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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스티나 윈슬렛
이후 펼쳐진 전투에서 세레스티나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퇴각전’은 그 어떤 유형의 전투보다 고난도의 테크닉을 필요로 했지만, 로드는 이토록 깔끔한 퇴각전은 처음 보았다.
특히 그녀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아르곤군의 병사들은 상대의 발목을 붙들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했다. 세레스티나가 ‘결사대’로 부대를 지정하면, 그 부대에서는 일체의 불만도 없이 목숨 바쳐 임무를 수행했다.
결사대가 시간을 끄는 사이, 아르곤군은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위그드라실의 성채를 눈 깜짝할 사이에 점령해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 결사대로 그곳을 재무장시켰다. 완전히 박살난 구조물이었지만 세레스티나의 손에 들어가자 상당히 까다로운 걸림돌이 되어 어비스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쳇! 여기서 쓸데없이 너무 시간을 끌었어!”
유니벨이 땅을 박차며 중얼거렸다.
성채를 통과한 어비스군이 다시 나아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언덕위에서 드레이크들이 일 열로 쭉 나열해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수도 없이 드레이크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한 남자가 손바닥을 맞부딪친 채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죽기 싫으면 비켜!”
“이 이상은 폐하께 못 갑니다.”
그가 눈을 번쩍 뜨며 마력을 일으켰다.
- 격노의 주술.
이능이 발동되자 드레이크들이 포효했다. 위에 기수가 타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들은 스스로 언덕을 뛰어내려와 어비스군을 향해 돌진했다.
드레이크들의 차지에 전방의 병사들이 나가떨어지며 진군에 정체가 걸렸다. 적진 깊은 곳 까지 들어와 미쳐 날뛰는 드레이크들은 게노세르크의 ‘야수화’를 잠시 연상케 했다.
“용왕 폐하! 부디 무사하시길!”
남자도 검을 들고 드레이크들의 뒤를 따라 달려들었다. 그러나 곧 어느 기병의 공격에 목이 떨어졌다.
‘……세레나. 그냥 똑똑한 녀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망까지 있는 건가.’
로드는 의문이 들었다. 대체 그녀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가신들과 병사들이 이토록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는 것일까? 언제나 차분하고 냉정한 스타일의 그녀는 병사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정말로 인기가 많은 스타일의 군주는 아크였다.
로드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사이, 어비스군은 마침내 드레이크들을 정리하고 절벽으로 달려갔다.
‘……늦었군.’
로드가 속으로 한탄했다. 살아남은 아르곤의 병사들은 모두 비룡 ‘와이번’에 올라타 있었다. 아르곤의 문화시대 특화병종이자 비행병종이기도 한 ‘드래곤 라이더들은 전원이 용족 몬스터 와이번을 부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유유히 위그드라실을 떠나고 있었다.
‘역시나 그 녀석이 탈출 수단을 마련해놓지 않았을 리 없지.’
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무승부… 아니, 내 패배인가?’
로드가 허탈한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유니벨이 퍽 하고 등을 쳤다.
“야! 그런 죽상 짓지 말랬지!”
“……아하하.”
“들어라, 어비스 거지놈들아!”
와이번에 올라탄 제로스가 확성구슬을 들고 냅다 소리치고 있었다. ‘네놈들의 목은 잠시 붙여두마! 다음에 붙으면 얄짤없다!’하는 이야기였는데 말투가 거칠어서 듣고 있기가 민망했다.
“저 섬 촌놈들이 도망가는 주제에 큰 소리는!”
제로스의 도발은 어비스 진형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 유니벨에게만은 제대로 먹혔다. 그녀가 발끈해서 외쳤다.
“다들 뭐야! 저 개소릴 듣고 있기만 할 거야? 확성 구슬 있는 사람 없어?”
로드나 다른 부관들 모두 확성구슬의 마력이 다 떨어진 참이었다. 유니벨은 자신의 구수한 입담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해 무척 유감인 듯 했다.
후우웅!
난데없이 투명한 검격이 바람을 타고 유니벨에게로 날아왔다. 움찔한 그녀가 피하려고 하는데 검격은 그녀의 앞에서 바람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그녀의 빨간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
검격이 날아온 방향을 보니 이리아가 손을 척 올리며 그녀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유니벨은 피식 웃으며 중지 손가락을 세우는 것으로 화답했다.
“야! 은발 꼬맹이! 다음에 만날 땐 더 강해져 있어라! 하하하!”
제로스도 이에 질세라 점찍어 놓은 베아트리체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정작 그녀는 머릿속으로 저녁 메뉴를 생각하느라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고생했다, 주공.”
티아가 다가왔다.
“……티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노라. 저들의 주력을 절반 이상 깎아먹었고, 무엇보다 저들이 여기까지 온 ‘목적’에게 손상을 가했다.”
