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187화 (187/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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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의 나라

아르곤과의 전투 이후 어비스는 전에 없는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바드들은 평화를 노래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이런 평화의 뒷면에서는 서서히 전운 또한 감돌고 있었다.

“폐하. 카사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집무실에 들어온 애니록스가 열중쉬어 자세로 보고했다. 팔랑거리며 서류를 넘기고 있던 로드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르곤 다음엔 카사르가 말썽인가…… 어떻게 심상치 않은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줄래?”

“그, 그것이…….”

애니록스는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로드는 서류를 탁 소리 나게 책상에 덮어두고는 두 손을 깍지 껴서 턱을 받쳤다.

“자, 경청할 준비 됐으니까 부담 없이 말해.”

“……예.”

애니록스가 보고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로드의 인상이 조금씩 찌푸려졌다.

“…음, 그러니까 카사르가 병력을 소집하고 있고, 병력의 유동성이 높아졌다는 거네. 그런 건 맨날 하는 보고잖아. 카사르가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이야기야?”

“그 이동 폭이 이번에 크게 껑충 뛰어서 보고 드린 겁니다.”

로드는 ‘음.’소리를 내며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댔다.

“너희 정보부 요즘 왜 그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예산을 정보부에 몰아주고 있는지 알잖아. 적이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거 말고, 카사르 측의 목적이나 노림수 같은 고급 정보는 없어?”

“……사, 사실은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결국 애니록스가 사정을 털어 놓았다.

아크가 대대적인 군 개혁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장군 급부터 일개장졸까지 신분을 탈탈 털어서 확인했고, 신분의 증명이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거나 주위에 신분을 밝혀줄 명확한 인물이 없는 경우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부 카사르군 휘하의 ‘용병대’에 편입시켰다. 카사르 내부에서는 서약을 한 고귀한 귀족인 기사들마저 하루아침에 일개 용병이 되어버릴 정도였으니 파격적인 대개혁이었다. 그 과정에서 잠복해있던 스파이들이 정체를 발각 당해 도망치거나 죽임을 당했다.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만큼 대비가 철저하군. 역시 똑같은 수에 당할 상대가 아니야.’

예전에 거점영지 ‘플랫스퀘어’를 두고 아크의 병력들과 다투었을 때, 로드가 마지막 카드로 써먹은 것이 바로 카사르군에 잠입한 스파이를 움직여 당시 에이스 영웅인 ‘가웨인’을 함정에 빠트리는 것이었다. 그 잠입 스파이의 활약으로 아크는 전투를 중지하고 본토로 되돌아갔다.

로드의 전략에 크게 한 번 당한 아크가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로드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군 개혁까지 감행할 줄이야. 자칫 기사들의 반발을 살 수 있는 정책을 강행해서 실현시켰다는 것은 결국, 현재 카사르내에서 아크의 권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뜻했다.

‘내정도 탄탄하게 다졌나 보네. 부럽구만.’

로드가 영토 확장에 주력했고, 세레스티나는 내정에 집중했다면, 아크는 이 두 사람의 중간 정도 되는 느낌이었다. 3개국을 무너뜨리는 영토 확장과, 문화시대까지 발전시킨 내정까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실로 이상적인 밸런스였다. 그리고 이런 아크가 대놓고 로드에게 송곳니를 드러냈으니 이쪽도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언젠가 한 번 쳐들어 텐데…….’

로드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턱을 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유리해지는 쪽은 영토와 멸망보너스에 이점이 있는 어비스였다. 어비스가 문화시대에 들어선다면, 아크가 앞선 시대 발전을 한 이점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로드를 비롯해 동맹 플레이어인 치엘로나 올리버 또한, 아크가 공격해올 타이밍을 카사르의 신 문화시대 특화병종이 등장하는 시점으로 보았다. 그때가 선두 문화시대 국가로서 가장 강력할 때였으니까.

마음 같아선 로드도 문화 정책을 대폭 늘려서 빠르게 문화시대로 진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카사르가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기에 군비 증강에 예산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잘 들었어. 스파이들에게도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전달해.”

“예. 폐하!”

애니록스가 보고를 마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스파이들의 잠복이 불가능해 내부 사정을 면밀히 알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병력들의 흐름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로드는 기다려 보기로 했다.

*

‘……후아암. 졸립다.’

오전 일과를 끝낸 로드가 기지개를 켜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가신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왠진 모르겠지만 높은 언성이 오가고 있었다.

