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2 군략과 모략의 상관관계 =========================
카사르병과 수인병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격전지 계곡에서 조금 더 높은 지점. 폭이 크게 줄어든 이곳의 계곡은 물이 한 번에 빠져나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소가죽과 굵은 쇠줄 등이 뒤엉켜 쓰레기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계곡의 옆으로는 카사르군의 지휘관인 ‘기네비어’가 서 있었다. 두 팔을 꼰 채 산맥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뾰족한 눈매와 그 아래로 보이는 점이 관능적이면서도 폐퇴적인 느낌을 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기네비어 님.”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여성 부관이 기네비어 쪽으로 다가왔다. 기네비어의 키가 워낙 커서 눈을 마주하려면 그녀가 고개를 들어야 했다.
“실로 훌륭한 수공이었습니다.”
소가죽에 쇠줄을 꿰어 물의 흐름을 막고 기다렸다가, 수인병들이 계곡을 중간정도 건넜을 때에 물을 터뜨렸다. 수많은 수인들이 급류에 휩쓸려 내려갔고 적의 진형은 반쪽이 되었다. 이어서 숨어있던 매복병들의 결정타까지. 산 아래에서 간간히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직접 보지 않아도 전투의 결과는 뻔했다.
잘하면 전멸. 못해도 압승.
“기네비어님의 지혜는 끝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저들이 이 산에 와서 계곡을 건널 줄 알고 수공을 준비하신 겁니까?”
“…어비스군의 움직임이야 뻔하지 않겠느냐.”
마침내 기네비어가 입을 열었다.
“강 너머에 우리군이 버티고 있었다. 도하를 하려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할 것이고, 하류로 우회하자니 이카루스를 상대해야 하지. 저들이 안전하게 강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이래야 이 산을 통과하는 것밖에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저들은 낮에 뗏목도 다수 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도하작전으로 강행 돌파할 가능성도 있었을 텐데 기네비어 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수공의 준비를 명하셨지 않습니까?”
“곳곳에 숨겨진 단서들을 조합해보니 확신이 서더군.”
그녀의 그 말에 부관이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 듯 기네비어가 부관의 턱을 가볍게 쓸어 만졌다.
“한 가지만 이야기해볼까? 우리가 처음에 유인책을 사용했을 때, 저들은 매복을 간파한 뒤 깜찍하게도 화공을 시도했다더구나.”
“그 사건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들이 산에 오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기네비어는 대답 없이 빤히 부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생각해보던 부관이 말했다.
“매복계에 걸려들지 않았으니 수인군의 지휘관은 신중한 성격이다. 일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건 저들 수인군에 ‘책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
“그 화공은 군략을 아는 자의 솜씨였다. 우리 병사들이 어물거렸다간 전부 타죽었겠지. 물론 내가 보기엔 연출이 허술해서 불합격이지만.”
“……아하하.”
부관이 어색하게 웃었다. 자만하는 것처럼 들려도 기네비어는 그럴만할 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구사하는 책략에도 책사의 성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잔머리 굴리기 좋아하는 적의 책사가 큰 피해를 동반하는 최하의 수인 ‘도하’에 동의 할 것이라고 보느냐? 숲에서처럼 어떻게든 꾀를 내서 피해를 줄이고 싶었을 것이야. 그리고 열심히 꾀를 짜내다보면 지혜는 이 산으로 모이지. 수인들이 뗏목을 만들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땐 속셈이 훤히 보여서 우습더구나. 오히려 나는 더 확신했지. 어중간한 꾀를 가진 자는 그냥 용감한 자만도 못한 법이다.”
“아아……!”
부관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째서 기네비어 님이 아니라 릴리 경이 최고 군사인지 모르겠…… 힉!”
부관이 말실수를 자각한 듯 움찔했다. 기네비어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내 앞에서 그 여자의 이야기는 삼가라 했을 터.”
“시,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흠, 되었다. 이 죗값은 오늘 밤에 치르면 될 터이니.”
그 말에 부관의 얼굴이 홍시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기네비어가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저어, 기네비어 님.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질문을 허 하마. 내 너라면 뭐든 대답해주마.”
“왕궁에 있으셔야 할 고귀하신 분께서, 무슨 연유로 이런 위험한 전장에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자리를 얻기 위함이다.”
