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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의 나라
“아크!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올리버는 충격에 몸이 마비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반면에 아크는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뭐긴 뭐겠어? 올리버 군. 함정이지. 사실 처음부터 여긴 우리 땅이나 다름없었거든.”
“…뭐라고?”
“협력자가 있었다고나 할까나.”
아크가 눈을 찡긋하고는 뒤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올리버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나타났다.
“에넥스 영주……!”
스톰홀의 노움족 영주 에넥스였다. 올리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 어째서…… 당신이!”
에넥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 동맹전쟁 당시 오펙투스군의 침공을 기억하시는지요?”
에넥스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 올리버를 맞을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남부에서 올라오는 오펙투스군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곳이 바로 이곳 스톰홀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말씀하셨죠. 이 나라의 그 어떤 곳이든, 적에게 짓밟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최전선에 있는 저희에게 지원을 약속하시면서 모두의 분투를 주문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올리버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우리 노움족들은 터전을 지키기 위해 용맹히 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를 악물고 버텨도 기다리던 수도의 지원군은 오지 않았고, 성은 함락 당했습니다. 많은 노움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천신 또한 그 전쟁에서 아내와 자식이 불타죽었지요.”
“…하,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예, 폐하. 폐하의 소중한 실버시타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요.”
에넥스가 그의 말을 자르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천신은 이 상황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왕실에서 일하는 인간과 드워프들은 콧방귀를 뀌더군요.”
나라 전체가 위기였는데 스톰홀이 무슨 대수란 말이오.
그런 촌에 사람이 사는 줄도 몰랐네.
난장이들이라 잘 안보였던 거 아냐? 하하하하!
“……좀 더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왕실에서는 처음부터 스톰홀에 지원군을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검토조차 하지 않았더군요. 폐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은 그저, 노움들을 사지로 몰더라도 하루 이틀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에넥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모든 것은 빌어먹을 과학을 위해.”
“…….”
올리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과학이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인류를 이롭게 하는 기술이라구요? 정작 자기나라 사람들도 지키지 못하잖습니까.”
“……나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왕입니다. 스톰홀에 지원군을 보내지 못한 건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판단이었습니다.”
“아니오, 폐하. 당신은 그저 자기 자신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에넥스가 사납게 눈을 떴다.
“이번 전쟁을 예로 들어 볼까요? 드워프들의 ‘포지’와 인간들의 ‘실버시타델’모두 빠르게 함락 당했습니다. 남아 있는 곳은 이곳 스톰홀 뿐. 갈 곳을 잃은 폐하께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들리셨습니다. 만약 이때 폐하께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이야기를 하셨다면 천신은 카사르의 제안을 뿌리치고 끝까지 폐하와 함께 싸웠을 겁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저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가 광대처럼 웃으며 올리버의 목소리를 따라했다.
“노움들도 우리와 힘을 합쳐 실버시타델을 탈환합시다!”
“……푸훕!”
아크가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 실례.”
아크가 올리버에게 느끼한 미소를 던지며 옆에 선 에넥스를 내려다보았다.
“안타깝군요, 에넥스 영주님. 참으로 가식적인 왕을 섬기셨습니다.”
“…….”
아크의 혓바닥이 뱀처럼 움직였다.
“영주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만일 정말로 운이 좋아서 실버시타델을 탈환할수 있었다 치더라도, 전쟁이 끝나면 아무도 노움들의 공을 인정해주지 않을 겁니다. 노움들은 위대한 과학의 발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다시 스톰홀이라는 우리에 갇혀 지내다 위급한 때가 오면 다시 애국을 핑계로 희생당하게 되겠죠. 이거 정말 멋지네요.”
말을 마친 아크가 올리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업자득이야. 그렇지? 올리버 군.”
“네이노오옴! 아크!”
철컥! 알란드의 영웅 콘라드가 단숨에 화포를 세워들어 아크의 방향으로 겨누었다.
“죽어라!”
퍼어어어어엉! 그러나 포탄은 발사되지 않고 화포의 몸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연기를 뒤집어쓴 콘라드가 충격을 받고 무릎을 꿇었다.
“위험한 무기를 쓰는군.”
아크의 오른편에 서 있는 흑발의 기사가 손을 쓱 내렸다. 아크의 주력 영웅 중 한사람인 ‘보호트’였다.
콘라드가 허무하게 쓰러지자 이번엔 데니스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등 뒤에 맨 기계팔을 작동시키자 관절 부위에서 강렬한 초록빛이 샘솟았다.
“오, 이거 뭐야? 뭐야? 키햐. 신기하게 생겼네.”
데니스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여섯 개의 로봇 팔 모두 잘려나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소검을 치켜세운 적발 소년이 씨익 웃었다.
“근데 별로 튼튼하진 않구나?”
“……큭!”
데니스가 과학자 가운을 거칠게 벗어던졌다. 신체에 직접 박혀있는 녹색 코어가 마력에 반응하여 지이잉! 하는 엔진소리를 냈다. 소년이 ‘휘유’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과학자라면서 보기보다 몸 좋네.”
데니스가 두 팔을 벌리며 괴성을 지르자 코어에서 녹색 빔 같은 것이 소년에게로 쏟아졌다. 소년은 여유롭게 베기 자세를 취하고는 검을 휘둘렀다.
쐐애애애액! 그의 검이 채찍처럼 늘어나 허공 전역을 난도했다. 모든 녹색 빔들이 베여 사라진 후, 소년의 몸은 데니스를 지나쳐 있었다. 가슴에 깊은 검상이 생긴 데니스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훗.”
그가 쓰러진 데니스 쪽으로 검지를 척 뻗었다.
