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7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
아크는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상대는 5000명의 병력이 주둔해있는 거점영지 레드킵을 거치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아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무 위험천만 전술이 아닌가?
첫째로, 보급로가 끊긴다. 식량이 다 떨어지면 저들은 전멸한다. 둘째로, 퇴로가 끊긴다. 단 한 번의 패배가 전 병력의 몰살로 이어지고, 지원군도 기대할 수 없다. 셋째로, 성에 주둔해있는 병력들이 자유로워진다. 중간성을 무시하고 후방성을 먼저 치더라도, 중간성의 병력이 뒤따라와 뒤를 잡으면 결국은 두 성의 병력을 전부 상대하는 꼴이 된다. 의미가 없다.
“……어이, 아크.”
보호트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추격군을 편성해서 저들의 등을 쫓겠다. 괜찮지?”
“잠깐만, 보호트 군.”
아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의문이 생겼다.
로드의 전략은 정말로 ‘수도 교환’이 맞는가?
그리고 자신의 수도 ‘엠파이어’와 ‘언더하임’을 맞교환 하면 어느 쪽이 더 이득을 보는가?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아크는 자신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기사들에게 적용된 연구 효과들이 약해지면 전체적인 전투력이 떨어지긴 한다. 하지만 어비스는 가장 까다로운 스파이와 혁명단이 무력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차이는 명백했다.
‘그럼 로드는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까처럼 시원스레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동맹국인 켈타인 또한 하데스와 전쟁 중이기 때문에, 워프게이트 지원을 기대하는 건 힘들 것이다. 애초에 1만 대군을 옮길 양의 테라는 보유하고 있지 않겠지만.
‘모르겠군. 단서가 너무 없어.’
아크는 이쪽 고민은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저들이 레드킵을 내버려두고 간 것만으로도 상식선에서 벗어났다. 더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대신 아크는 당장 자신이 쥐고 있는 카드들을 점검해 보았다.
‘엠파이어의 방비는 완벽해. 수성에 능통한 멕케이 경이 지키고 있고, 수비 병력도 예비병을 합치면 5천 정도는 된다. 그리고 내 플레이어 스킬도 남아있으니 충분히 버틸 수 있어. 5개 군을 동원하는 우리는 언더하임을 차지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지만, 저들은 엠파이어를 무너뜨리지 못할 수도 있다.’
보호트가 옆에서 재촉하듯 ‘어이.’하고 말을 걸었다.
“아, 미안. 보호트 군. 일단 추격군을 편성해 둬.”
“그러지.”
불리할 것 없다는 생각에 아크는 다시금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정찰병들을 불러 모았다.
“어비스군의 뒤를 쫓아가 통신구로 상황을 보고하도록.”
“예, 폐하!”
“어떤 루트로 움직이는지 확실히 확인해야 해. 특히 평지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숲길로 들어가는 지.”
아크는 이제 ‘매복계’를 염두하고 있었다.
레드킵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나오는 광활한 숲이 있다. ‘엘프의 숲’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병력을 숨기기에 충분할 만큼 넓은 곳이었다. 어비스군이 최단거리로 엠파이어로 달리는 게 아니라, 일부러 그 숲길 쪽으로 향한다면 충분히 의심해 볼만했다.
잠시 후, 정찰병이 통신구로 아크에게 보고를 올렸다.
“폐하! 어비스 병력들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바로 엠파이어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에 아크가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숲을 그냥 지나쳤단 말이야? 달리 숲에 들어가는 병력은 없었어?”
“…예. 그런 듯합니다.”
“그런 듯하다니?”
아크는 정찰병의 미묘한 뉘앙스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되물었다.
“……사, 사실은 다른 지점에서 전진하고 있던 동료 척후병들의 연락이 모두 끊겼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어비스군이 숲을 지나쳐 가는 것 정도였고, 다른 포인트의 척후병들의 정보는 아직…….”
보고를 들은 아크는 입맛이 썼다.
‘스파이들과 어쌔신들을 길목에 잔뜩 풀어놨군. 저렇게 작정하고 막으면 어비스를 상대로 첩보전을 이기는 건 불가능 해.’
