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6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
“압제국 카사르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무장한 영지민들이 악을 지르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듣고 있던 기사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며 옆의 병사를 돌아보았다.
“저들이 혁명군이라고? 혁명군은 붉은 띠를 몸에 두른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러고 보니.”
병사가 무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마을을 지키고 있는 남자들 중에서 붉은 띠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군이든 뭐든, 나는 내 임무를 다할 뿐이다.”
기사가 확성구슬을 꺼내 입에 댔다.
“아직 소식 못 들었나? 이 마을은 카사르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 모두 무장을 해제하고, 마을의 우두머리는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어라! 그렇지 않으면 카사르의 군대가 몰려와 이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리라!”
여기 있는 100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백 명을 쫓아내면 천이고 이천이고 병력은 끊임없이 몰려올 것이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사의 협박에도 영지민들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뜸 예고 없이 활을 꺼내더니 불청객들에게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기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듯 물러났다.
“풋.”
“킥.”
그 모습이 우스웠던지 뒤에서 병사들이 비웃음이 들렸다. 기사는 애써 태연한 척 헛기침을 하며 다시 위엄 있는 목소리를 냈다.
“감히 명예로운 카사르의 기사를 공격하다니! 정녕 다 죽고 싶은 것이더냐?”
“그깟 협박 따위에 굴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 혁명군이다!”
“……뭐?”
기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유 혁명군? 혁명군이면 혁명군이지 자유 혁명군은 또 뭐란 말인가?
“우리는 어비스도, 카사르의 소속도 아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지킨다!”
“위기에 백성을 버리는 어비스나, 귀족들이 지배하는 카사르나 어느 쪽도 믿을 수 없다!”
“우오오오오!”
대기가 떨렸다. 일개 마을 치고는 그 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눈치를 보던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다가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죠? 나으리.”
“어쩌긴.”
스릉!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저것들이 무장을 했다고 기고만장하구나. 그래봤자 민병. 짓밟아 주겠다!”
“이기면 마을을 마음대로 하는 되는 거겠지요?”
“…반역자들이니 상관없겠지. 쳐라!”
분노한 기사와 탐욕에 눈 먼 병사들이 마을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는군.”
그리고 이 장면을 울타리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장신의 남자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신뢰어린 시선이 그에게로 모이고 있었다.
“부탁하오, 형씨!”
“우리 마을을 지켜주세요!”
남자가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앞으로 나섰다. 한 손으로는 검을, 다른 한 손으로는 붉은 코팅이 되어 있는 안경을 품에서 꺼내 착용했다. 형언하기 힘든 응축된 살기가 이 남자로부터 흘러나왔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위해 투쟁합시다!”
“오오오오오오!”
마을사람들이 무기를 드높이며 격한 함성을 질러댔다.
*
카사르의 경계를 넘어 진군하고 있는 로드의 본군 1만 대군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유니벨, 베아트리체, 키리안으로 이어지는 영웅진에, 특화 병종인 키메라와 어쌔신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정예들이었다. 이 군세가 어비스의 핵심 전력이었다.
“팬더! 저길 봐.”
유니벨이 로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멀리서 흐릿하게 보이는 성을 가리켰다.
“응, 다 왔네.”
로드가 고개를 들었다. 카사르의 첫 번째 성. 레드킵이 보였다.
레드킵은 그동안 로드가 보아왔던 그 어떤 요새보다 성벽이 높았다. 성을 지을 때 황토를 섞은 것인지 성벽은 석양을 머금은 바위처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병사들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장비를 점검하거나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응?’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드의 시야에 갑자기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 ‘아크 더 라운드’님이 ‘로드 폴렌티아’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바로 반응이 오는군.’
가신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로 떠들고 있는 사이, 로드는 드레이크의 속도를 늦춰 슬그머니 후열로 물러나 통신수정구를 꺼냈다. 그리고 허공에 손을 뻗어 대화 신청을 수락했다.
“안녕, 로드 군!”
이질적인 시스템 창의 화면이 시야를 꽉 채웠고, 그 안에서 아크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묵직했던 주위의 공기가 뭉실뭉실 풀어지는 듯 했다. 사람의 경계심을 풀게 만드는 고유능력이라도 개발한 것일까, 아크 또한 세레스티나처럼 특유의 분위기가 강한 인물이었다.