“아직 멀었군! 네가 상대하기엔 10년은 일러!”
‘……저 자식, 아크놈한테 이상한 것만 배워가지곤.’
그 모습을 본 보호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데니스으으! 크오오오!”
이번엔 화포를 잃은 콘라드가 측면에서 맨주먹으로 달려들었다. 까앙! 그의 주먹을 검으로 가드한 소년의 몸이 뒤로 부웅 밀려났다.
“키햐, 아저씨 힘 좀 쓰는데?”
“우오오오오!”
콘라드가 양 주먹을 부딪치자 온 몸의 근육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이능은 별로 멋지진 않네.”
소년이 중얼거렸다. 한 걸음에 달려든 콘라드가 주먹을 폭포수처럼 퍼부었다. 소년은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하고 있었다.
“아차!”
뒷발의 스탭이 꼬였는지 소년의 중심이 한순간 구부정해졌다. 콘라드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안면을 향해 모든 마력을 집중시킨 주먹을 내질렀다.
터엉!
그러나 허공에 벽이 생긴 듯 그의 주먹이 가로막혔다.
“내가 방심하지 말랬지.”
이번에도 보호트가 손바닥을 뻗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콘라드가 분한 듯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아차차차.”
돌부리에 걸려 콩! 하고 엉덩방아를 찍은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콘라드의 몸은 주먹을 뻗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놀라서 무심코 죽여 버렸잖아요.”
스릉.
콘라드의 몸에 무수히 많은 선이 그어졌다. 이내 그의 상체의 절반이 사각형의 블록모양으로 갈라지며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검을 휘둘렀는지 조차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코, 콘라드! 데니스!”
올리버가 아연실색했다..
“자아, 올리버 군. 이제 믿는 구석도 사라졌으니까 순순히 항복하는 게 어때?”
아크가 올리버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우, 웃기지 마! 아크 이자식!”
올리버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아크에게 달려들었다. 주군이 공격당할 위험에 처했지만 기사들은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분수를 모른다니깐.”
화르르르륵! 아크의 손바닥에서 바위더미만한 불꽃이 일어나 쏘아져나갔다. 정면으로 달려들던 올리버는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화염은 올리버의 몸을 덮치기 전에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허억.”
너무 놀란 올리버는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신전 최고의 미스테리란 말이야.”
저벅저벅 걸어온 아크가 올리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뒤에 있던 올리버의 병사들은 이미 기사들의 손에 정리된 뒤였다.
“어째서 올리버 군 같은 사람이 신들에게 계약자로 뽑힐 수 있었던 걸까?”
“……크윽!”
아크는 올리버의 바지가 축축해진 것을 보고 조소를 흘렸다.
“겁쟁이면서 욕심은 많아. 자신감 제로, 전술에 대한 이해도 제로. 신관 잘 만나서 여기까지 운 좋게 살아남은 케이스지. 가끔 왕으로서 카리스마를 보인다고는 하지만 글쎄, 그 정도 변화는 동네꼬마를 왕좌에 앉혀놔도 나올걸? 내가 보기엔 거의 성장하지 못한 것 같은데…….”
아크가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붙잡아.”
기사들이 다가와 올리버의 팔을 붙들었다. 올리버가 몸을 흔들며 격렬히 저항하자 아크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
“우린 이제 실버시타델로 들어갈 거야. 네 애인, 보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올리버의 몸이 우뚝멈췄다. 그가 끌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크가 시선을 에넥스 영주에게로 돌렸다.
“우리 편을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영주님 덕분에 큰 힘 들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었어요.”
“황송하옵니다.”
에넥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저도 원수를 갚아서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 듯합니다.”
“그렇군요.”
아크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기사들이 에넥스와 가신들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 무슨 짓을……!”
“영주님. 제가 가슴깊이 새겨두고 따르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번 배신을 경험한 자는 두 번 배신하기 마련이다.”
“……자, 잠깐! 이야기가 다르잖……!”
촤아아아악! 기사들의 검이 휘둘러지며 일방적인 살육이 시작되었다.
“배신자는 정말 질색이라니까요.”
아크가 흥얼거리며 지휘관 창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잘가요, 에넥스(188편 ~ 189편)영주님. 그는 좋은 영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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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니아 / ....? 저 척결 대상이었어요? ㅠㅠ 엉엉
니알라토텝 / 허억; 그렇게 빠르게 판단하고 움직이는건 맵핵수준이 아닐까 합니닷!
한고급검 / 이제 주인공만 남았... 음?
아프게했어 / 그동안 계속 참고 참고 또 참아왔다가 이제 한번 욕심부리려 하다가 당하는... 비운의 캐릭터죠 ㅠㅠ
그랑엘베르 / 잠깐! 그 과학이 아닐텐데요!
도레미파솔솔 / 세레나 영입을 위한 큰그림?
왜이리들다재밌지 /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ㅅ; 더위에 녹아내리겠네요. 독자님도 힘내세요!
지리산의늑대 / 오옷, 오늘도 플레이어 헌터님 등장! 킬 말렉! -> 킬 세레나! 이번엔 타겟이 아크로군요.
dls4920 / 응원 감사합니다! 힘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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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리아 / 크으, 이것이야 말로 상부상... 응?
@...(-1)... / 올리버가 조심성이 없었지요. 본진 방어 보다는 지금이 타이밍이다! 하고 우르르 몰려간 느낌. 메드로아가 무엇인지 검색해보았더니 반물질... 폭탄?;
@최카츄 / 이거 이거 정말 훌륭한 마인드.. 가 아니라; 남캐도 예뻐해 주세용 ㅠㅠ 로즈안느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조금씩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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