“당연히 어비스 최고의 전사들은 우립니다!”

“아니다! 스노노랑 친구들이다!”

“……?”

모여 있는 사람들은 키리안, 스노노, 로즈안느. 이상한 조합이었다. 로드가 잠시 생각해보니 이들 모두 자신의 군을 이끄는 것이 허락된 장군급들이었다.

‘아하, 오늘이 열병식이었지.’

장난기가 생긴 로드는 걸음을 멈추고 슬그머니 기둥 뒤에 숨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았다. 누구의 병사들이 더 강하니 하며 싸우는 모습은 귀여운 동네 꼬마들의 다툼을 연상케 했다. 로즈안느도 저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조금 의외긴 했지만.

“우리 베틀린의 병사들도 강하다구욧!”

로즈안느는 베틀린 특구를 다스리는 통치자이기도 하지만, 전시에는 한 나라의 장군으로 활약한다. 그녀는 통솔등급이 ‘B’일 뿐만 아니라 개인 무력 능력치도 ‘C+’급이어서 장군의 지위를 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직 로드는 그 실력을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스테이터스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왕궁 복도에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가?”

그때 맞은편 복도에서 티아가 다가왔다. 파란 망토를 두르고 머리에 화관을 쓴 그녀는 위그드라실에서 자주 보이던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세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제1군사인 티아는 장군들 보다 직급이 높았다.

“이번 열병식에서 어느 출신의 전사들이 가장 우수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키리안이 대답했다.

“……고작 그런것 때문에 아침부터 이 소란이느냐? 곧 열릴 열병식에서 최선을 다해 승부를 가리면 될 것을. 장군이란 자들이 이러고 있으니 병사들이 듣고 비웃을까 두렵구나.”

온화한 성격의 티아가 혼을 내자, 세 사람은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티아가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최고 점수는 우리 세계수 병사들이 차지하겠지만 말이다. 흠흠.”

‘……이보세요.’

로드가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티아마저 승부욕에 불타고 있다니… 나머지 세 사람들도 그 화제가 떠오르자 다시금 토론에 뛰어 들었다.

“그렇다면 주공의 생각은 어떠한가?”

티아가 기둥 뒤쪽으로 미소를 던지며 물었다. 로드가 뜨끔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다들 안녕. 저야 뭐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습니다. 모두 같은 어비스군인데요.”

로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심심풀이 삼아 한 팀을 꼽으라면?”

티아가 집요하게 물었다.

“후후, 뭐 굳이 꼽자면 가장 마지막 차례에 나오는 녀석들이겠죠.”

“……?”

*

그날 오후, 왕궁의 주 훈련장에서 열병식이 시작되었다. 국민들에게 공개되는 행사였기에 훈련장에는 관중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로드가 등장하고 사람들이 기립했다. 로드가 자리에 앉자 행사 진행자인 이브가 다시 전원 착석을 명했다. 좌석 배열은 로드가 가장 윗자리였고 그 옆에는 티아가, 나머지 장군들은 바로 아래 좌석에 앉았다.

간단한 절차와 식순이 끝나고 곧 열병식이 시작되었다. 로드의 명령으로 이번 열병식은 각 국가의 ‘특화 병종’들 위주로 참여하도록 했다. 로드는 각 영지 고유한 병사들을 훈련시키라는 명령만 내렸지, 어비스군에 합류한 신 전력들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오늘은 느긋하게 관람하고, 돌아가면 각 병종에 맞는 전술을 짜봐야겠군.’

첫 번째 차례는 아로게쓰 출신의 ‘액스워리어’들이었다. 통합 어비스 내에서도 여전히 하드웨어적인 부분에서는 최강을 자랑하는 이 우락부락한 전사들은 양손에 묵직한 배틀액스를 하나씩 들고 휘두르는 괴력을 뽐냈다. 배틀액스가 휘둘러질 때마다 ‘후웅!’ ‘후웅!’ 하는 바람소리가 폭풍우처럼 들렸다. 모든 동작에서 절도 있는 힘이 느껴졌다.

그들이 열병식에서 사용한 소품은 ‘대형 장작’이었다. 액스워리어들이 곳곳에 놓인 장작들을 단숨에 두 조각으로 쪼개며 지나갔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앞으로 질주하던 액스워리어들이 도움닫기를 하여 수 미터를 날아올라 정확히 장작에 도끼를 내리꽂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는 관중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예전보다 움직임이 더 정교해진 것 같은데?”