“오랜만이다. 아크.”
물론 로드에게는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저 실실 웃는 미소의 가면 뒤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보면 절로 경계심이 생겨났다.
“히야! 언제나 로드 군은 내 기대를 뛰어넘는다니깐? 설마 이런 상황에서 먼저 공격할 줄은 몰랐어.”
아크가 재기발랄한 톤으로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았다. 로드는 가만히 듣고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때 아크의 미소에 묘한 비틀림이 생겼다.
“애 좀 썼네?”
“……?”
“이대로는 질질 끌려 다닐 것 같으니까, 조금 무리해서라도 변수를 만들어 낼 생각이었지?”
발랄하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싹 가라앉았다. 아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두 팔을 들어 보였다.
“그런 우연적 요소에 자꾸 기대려고 하니까 발전이 없는 거야, 로드 군. 지금까지는 그런 무모한 도박들이 대충 맞아 떨어졌겠지. 상대가 허접한 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연이 반복된다고 해서 그게 네 실력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너도 애 좀 썼는데?”
로드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반박했다.
“그런 도발 멘트는 즉석으로 정하는 거야? 아니면 미리 생각해 오는 거야? 언제나 그런 도발을 던져보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패턴은 변함이 없구나. 재미없어.”
“……키킥!”
아크는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낄낄 웃어댔다. 로드는 입가에 미소를 깨끗하게 지우며 말했다.
“그보다, 내 동맹은 잘 있어?”
아크가 잠시 멈칫했다.
“동맹? 아하, 올리버 군 말이구나. 당연히 잘 지내고 있지. 내가 마련해준 스위트 룸에서 왕 못지않은 생활을…….”
“무슨 꿍꿍이냐?”
로드가 말을 자르며 물음을 던졌다.
“왜 멸망보너스를 취하지 않는 거지? 혜택을 받고 전쟁을 시작하는 게 좋았을 텐데.”
“내 포로를 어떻게 다루던 내 마음이지 않을까? 로드 군.”
“어차피 없앨 생각이라면, 괜히 사람 마음 가지고 놀지 말란 소리야.”
아크가 눈웃음을 지었다. 실눈처럼 가늘어진 눈매가 여우눈을 연상케 했다.
“로드 군. 초등학교 다닐 때 동물 길러본 적 있어?”
‘……또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그렇게 생각하던 로드의 눈동자가 큼지막하게 떠졌다.
“……너.”
“붙잡고 난 뒤에 안 사실이지만 알란드도 문화시대가 얼마 안 남았더라? 속국상태로 실버시타델을 굴리기만 하면 문화게이지가 오르더라구. 문화시대가 된 후에 끝장내면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겠지. 그때까지만 좀 가지고 놀 거야.”
“……날 상대로 꽤나 여유만만한데.”
피식 웃음을 흘린 로드가 눈을 치켜뜨며 아크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여전히 악질적이야.”
아크 또한 미소를 거두고 로드의 시선을 마주했다.
“기왕이면 여기서 로드 군도 붙잡아서 올리버 군의 룸메이트로 두고 싶은데. 어비스도 문화시대까지 얼마 안 남았지?”
“헛소리 그만하시고, 붙어보자고.”
로드가 짤막하게 선전포고했다. 계속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열불이 치밀어서 참기 힘들었다.
“로드 군.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로드는 지휘관 창을 꺼버리려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네 주력군이 여기까지 오는 사이, 내가 보낸 두 개의 군세가 퍼들스퀘어로 향하고 있어.”
“…….”
로드가 반응이 없자 아크가 히죽 웃었다.
“퍼들스퀘어에 병력이 얼마 없는 걸로 아는데. 그렇지? 특별히 내가 아끼는 릴리 양을 보냈어. 그녀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날 시험하고 있군.’
로드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리고 아크는 로드의 반응을 흥미롭게 기다렸다.
‘어떻게 나올 거야? 로드 군.’