아크는 잠시 고민했다. 최고의 매복 포인트인 숲을 내버려 두고 엠파이어로 직행하다니……. 카사르는 평지지형이 많아서 다른 곳에선 매복이 힘들 것이다. 로드는 정말로 수도 교환이 목적인 걸까?
아크는 이내 인지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알겠어, 그렇게 알고 있겠다. 자네도 암살자에게 당할 수 있으니 레드킵으로 복귀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폐하!”
정찰병은 아크와의 연락을 마치고 통신 수정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의 뒤에는 어두운 옷에 복면을 쓴 흉흉한 분위기의 암살자들이 서 있었다. 정찰병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수고했어.”
어쌔신들 사이로 보이는 금발의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미안하다.”
촤악! 로드의 말을 신호로 어쌔신 한명이 뒤로 돌아와 정찰병의 목을 쳤다.
*
“…….”
아크는 통신이 끊어진 수정구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크!”
보호트가 돌아왔다.
“추격병 3천명 준비 다 됐다.”
“수고했어, 보호트 군.”
“대화 내용은 뒤에서 들었다. 로드 폴렌티아는 정말로 엠파이어를 노리고 있군. 바로 도우러 가자고.”
“……아니.”
아크가 빙그레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속임수야.”
“…뭐라고?”
“매복계를 숨기기 위한 속임수. 그 정찰병은 벌써 놈들에게 붙잡힌 것 같아.”
“……!”
아크는 정찰병의 표정을 읽었다. 입술이 떨리고 얼굴은 창백한 것이 긴장해서 나오는 반응은 아니었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는 게 티가 났다.
아크는 확신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왜 거짓 보고를 한 것일까? 이미 어비스의 어쌔신들에게 붙잡혀, 그들이 시키는 대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들어맞았다. 아크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 작위적인 냄새가 풀풀 난다구. 로드 군.’
모든 상황이 안개가 걷힌 듯 이해가 됐다.
매복계를 쓰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긴 했다. 자칫 출성해서 로드의 뒤를 쫓았다간, 보병으로 이루어져 느린 카사르군은 어비스의 기병들에게 역으로 뒤를 잡힐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숲에서 나오는 1만 병력에게 덮쳐진다면… 레드킵뿐만 아니라 정말로 수도 엠파이어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이제 알겠어.’
머릿속에서 퍼즐이 착착 맞춰져갔다. 레드킵을 지나치고 바로 엠파이어를 노린다? 리스크가 너무 컸다. 철벽인 엠파이어를 함락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엠파이어를 함락시킬 수 있다고 해도, 이쪽이 언더하임을 차지한다면 어비스가 손해다.
그렇기에 레드킵을 그냥 지나친 것은 페이크, 위험에 빠진 아군을 도우러가는 추격군을 분쇄하기 위한 로드의 매복계. 이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고 납득이 갔다.
“…아크. 그러면 이제 어쩔거지?”
보호트가 물었다.
“로드 군이 매복을 준비하는 것 같아. 추격은 잠시 중지한다.”
“……알겠다.”
보호트는 별 불만 없이 아크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언제나 아크의 판단을 신뢰했다.
“…그건 그렇고 로드 폴렌티아가 언더하임을 두고 총공세를 펼치는 건 정말 의외로군. 언더하임에 우리 대군을 막을 방어체계는 없을 텐데.”
“방금 로드 군이 믿을만한 구석이 하나 생각났어.”
아크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언더하임의 지하에 살고 있다는 악마 ‘리리스’. 통제 불능이라고 들었는데……. 아마 언더하임이 공격당하면 그녀도 나설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겠지.”
“강한가?”
악마라는 말에 무인으로서 호기심이 생기는 보호트였다. 아크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대의 존재야. 보호트 군이 분신술을 써서 몇 명 더 있어도 못 이길걸?”
무시하는 발언에 보호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괜히 놀려봤다가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아크가 웃는 얼굴로 수습했다.
“아하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우리 카사르에서 그녀를 정면승부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거 자존심 상하는군.”
“그래도 대비책은 세워놨지.”
아크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구석에 놓아둔 검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를 열자마자 충만한 황금빛이 쏟아졌다. 눈부신 빛에 보호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가렸다.
“이, 이건……?”
“힘들게 얻은 최상의 마력무구, 악한 것에 절대적인 힘을 발하는 ‘성검’이야. 이걸 쓴다면 악마는 그 자리에서 즉사시킬 수 있어.”