로드가 감탄하며 말했다.

“예, 폐하.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키리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스노노 친구들! 쟤들보다 더 세다!”

스스노가 끼어들었다. 스노노는 어비스의 클랜장 중 한 사람이었지만 발트호른에서의 활약으로 수인연합회 뿐만 아니라 수인군을 이끄는 한사람의 장군으로 인정받았다.

액스워리어들이 물러나고 수인병들이 훈련장으로 들어와 무위를 뽐냈다. 우수한 신체능력으로 든든하게 방패를 앞세우는 우인병,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며 질서정련하게 창을 내지르는 견인병, 빠른 몸놀림으로 단검을 휘두르는 묘인병. 그러나 이 수인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늑대인간들로 이루어진 ‘낭인병’들이었다.

같은 낭인병들끼리 시야를 공유하며 사각이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임무 수행 능력은 어비스군 내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소품은 날아오는 화살이었는데, 뒤돌아 등을 보인 채 동료들이 공유하는 시야만으로 화살들을 전부 쳐내고 수리검을 날려 반격까지 하는 모습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거기에 스노노의 영향을 받았는지 발톱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자 스노노가 싱글 벙글 웃는 반면 키리안의 낯빛은 굳어져갔다.

“로드님, 이제 저희 차례에요!”

이 다음은 로즈안느가 이끄는 ‘바드’들이 나타났다. 바드들의 무대는 훈련 모습을 공개하는 것 보다는 사실상 연주회에 가까웠다.

- 스펠뮤직, 레퀴엠.

둥!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바드들이 음악을 연주하자 훈련장의 분위기가 고양되더니 끓는 물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한눈을 팔며 지휘관창을 끼적거리고 있던 로드 또한 갑자기 집중력이 확 올라간 것을 느꼈다. 바드들이 악기 줄을 튕기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바드들이 연주 음악을 바꿨다.

- 스펠뮤직, 버서커.

현대의 헤비매탈과도 같은 격렬한 멜로디가 쏟아지자 훈련장에 있던 관중들이 흥분에 날뛰며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로드 또한 바뀐 감정 상태를 스스로 느끼며 감탄했다. 보조 특화 병종의 능력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는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감정 변화라면 전장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이다.

- 스펠뮤직, 디스펠 콘서트.

지잉! 음악이 한 번 더 바뀌었다. 기분 좋은 잔잔한 멜로디가 훈련장에 감돌며, 금방이라도 무대 위로 뛰어들 것 같던 관중들의 기세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아하, 상태이상 효과를 해제하는 거구나!’

로드도 버서커로 인한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디스펠 콘서트의 연주를 마친 바드들이 로드와 관중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곳곳에서 열화와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로드도 만족스럽게 박수를 쳤다.

“헤헤, 다들 어떤가요? 어때요?”

신이 난 로즈안느가 주위를 휙휙 돌아보며 물었다. 그때 티아가 말했다.

“…로즈안느 장군. 연주는 좋았지만 이 자리는 열병식이니라.”

“네?”

“무엇이라도 무위를 보이는 것이 규칙이다.”

“……헉!”

로즈안느가 아차싶은 표정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T스톤 / 코 쓰윽.

남호들 / 일찍 나가는 자가 벌래를...!

天空意行劍 / 이브는 웅인족, 베아는 견인족 컨셉으로 갔어야 했나봐요 ㅋㅋㅋ

은아준 / 앙기목띠!

잇시키이로하스 / ㅠㅠㅠㅠ

민트레인 / 갑자기 또 베아파의 득세가...

spadel / 사실 지금의 비월이 많이 나아진거죠.. 트라우마 덩어리. 비월의 이야기도 다룰 생각입니다만 목표는 역시 침대셨군!

지리산의늑대 / 일단 베아늄 드시고 다음편 보시죳!

왜이리들다재밌지 / ㅠㅠㅠㅠ 언더하임에 있어서 이번편에는 등장못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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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니아 / 특수문자 뿐이지만 이 문자에서 과다한 흡족함이 느껴진다

@니알라토텝 / 게임에서 져도 하렘 만들면 하렘 승리 엔딩이... (죄송)

@로아리아 / 이게 참 저도 고민이네요 수확 타이밍이 ㅠㅠ 머리 쥐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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