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192화 (192/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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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의 나라

“소장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군.”

시끌벅적했던 방이 조용해지자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훨씬 낫군요.”

보호트가 대답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저, 저, 저기…… 가웨인경.”

어울리지 않게 눈치를 보고 있던 퍼시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웨인의 시선이 향하자 그는 자신의 짧은 적발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저,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너무 영광입니다! 호, 혹시 괜찮으시면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헤헤.”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사에게 사인 요청이라니? 철이 없어도 유분수가 있었다! 기겁한 보호트가 제지하려고 했으나 정작 가웨인은 화는커녕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성기 다 지난 옛 무인의 필체는 어디에다 쓰려고 그러시오? 소장 같은 것 보다야 그대가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하오, 천재소년.”

그녀의 말에 퍼시벌은 세상을 다 가진듯한 미소를 지었다.

“……여, 영광입니다!”

“지금은 전시이니 나중에 개인적으로 찾아주시오. 그때 소장도 그대의 사인을 받아가야 겠군.”

퍼시벌의 입가가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아, 아, 알겠습니다! 물론 찾아가야지요! 헤헤헷!”

가웨인이 불쾌한 기색이 없는 것 같자 보호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카사르의 레전드 가웨인, 마스터 나이트 보호트, 그리고 희대의 천재 퍼시벌. 이 세 사람이 현재 카사르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영웅들이었다.

가웨인의 수용력 높은 태도 덕분인지 이후 경직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어졌고, 가신들은 자유로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론다이트가 침을 튀기며 채찍질의 미학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는 그때 새로운 회의 참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떠들썩하네요. 아크는 아직 안 왔나 보죠?”

카사르의 제1군사인 ‘릴리’였다. 전원이 갑주차림인 것과는 달리 초록색 생머리에 베레모를 쓰고 있는 그녀는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릴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아크와 연인사이로 꼽히는 인물로서 카사르 진영의 실세라고 할 수 있었다.

“군사님!”

“오셨소?”

모두가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릴리도 인사를 하며 참석자들을 확인했다.

“아크 외엔 다 온 거죠? 베디베어, 슈네쳐 경, 멕케이 경은 다른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니…….”

“아직 그분께서 안 오셨다네.”

보호트가 말했다. 그녀의 인상이 일순간 찌푸려졌다.

“…아아, 그분 말이죠?”

마침 복도 쪽에서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에서 들어온 인물에게 고개를 숙였다. 보호트도, 레전드인 가웨인까지도 깊이 예를 갖추었다. 보호트가 대표로 말했다.

“오셨습니까? 기네비어 님.”

그녀는 성인 남성과 비슷한 훤칠한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부한 갈색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복장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있었지만 사람마다 차이는 있었다. 가장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은 가웨인이었고 나머지 기사들은 가웨인 때에 비하면 형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뒤에 서 있는 릴리는 예는 커녕 눈도 마주치기 싫은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좋아 보이는군요. 릴리.”

기네비어가 콕 집어 말했다. 느릿한 말투였지만 질책하는 투가 섞여 있었다. 릴리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모두 기네비어 님이 걱정해주신 덕분이지요. 그런데 기네비어 님께서는 기사로서 회의에 참여하신 것 아닌가요? 그 드레스는 대체…….”

릴리가 그녀의 드레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경멸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 복장은 그쪽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요? 릴리.”

“저는 군사로서 이 자리에 참석했으니까요.”

“어머나, 제1군사님을 몰라 뵈어서 미안하군요. 하지만 어쩌죠? 나도 직위는 군사인걸요.”

두 여자의 시선에 스파크가 튀는 듯 했다.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보호트가 얼른 끼어들어 싸움을 중재시켰다. ‘비켜 봐요, 보호트 경!’ 두 여인은 머리채를 쥐어뜯을 직전까지 갔다.

“……저 분들 왜 저러는 거예요?”

합류한지 얼마 안 된 퍼시벌이 작은 목소리로 옆에 앉은 아론다이트에게 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가끔 여자들에겐 물러설 수 없을 때가 있단다.”

“……?”

“그건 그렇고 채찍질 좋아하니?”

두 여인 싸움을 멈춘 계기는 복도 쪽에서 들린 새로운 발소리였다. 그녀들은 퍼뜩 다툼을 멈추고 몸단장을 가지런히 하며 손거울을 꺼내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안녕! 다들 모였어?”

이어서 가장 마지막에 회의실에 들어온 남자는 카사르의 왕인 아크였다.

“아아크!”

릴리가 제일 먼저 녹색머리를 휘날리며 다가가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기네비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릴리 양. 잘 있었어?”

“그럼요. 여기 앉아요.”

선수를 친 그녀가 기네비어 쪽으로 득의양양한 미소를 던지며 아크를 자리에 앉혔다.

“음? 그런데 베디베어 양이 안 보이네?”

아크가 모두를 둘러보다가 물었다.

“……베디베어는 본토에 남아 군무 업무 중이에요. 그건 그렇고 아크?”

그녀가 웃는 얼굴에서 기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 오자마자 다른 여자부터 찾는 거죠?”

“……윽!”

아크의 어깨가 귀신이라도 본 마냥 떨렸다. 그가 더듬더듬 변명을 시작했다.

“아, 아니. 난 그냥 익숙한 얼굴 하나가 안보이니까 어디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건데…….”