만약 레드킵 공성이 진심이 아니라면 로드는 당장이라도 퍼들스퀘어로 달려가야 할 판이었다. 퍼들스퀘어가 뚫리면 언더하임까지 일직선.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로드가 허공에 손가락을 뻗었다.
“잘못 짚었어, 아크. 나중에 봐.”
“……?”
로드는 그 말을 끝으로 지휘관 창을 닫아버렸다. 잠시 텅 빈 허공을 바라보던 아크가 소리 내어 킥킥댔다.
‘좋아, 좋아. 역시 흥미로운 녀석이야.’
아크는 로드가 가장 중요한 언더하임을 비우면서까지 레드킵을 공략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선제공격을 할 생각이었다면 그의 병력이 온전할 때나 가능했지, 지금에서는 수비를 하며 빈틈을 노리는 것이 어비스에 있어 최선일 것이다.
현재 카사르는 3개군이 어비스 본토 아래의 후방 영지들을 장악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크가 명령만 내리면, 그들은 점령을 중단하고 바로 언더하임으로 올라올 것이다. 여기에 릴리가 퍼들스퀘어를 무너뜨리고 전진한다면 언더하임은 자그마치 5개 군세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그리고 이곳 레드킵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아크 본인과 마스터 나이트인 보호트가 있다. 수비병은 5천뿐이지만 레드킵의 견고함을 생각했을 때 1만군의 공격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
‘뭘 생각하는 진 모르겠다만, 열심히 해보라구. 로드 군.’
이제 성의 바로 앞까지 어비스군이 도달했다. 조금만 더 들어오면 화살 사정거리 내였다.
‘……좋아.’
로드가 훅 하고 숨을 내뱉는 것으로 긴장을 날려버리며 확성구슬을 들었다.
“시작하자!”
“와아아아아아아아!”
펄럭! 진형에 명령을 알리는 깃발들이 솟아오르며 어비스군이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한쪽은 로드와 유니벨이 있는 본군, 다른 한쪽은 베아트리체군과 키리안군이었다.
‘흠, 서문과 동문의 동시 공략?’
아크가 팔을 뻗어 외쳤다.
“서문과 동문에 추가 병력을 배치해.”
“예, 폐하!”
레드킵의 수비 병력들이 어비스군의 진행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아크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두 갈래의 어비스군은 성문에 도착했음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성문을 지나쳐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뭐지?”
“북문을 노리는 건가?”
카사르의 제장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북문쪽으로 병사들을 보냈다.
‘…설마,’
아크는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애초부터 목표는 레드킵이 아니라…….’
아크가 방금 머릿속으로 상상한 일이 현실에서 똑같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갈래의 어비스군은 레드킵을 그대로 지나쳐서 북쪽으로 쭉 달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공격은 없었다. 화살 단 한발도 날아오지 않았다.
“…….”
짙은 정적이 레드킵에 내려앉았다.
“이 정신 나간 새끼가!”
쾅! 아크가 검을 내팽개쳤다. 제장들이 놀란 얼굴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아크의 얼굴에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또 상식을 벗어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그냥 좀 정상적으로 싸우면 어디가 덧난단 말인가? 로드는 보급선이나 퇴로 같은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저대로 내 수도까지 직행할 생각이야.’
수도 교환. 그것이 로드의 노림수였다.
============================ 작품 후기 ============================
알테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 비월도 몇편 지나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로리콤MK / 옙! 물론 그 예상을 뒤집는게 어렵죠. 전술을 아주 촘촘하고 빈틈없이 짜는게 특기인지라...
니알라토텝 / ㅠㅠ 주인공이 힘든 시점에는 어쩔수 없나봐요. 음.
지리산의늑대 / 아마 당분간은 안죽지 않을까요? 스토리는 진행해야 하니
하치만4세 /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1)... / 부인숫자가 100이 넘어간다니, 처죽여야겠군요
왜이리들다재밌지 / ㅋㅋㅋ 아크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보기 드물더군요
벌레 / 가웨인 스카우트!
루타르 / 나중에 작중에서 다루겠지만, 간단히 하나면 설명하자면 정보력이 우수한 어비스는 촘촘한 전략을 구사하는 아크에게 있어 상당히 눈앳가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