려주고 가시는군요 그대여...
알테니아 / 비월은 땀냄새 마저 향기롭습니다
최카츄 / 세레스티나가 돌격해서 티아와 꼼냥꼼냥?;;
니알라토텝 / 로드가 생포 당하게 생겼어요! 끄앜ㅋㅋㅋ
책읽는고래 / 로드는 방어자 입장으로서 세레나의 계획을 막으러 온건데, 갑자기 본인이 노림받게 된거죠.
샤마신 / 오우우!
도레미파솔솔 / ㅋㅋㅋㅋ 사실 목표가 하나 더 있죠 다음편을 기대해 주시길!
...(-1)... / 최애캐 민트 비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료 샤워 제공 ㅋㅋㅋㅋㅋ
켄케루 / 목숨이 아니라 다른것을 노린다면... 흠흠...
@지리산의늑대 / 음음, 500명이라도 전원이 특화 병종에 B급 영웅 셋이 포함된 괴물 군대라면 충분히 휘둘릴수 있지 않을까요? 한때 북한 무장공비 스무명이 쳐들어 왔을때 우리나라는 몇개 군단급에, 사단들까지 엄청난 병력들이 총동원됐죠. 예시가 좀 이상할수 있겠지만... 그리고 음, 연출에서 영웅들의 활약이 너무 돋보이는 건 인정해요 ㅠㅠ 병사들이 일일이 싸우는 건 재미가 없으니 영웅들 위주로 시점이 돌아가는지라...
---
@모라논 / 카카오페이지는 아직 플랫폼 계약 준비중인걸로 알고 있어요! 네이버북스에서는 검색하면 바로 뜰겁니다
@로아리아 / 꼬마마녀가 나올 차례인가...! 사실 지휘관 창으로 꼬마마녀의 워프게이트를 요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지금 이 난전중에 대놓고 소환하면 적의 공격에 파괴당하겠죠 ㅠㅠ
@mirjoker / 전작은 카카오페이지에서 보실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