“그러니까 왜 저를 앞에 두고 다른 여자 이야기를 꺼내는 거냔 말이에요.”

“베디베어도 내 가신이니깐…….”

“저는 아크의 가신이 아닌가요?”

“미안해! 릴리 양. 내가 또 잘못을……!”

“뭐가 미안한지 말씀해 보실래요?”

릴리가 무섭게 몰아쳤다. 아크는 가신들에게 양해해달라는 눈짓을 한 번 하고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릴리가 균형을 잃고 끌려오는 사이 아크가 몸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헉!”

“꼬맹이는 이런 거 보면 안 돼.”

아론다이트가 퍼시벌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나머지 가신들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지만 기사도와 규율을 중시하는 가웨인의 얼굴은 좋지 않았고, 기네비어는 아예 고개를 매몰차게 돌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후 입맞춤이 끝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고개를 들었다. 릴리는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로 아크의 가슴에 숨듯 안겼다.

“아, 뭐예요. 다들 보는데 갑자기 그런 짓이나 하고.”

그렇게 투정부리듯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져있었다.

“너를 향한 사랑에 격식이 무슨 필요겠어? 릴리 양.”

“……아크.”

아크는 릴리를 자리로 앉히며 다시금 양해의 손짓을 가신들에게 보냈다. 가웨인은 굳은 표정을 풀었지만 여전히 탐탁찮은 기운이 얼굴에 남아있었다. 아크는 기네비어가 도중에 나가버렸다는 사실을 눈치 챘지만 별말 하지 않고 회의를 진행시켰다.

“알란드전은 제대로 된 전쟁이라고 할 수 없지. 이제부터가 본편입니다.”

아크의 발언에 영웅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퍼시벌이 눈을 반짝이며 팔을 귀 옆으로 착 붙였다.

“오, 그래. 뭔가 궁금한 게 있어? 우리의 보물 퍼시벌 군.”

아크가 직접 발언권을 주자 퍼시벌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그, 그 말씀은 알란드에 이어 바로 어비스 공략을 감행하겠다는 것인지요?”

“응, 맞아. 검의 천재라고 들었는데, 전술적인 안목까지 뛰어난 걸.”

아크의 사뿐한 미소에 퍼시벌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퍼시벌 군의 말 대로입니다. 알란드 공략은 즉흥에 가까웠지만, 어비스는 공략은 예정된 기일에 예정된 순서대로 진행할 겁니다. 기왕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 기세를 몰아서 바로 어비스까지 정복하도록 하죠.”

“좋습니다!”

“낙오자들의 나라 따위!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가신들이 환호를 보냈다.

“소장은 조금 급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웨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발언 즉시 모두를 입 다물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파급력이 있었다. 주위 가신들은 입도 뻥긋 하지 못하고 아크와 가웨인의 눈치를 번갈아 보았다.

“어비스는 강대한 나라입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편이…….”

“더 여유를 가지면 어비스는 아무도 말릴 수 없이 커져버리게 될 겁니다. 가웨인 경.”

아크가 바로 받아쳤다. 가웨인이 반박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몇 개국의 전력이 어비스 한 나라에 모여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나마 지금이 우리가 우위인 채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입니다.”

“……하지만 페하. 이곳 알란드의 영지들을 안정화 시키지 못한 채로 강대국과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예, 당분간은 방치할 수밖에 없겠죠.”

아크는 순순히 인정했다.

“폐하. 책임국이 통치하지 않으면 영지들은 혼란에 빠질 겁니다.”

“가웨인 경.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크는 여전히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지금 당장은 통치보다 적의 섬멸이 더 중요합니다. 어비스를 물리치면 대륙의 그 어떤 나라도 우리에게 거스를 수 없게 되겠죠. 통치는 그 이후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습니다, 가웨인 경.”

“……알겠습니다.”

가웨인이 고개를 숙였다.

‘이빨 빠진 호랑이로군. 레전드는 레전드지만 역시 아크님이 최고야.’

퍼시벌이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 계획은 꽤나 오래전부터 쭉 다듬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몫을 해내십시오. 자신을 배제하고 전체의 일부로 움직이십시오.”

아크의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제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십시오. 그리하면 언제나처럼 승리는 굴러들어 올겁니다.”

가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의 예를 취했다.

============================ 작품 후기 ============================

루타르 / 오오옷,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알테니아 / 뿌뿌뿝?!

로리콤MK / 뭐죠 이건, 최신 유행입니까?!

T스톤 / 남자였다면 예전에 아크의 "가웨인의 엉덩이를 때려주러 가야하거든." 라는 발언이 적절하지 않았겠죠. 네 개소리였습니다.

ZzeRoN / ㅎㅎ;

리드로우 / 아지매, 그 레전드 맞죠? 이젠 아니야...

니알라토텝 / 카사르 영웅들 하렘각을 쟤고 계셨군요;

지리산의늑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딥빡이 느껴지는 대사

火炎無 / 넵넵??

katzbal / 음, 그편이 깔끔하겠군요.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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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리아 / 후후후후후훟... 이 아니라; 무슨 범위가 넓다는 건지 ㅇ_ㅇ;

@...(-1)... / 은하계를 통째로 박살낼 실력이 수련을 부지런히 된다고 닿는 영역인가요! 그리고 로드는 항상 가신들에게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죠. 나쁘게 말하면 팔랑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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