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211화 (211/296)

00210 난민과 노예 =========================

어비스 북부의 성. 퍼들스퀘어.

“월아! 월아아!”

쾅! 성의 방문을 열고 검은 머리의 주근깨 소녀가 들이닥쳤다. 그녀의 손에는 언더하임에서 온 공문이 들려있었다.

“큰일 났어! 월아!”

침대에는 비단결 같은 검정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정좌자세로 명상을 하는 여인이 있었다. 퍼들스퀘어의 총사령관, 비월이었다. 그녀가 눈을 뜨고 돌아보았다.

“언더하임에서 공문이 왔어! 카사르군이 여기로 오고 있대! 정말 전쟁 나는 거야? 우리 어떡하지? 어쩜 좋아?”

“……진정해, 연아.”

비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달랬다.

“전부터 말 했잖아. 곧 카사르군이 올 거라고.”

“그치마안! 막상 닥치니까 무서운 걸!”

비월은 호들갑 떠는 그녀의 친구 하연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펼쳐보았다. 서두를 읽어 내려가던 그녀는 문득 이상한 점을 인식하고는 다시 친구 쪽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런데 네가 왜 군의 공문을…….”

“뭐어?”

하연이 발끈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비월 쪽으로 바짝 숙였다.

“잊었어? 날 참모로 삼아준다고 했잖아!”

비월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천장 쪽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그땐 네가 너무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야!”

하연이 버럭 소리쳤다.

“이러는 게 어딨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연은 자신의 벅찬 소꿉친구를 어떻게든 따라다니며 든든히 떠받쳐주고 싶었다. 물론 그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비월은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격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다 하더라도, 철없는 아이의 억지일지라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

백제시절, 싸울아비가 되겠다고 고향에서 떠난 비월은 정말 나라를 대표하는 무인으로 우뚝 서게 됐지만, 마지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백제는 무너졌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하연은 낯선 타지에서 비월을 만났다. 이곳에 사는 백제난민들을 위해 타국의 무장으로서 다시 검을 쥐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월이를 지켜줄 것이다. 월이와 함께 나란히 서고 싶다. 그것이 하연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하연은 어떻게 하면 비월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고, 진작 검술에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병법을 공부했다. 그렇게 밤낮없이 공부에만 매진했다.

다만 비월은 이런 하연의 노력을 응원하는 편은 아니었다. 참모도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는 것은 똑같았다. 괜히 고향친구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 같아 슬며시 말려보았지만 하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엉엉! 배신자! 거짓말쟁이!”

비월은 곤란한 표정으로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고불고 난리 피우는 소꿉친구를 바라보았다. 눈물 콧물 다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 비월은 한숨을 쉬었다.

“……임시야.”

뚝. 하연은 바로 울음을 멈췄다.

“뭐라고?”

“임시 참모로 곁에서 공부하는 정도라면 괜찮아. 아직 권한은 줄 수 없지만…….”

“야호오! 고마워, 월아!”

하연이 눈물을 흩뿌리며 비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침대에 털썩 쓰러지게 된 비월이 고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막 운기조식을 마친 뒤여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연아.”

“응? 응?”

비월이 하연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비켜줘.”

왠지 부끄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위에 올라가 있던 하연은 왜 그러는지 깨닫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 위에 둔 손가락을 주물럭거렸다.

“헤에, 우리 월이 다 컸네?”

“하지……!”

벌컥! 문이 열리며 싸울아비 제복을 입고 검을 찬 남자가 ‘비월 장군!’하고 소리치며 들어왔다.

“해루 장군?”

“……음.”

잠시 멈칫한 그는 턱에 손을 올리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감상했다. 비월이 침대에 누워있고 그 위를 점한 하연이 특정 신체부위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장군.”

뚱딴지같은 소리에 비월이 고개를 갸웃했다.

“혼기가 다 찼음에도 도통 남자에 관심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그렇군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해루 장군! 지금 무슨 말씀을……!”

“헤헤, 맞아요.”

하연이 비월의 몸을 꽉 껴안으며 미소 지었다.

“제가 장군이랑 어떤 사이인지 아시겠죠? 알아 모시라고요!”

“……연아.”

해루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고 헛기침을 하자 그녀들도 다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연락은 들으셨지요? 내일이면 카사르군이 도착할 듯싶습니다.”

“예.”