아크가 검 케이스를 닫으며 웃었다. 결심이 섰다. 언더하임을 뺏는다. 뺏은 후 일어나는 혁명군 또한 페로몬 스킬로 막을 수 있으니 두렵지 않았다.
“보호트 군은 레드킵에서 대기해. 나는 3천과 이 성검을 가지고 언더하임으로 간다.”
*
“주인님.”
“……응?”
어쌔신들과 병력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아트리체가 로드에게 말을 걸었다.
“…잘 모르겠어요.”
“뭐가?”
베아트리체는 아까 있었던 상황을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붙잡은 정찰병에게 우리가 적의 수도로 향하고 있다고, 그렇게 아크에게 보고하라고 시켰잖아요.”
“그랬지.”
그녀가 고개를 들어 또랑또랑한 눈으로 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왜 ‘진실’을 아크에게 알려준 거예요?”
“좋은 질문이야. 베아 학생.”
로드가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기분 좋은 듯 헤헤 웃었다.
“이렇게 해야 아크를 속일 수 있기 때문이야.”
“……?!”
로드는 아크의 정찰병들이 올 것을 대비해서 스파이들과 암살자 200명 전원을 곳곳에 뿌려두었다.
이 200명의 암살자들은 정찰병들을 모두 찾아내 죽이고, 그중 하나를 생포해 데리고 왔다. 로드는 그 정찰병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어비스군이 매복 없이 카사르의 수도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아크 정도의 역량이라면, 정찰병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찰병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간파해 주리라.
사실상 로드가 아크의 실력을 믿고 있기에 구사할 수 있는 책략이었다.
그렇게 통신이 끊어지고 나서, 아크는 단서들을 조합해볼 것이다.
정찰병은 틀림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역시 레드킵을 지나쳐 가는 것은 무리수이다.
수도 교환을 함으로서 어비스가 크게 얻는 이득도 없다.
아크는 비로소 납득할 것이다. 레드킵을 넘어간 건 페이크, 로드는 매복을 준비하고 있다고.
지금처럼 적의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전술은 아크와 같은 타입의 책략가에겐 오히려 고통이었다. 짜증이 날것이다. 100%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찰병의 말이 거짓이고, 로드는 매복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모든 게 착착 들어맞는다. 이상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방도 합리적인 전략을 구사한 것이 된다. 아크는 더없는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믿고 싶은 것을 믿어버리는 습성이 있기에.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붙잡힌 정찰병은 자신이 아크에게 거짓말을 보고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 정보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로드는 정말로 카사르의 수도를 빼앗을 계획이었다.
“가자, 베아야.”
로드는 간만에 아이처럼 입이 찢어질 듯 웃었다.
“아크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주자고!”
“네, 주인님!”
============================ 작품 후기 ============================
여러분! 죄송스러운 공지 하나만... 내일 화요일 딱 하루만 휴재입니다.
플랫폼 동시 연재중에 연휴가 끼고, 관련 공지를 늦게 받는 바람에 업뎃 일정이 꼬였네요. 화요일 분량을 금요일에 받다니... ㅠㅠ 내일 하루만 쉬면서 비축분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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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라토텝 / 제가 생각해도 재정신은 아닌... 음.
taitan / 통수! 통수를 보자!
알테니아 / 어허허허핳!
Goest / 그렇네요 엘리전!
제시아스 / ㅋㅋㅋㅋㅋ 코멘트 감사합니다!
로리콤MK / 그러네요 ㅋㅋㅋ
풍령화객/ 허억; 그런 대단한 소설이...! 1800편수에 히로인이 아직도 증식하고 있다면 정말 엄청나네요! 주인공은 전생에 세계를 구한건가
小羽 / 살을 내주고 뼈를!
리아레스 / ㅋㅋㅋㅋ 논리에 대응하기 위한 무논리!
지리산의늑대 / ...음?! 뭘까요 이 위화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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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저, 전해드리겠습니다!
@최카츄 / 저는 캐릭터 생김새를 세게 하지 않고 독자님들의 상상에 많이 맡기는 편이라... 그래도 최카츄님을 위해 나중 본편에 다시 제대로 언급해 드려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