그 자리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던 부관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얌전히 앉아서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세상이 아니다.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지.”
기네비어는 씁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가웨인이나 보호트를 포함한 카사르의 모든 기사들이 제2 군사에 불과한 그녀에게 깍듯이 대하는 이유가 있었다. 기네비어는 아크의 ‘약혼자’였다. 원래라면 지금쯤 왕후가 됐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푹 빠져있던 아크는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인 것처럼 성격이 바뀌었고, 동시에 자신에게도 소홀해졌다. 그는 평민출신의 릴리와 사랑을 나누었으며 다른 여자가신들에게도 관심을 주었다. 하지만 약혼자인 자신에게 만큼은 벽을 만들고 거리를 두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아크를 홀리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던 남자가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가 자신을 배척하고 있었다.
수많은 밤을 고민으로 보냈던 기네비어는 본인 스스로가 변하기로 했다. 아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 바로 인재를 무엇보다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평민인 릴리에게 푹 빠진 것만 봐도 그랬다.
그래서 기네비어 또한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기로 했다. 예비 왕비였지만, 스스로 자청해 군사 자리에 올랐고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스스로 왕비가 될 자격과 위엄을 갖출 것이리라. 그러면 아크가 조금이라도 다시 봐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기네비어 님. 파란기입니다. 전투가 끝난 듯하니 내려가시죠.”
“……그래.”
결과는 더 볼 것도 없었다.
소수의 생존자를 제외하곤, 수인군 3000은 이곳 아드리아 산에서 전멸했다.
기네비어군의 대승이었다.
*
두 나라의 군사들이 각각 화공과 수공으로 큰 승리를 하나씩 거머쥐었다면, 나라를 대표하는 통솔형 영웅들의 전투는 현재진행형이었다.
1일차는 가웨인의 압승. 2일차는 로즈안느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특히 2일차에는 각성한 로즈안느의 4중연주로 승기를 잡았지만, 로즈안느 쪽도 본인과 바드들의 체력이 한계였기 때문에 그날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
3일차에는 새벽부터 쏟아지는 엄청난 폭우에 도저히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피차 서로 죽어나가는 진흙탕 싸움은 원하지 않았고, 다음날에 있을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4일차의 아침이 밝았다.
전쟁 전, 가웨인의 지휘관 천막에서는 묘하게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없소.”
청색 머리카락의 여기사, 가웨인이 제장들의 얼굴을 쭉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저들에게 뒤쳐지고 있소. 오늘 안에는 반드시 승부를 내야만 하오.”
“하오나, 장군! 둘째 날은 우리가 후퇴하긴 했지만 양군의 총 피해는 비슷하니 결코 지고 있는 것은 아니…….”
“그것이 지고 있다는 것이오.”
가웨인이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책상에 펼쳐놓은 지도로 시선을 움직였다.
“우리는 카사르의 최정예 부대이고, 폐하의 작전 또한 우리군 위주로 짜여졌소. 본래 폐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은 이틀. 이틀 안에 적군을 파하고.”
그녀가 손가락으로 체스 말을 집어 적의 말을 쓰러트리며 그 자리에 위치시켰다.
“후방으로 돌아가 강기슭에 자리고 잡고 있을 기네비어군을 도와 적의 등을 쳐 일거에 없애는 것이 본래 계획이었소. 꼭 기네비어군이 아니더라도…….”
그가 쥐고 있는 체스 말이 북쪽으로 이동했다.
“퍼시벌군이나 제레인트군과 연합하여 다른 군을 말살할 수 있었겠지. 이번 전투는 한 군의 승패가 다른 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소. 그런데 어비스에서도 베아트리체군 같이 알려진 강군이 아닌, 이름 모를 베틀린의 적장을 상대로 가장 큰 역할을 맡은 우리가 시간이 지지부진하게 끌리고 있소. 다들 무엇이 문제인지 아시겠소?”
제장들은 굳게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장군. 위그드라실로 향했던 퍼시벌군과의 연락이 갑자기 끊겼다고 합니다.”
가웨인이 침음을 흘렸다.
“그 소식은 소장도 들었소. 이미 당했을 지도 모르겠군.”
“예? 그 정도의 규모의 병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가…….”
“예측일 뿐이오. 다만, 우리가 계획대로 로즈안느군을 격파했다면 퍼시벌군이 당할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의 책임이 아니잖습니까!”