그녀가 확성구슬을 입에 대고 소리쳤다.
“들어라, 자랑스러운 어비스의 병사들이여! 저들은 도망쳤고, 우리가 승리했다. 사악한 용의 마수로부터 인간과 엘프들이 힘을 합쳐 위그드라실을 지켜냈노라!”
“와아아아아아아아!”
그제야 승리를 실감한 병사들이 무기를 흔들며 함성을 질러댔다.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던 위그드라실의 주민들 또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부상자는 즉시 마을로 옮기도록 하라. 각 소대장들은 인원 현황을 파악하여 부관들에게 보고하도록.”
‘……흐으, 잘한다. 티아가 나보다 몇 배는 낫군.’
로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상하게 세레스티나만 상대하면 마음에 여유가 없이 조급해졌다. 지금 여기서 반드시 그녀를 잡았어야 했는데 같은 그런 아쉬움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티아의 말처럼 서로 한방씩 주고받았으니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로드는 손 올리기에 좋은 위치에 있는 유니벨의 정수리를 슥슥 만졌다. 무엇보다 다들 무사한 것만으로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야! 자꾸 어딜 허락 없이 만져!”
“에이, 또 비싸게 군다.”
이제야 로드의 입가에도 장난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주인니이이이임!”
베아트리체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래, 베아야! 내 품에 안기렴!”
“만지지 말라고! 변태야!”
*
아르곤군의 퇴로는 진입로와 동일했다. 와이번을 타고 오펙투스의 영토에 도착한 그들은 육로로 선착장까지 이동한 다음, 준비된 함선들에 올라타 해로로 복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로로 복귀하는 중의 늦은 밤. 홀로 갑판에 나와 있는 세레스티나는 출렁이는 칠흑의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로드 폴렌티아라…… 후후.”
재미있는 상대였다.
나중에 로엔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로드는 상황에 따라 다소 어처구니없는 전략 전술을 사용했다. 세계수의 나무줄기에 얻어맞는 것으로 포위진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다니……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런 부분 또한 흥미롭게 느껴졌다.
몇 번 사용하지 못하는 워프게이트도 잘 활용했다. 마왕의 앞에 워프게이트를 소환하고, 고유 능력으로 고대의 존재들이 느끼는 적대감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니드호그가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정화의 창으로 위에서 저격했다.
“후후…….”
역시 흥미로웠다.
“봐봐, 내 말이 맞지? 맛탱이가 갔다니깐.”
멀리서 시끌벅적한 목소리들이 들리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로스, 레온, 이리아, 로엔까지. 그녀의 가신들이 갑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늦은 밤에 무슨 일로?”
그녀가 다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물었다. 로엔이 대표로 나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어기, 폐하. 어비스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기분이 유난히 좋아 보이시는 것 같아서…….”
그렇게 보였나? 세레스티나가 눈을 깜박거렸다.
“잘 모르겠군.”
“잘 모르겠긴. 갑자기 안하던 짓 하니까 이상하잖냐. 툭하면 실실 쪼개기나 하고… 전쟁에서 머리 다쳤냐?”
로엔과는 달리 머리에서 필터링 없이 내뱉고 보는 제로스였다.
“과인은 괜찮다. 그저…….”
그녀가 잠시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의 생활이, 조금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가신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즐겁긴 개뿔, 넌 저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제로스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배 끄트머리에 빨래처럼 매달려있는 니드호그가 있었다. 몸에서 정화의 창을 빼내긴 했지만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이 계속해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흘러내렸고, 눈이 퀭하게 풀려버린 것이 삶의 의욕이 없는 것 같았다. 말을 걸거나 막대로 쿡쿡 찔러도 반응이 없었다. 당장은 방법이 없었기에 드래곤캐슬에 돌아가면 용법사들에게 상태를 보이기로 했다.
“애당초 저 녀석 영입하러 이 먼 타지까지 와서 개고생한 거잖냐. 근데 정작 저 녀석을 못써먹게 되어버렸으니, 어쩔 거야? 고생한 보람이 없잖아.”
“……그러니까 재미있다는 것이다.”
세레스티나의 말에 가신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내 말 맞지? 맛탱이가 갔다니깐.”
“…갑자기 남이 괴로워하는 걸 즐기는 취향이 되신 걸까요?”
“몰라. 근데 저 엘프 새낀 뭐라는 거야?”
“병신들 다 닥쳐, 라는군.”
“대체 저 묵언수행은 언제까지…….”
가신들이 쑥덕거리던 말건, 세레스티나는 다시 갑판에 팔꿈치를 대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무가 끼여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바다는 음침함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편안함과 안정을 주는 경관이었다.
“잠깐.”