“보통이라면 그렇겠지.”
그녀가 착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군의 사정이 어떤지는 경도 알고 있지 않소? 폐하께서는 어떤 핑계를 대서든지 간에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오.”
제장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플레이어 아크는 ‘기사의 나라 카사르’를 겉부터 속까지 완전히 자신의 색깔로 바꾸어 놓았다. 기존 기사위주의 시스템에서 탈피해 평민들도 누구나 체계적인 기사교육을 받게 했으며, 기사들의 땅이나 봉급 등 여러 민감한 문제들을 고쳤다. 심지어 기사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기사도’나 규율 까지 손을 대다가 기존 기사들과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현재 사람들이 부르는 ‘구 기사’와 ‘신 기사’는 단순히 세대 차이가 아니라, 아크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와 찬성하는 자로 나뉜 것이다.
그리고 ‘구 기사’의 대표 격인 인물이 바로 카사르의 전설 가웨인이었다. 본래 그녀는 카사르에서 가장 명예로운 마스터 나이트로서 왕인 아크보다 더한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균형이 깨진 것은 글레이시온과의 전투에서였다. 가웨인은 로드가 보낸 스파이의 정보를 철석같이 믿어서 글레이시온의 함정에 빠질 뻔 했지만, 아크가 로드와 거래하는 것으로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
아크는 이 책임을 가웨인에게 물었고 그렇지 않아도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마스터 나이트 자리를 비롯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평기사로 돌아왔다. 이는 ‘구 기사’의 몰락을 뜻했고, 더 이상 거치적거릴게 없던 아크는 과감한 개혁을 펼치며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자들을 여러 구실로 없앴다.
자신이 물러나자 자신을 따르던 수많은 기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걸 본 그녀는 책임감을 느끼고 다시 왕궁에 입성했다. 아크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수모를 겪어야 했지만 카사르군에 복직한 그녀는 다시금 나라의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크에게 있어서 가웨인은 여전히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이었다. 아크는 가웨인의 실력과 전설이라는 명성 때문에 그녀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속칭 ‘에이스 길들이기’를 계속 해나갔다. 온전히 자신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장기말로 만들기 위해.
가웨인의 입장에서는 안팎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 상황. 어떻게 보면 이번이 구 기사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이틀 안에 적을 격파하고 타 군을 지원하는 게 그리 쉬운 일입니까? 그리고 이를 못하면 또 아크가 문제 삼을 거라니, 말도 안 됩니다!”
한 기사가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씩 불만을 터뜨렸다.
“애초에 그 무리한 계획 자체가 트집 잡기 위함이 아닙니까? 못하겠다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거절했다간 ‘가웨인군’은 이번 전쟁에 출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오. 지금쯤 우리는 퍼시벌같은 애송이의 밑에 들어가 말먹이나 주고 있었겠지.”
“하필 어제 또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하루가 더 지연됐으니……. 하늘도 돕질 않는구려.”
기사들이 푸념을 늘어놓고 있자 가웨인이 테이블을 두들기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미 지나간 일을 탓해도 소용없소. 벌을 받을 때 받더라도 우리는 당장 부딪친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오. 소장의 목숨을 걸고, 오늘 안에는 반드시 적군을 섬멸하겠소.”
천막안의 기사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검을 가슴위로 들어올렸다.
“소인들의 목숨도 보태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최카츄 / 부모님 쿠폰 감사합니다아아! 로즈안느 고생많이 했는데 몸보신좀 시켜야겠군요 ㅠㅠ
알테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글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로리콤MK / 감사합니다! 지금은 요격군 시점이라, 베아랑 유니벨의 주력군도 멀지않아 곧 나올거예요!
니알라토텝 / 영지 전체를 관통하는 만큼 강이 깊고 넓어서 상류에서 건너려고 해도 뗏목을 만들어야 한답니다~
T스톤 / B급 영웅만 생존설(?)
벌레 / ㅋㅋㅋㅋㅋ 알 사람은 다 알지만 본인만 필사적인(?)
...(-1)... / 안전불감증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고길동은 소드마스터라는 칭호로는 그 그릇에 맞추기엔 부족하겠군요. 웨펀마스터 고길동으로 가시죠
차아칸앙마 / 오오오, 감사합니다아앗!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로아리아 / 로드는 굴려야 제맛...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