그때 제로스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며 등 뒤에 맨 창을 붙잡았다. 가신들이 ‘쟤 또 왜 저래?’ 하는 눈으로 보고 있는데 그가 냅다 창을 뽑아들어 휘둘렀다.
탱! 화살이 튕겨나가 바다 속에 풍덩 빠졌다.
“적습이군.”
스릉! 철컥. 레온과 이리아가 전투 자세를 취했다.
쿠구구구구구! 전방에 희뿌연 해무 속에서 하늘을 나는 거대한 천공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서, 성? 하늘에 떠 있어?”
그 웅장한 모습에 배에 탄 사람들이 잠시 넋을 놓고 올려다보았다. 천공성 위에는 그리핀 라이더를 비롯해 각양각색의 비행 병종들이 밤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마, 잘 있었나? 세레스티나?”
천공성 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확대되어 들렸다.
“쟨 누구야?”
제로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카루스의 왕, 파스칼이에요.”
로엔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시나가 간도 참 크데이. 니가 내를 보기 좋게 엿 먹였으니, 내도 한번 똑같이 먹여줘야지 않겠나? 여기서 전부 물고기 밥이 될줄알그라.”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저, 전투준비!”
“이카루스 놈들의 습격이다! 모두 뛰어나와!”
각 전함의 병사들이 헐레벌떡 뛰어 다녔다.
“……재미있군. 그 녀석의 작별선물인 모양이구나.”
세레스티나가 다시금 옅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슥 들어올렸다.
키에에에에엑! 이카루스의 그리폰 라이더에 대응하여, 드래곤 라이더들이 하늘에 떠올랐다.
“하지만 바다에서 우리에게 싸움을 건 것은 실수다.”
바다의 깊은 곳에서 뱀의 눈동자 같은 것이 번쩍였다. 쏴아아아아아! 갑자기 수면이 분수처럼 올라오더니 거대한 닻이 나타나 천공성으로 날아갔다. 쿠쿵! 닻에 부딪친 천공성이 크게 기우뚱했다. 동시에 출렁이는 바다 곳곳에서 무수히 많은 ‘수룡병’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야, 잘됐어. 어비스에선 똥 덜 닦은 것 마냥 찜찜했는데 이제야 속 시원히 싸울 수 있겠군.”
제로스가 창을 세우며 말했다. 당황함은 잠시뿐, 제로스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얼굴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두려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적속에서 세레스티나가 가만히 말했다.
“모두 과인의 계산 안에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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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세레스티나 윈슬렛
소속 : 아르곤
직위 : 왕
종족 : 인간
무력등급 : (D+)
통솔등급 : (E)
지략등급 : (A+)*
정치등급 : (C)
A+급 지략형 클래스 입니다.
고유능력 : 중력의 권좌
예로부터 중력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최상위의 권능으로 손꼽히며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윈슬렛 가의 이능 사용자들은 주위의 중력을 조종하여 전장의 상황을 마음대로 뒤집어놓곤 했습니다. 중력을 이용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대상을 튕겨 내거나 끌어당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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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아르곤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이분들과는 나중에 다시 대면하게 되겠네요. 이번편은 아르곤의 모든것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이전에 아크와의 전투에서처럼 맛보기 느낌으로 써보았습니다. 그래서 축제->침투방어전의 전개가 되었죠. 다음 에피소드부터는 전면전입니다. 조금 무거워지겠네요. 이제 그리 멀지 않은 완결까지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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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스톤 / 붙잡으면 예뻐해줘야지 왜 능욕이죠?!
니알라토텝 / ...!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군요! 오우; 이간질 고대 영웅 ㅋㅋㅋㅋㅋㅋㅋ
알테니아 / 좋군요. 부끄러워하면서 폭력이라니! (실명)
spadel / 으허헣 ㅠㅠ
벌레 / 비싼 처녀 빗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정말 ㅋㅋㅋㅋ
지리산의늑대 / 시원시원한게 좋죠! 대신 완결까지 한 50편은 소멸할듯...! ㅜㅠ
火炎無 / 하긴 제 자신이 작중에 등장했으면 베아고 유니고 상대가 안되겠죠.
최카츄 / 하지만 생포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ㅠㅠ
가혹 / 다음편 이제 올리는군요!
도레미파솔솔 / 기껏 힘들게 온 독룡을 저따구로 만들었으니 버릇 정도는 고쳤다고 볼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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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번 코멘도 혼란의 연속! 문파라다이스? 모르는 작품이네요 ㅠㅠ
@로리콤MK / 빠져나갔네요 ㅠㅠ
@로아리아 / 조교는 방치플레이 이후 시작되는 겁니다 (네?
@켄케루 / 역조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서운 취향을 가지고 계시군요!
도레미파솔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