비월이 한쪽 벽에 걸어둔 싸울아비 제복을 걸치며 방 밖으로 나갔다. 하연과 해루가 그 뒤를 따랐다.

“걱정 없습니다. 준비는 다 되어 있사옵니다.”

비월이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열려있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수백 명의 영지민들이 무술을 훈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팔과 다리가 딱딱 떨어지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반드시 새 고향을 지켜내겠사옵니다.”

비월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

카사르 진형. 야영지의 한 지휘관 천막.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퍼들스퀘어 공략의 총사령관인 릴리가 공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었다. 정렬해있는 제장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시작됐군.’

릴리군에 들어온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녀의 히스테리는 정도가 심했다. 이보다 섬기기 힘든 상관은 세상에 없으리라.

평소에는 나름대로 착하고 배려심 많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떤 조건에 의해 머릿속의 스위치가 켜져 버리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아크는 퍼들스퀘어를 공격하러가는 시늉만 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왜!”

그녀가 팔을 휘젓자 종잇조각이 된 공문이 정렬해 있는 제장들의 얼굴로 튀었다.

“왜 갑자기 정말로 퍼들스퀘어를 공략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냐구요오옷!”

“…….”

부관들이 중앙에 서있는 부장에게 눈치를 주었다. ‘이인자인 네가 어떻게든 해봐!’ 하는 눈치였다. 부하들의 시선을 못이긴 그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어비스의 대군이 우리 본토를 공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 우리 쪽에서도 텅 빈 언더하임의 공략을 서두르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군사님.”

“장난해요?”

퍽! 그녀가 던진 깃펜이 부장의 이마에 부딪쳤다.

“그걸 내가 몰라서 묻겠어요?”

‘아오, 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평민 여자가…….’

마음속으로 욕을 하며 울분을 삼키는 부장이었다.

그녀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릴리는 누가 뭐래도 카사르의 실세였으니까. 나라의 제1군사이자, 어쩌면 기존 약혼자인 기네비어를 제치고 왕후가 될 지도 모르는 인물. 벌써 많은 기사들이 기네비어에게서 벗어나 릴리의 줄에 서고 있었다. 게다가 천하의 아크조차도 릴리 앞에선 꼼짝을 못한다고 하니, 일개 기사가 어찌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문제는 아크란 말이에요!”

“……예?”

“아크는 퍼들스퀘어 공략에 저를 보냈어요. 제가 자리를 비워서 아크가 무방비 된 틈을 다른 여자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겠어요? 다른 여자가 아크의 품에 안기는 건 상상만 해도 정말……!”

그녀가 주위에 있는 손수건을 개처럼 물어뜯으며 씩씩거렸다.

‘…이대로는 무슨 말을 해도 욕만 먹는다.’

부장은 바로 지금이 승부수를 던질 때라고 생각했다.

“군사님!”

“뭐요?”

“군사님께서는 폐하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못 믿어!”

던질 때가 아니었다.

“못 믿어! 못 믿어! 절대 못 믿어요! 아크는 잠시만 한 눈을 팔아도 다른 여자들에게 그윽한 시선을 던진단 말이에요! 여자들도 틈만 나면 팔자 바꿔보려고 꼬리 흔드는 꼬락서니하곤! 뭐어? 그냥 가신 관계일 뿐이라고? 남녀 사이에 가신이 어딨어!”

그건 또 뭔 헛소립니까? 라고 부장은 말하고 싶었지만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아크가 의도적으로 저를 여기 보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구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쯤 더 예쁘고 어린 여자들을 찾아서 레드킵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겠지? 그런 꼴은 진짜 내가 못 봐! 콱 목매달고 죽어버리던가 해야지!”

이쯤 되면 좀 무서웠다. 부장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다른 제장들처럼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

“릴리 군사!”

천막이 걷히며 밖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그녀가 짜증을 멈추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슈네처 장군.”

그는 릴리군과 함께 동반 출전한 장군 슈네처였다. 이번에 카사르 진형에 새롭게 합류한 인물로서, 카르프리 출신의 영웅답게 건강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와 탄탄한 근육이 돋보였다.

복장이 조금 독특했는데, 원주민들이 입는 느낌의 짐승 털 하의만을 걸치고 뼈로 만든 장신구들을 착용하고 있었다. 정글에서 살았던 차림 그대로를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제 기분이 몹시 안 좋거든요? 전략을 논하려면 나중에 오시죠.”

릴리가 툭 내뱉듯 말했다.

“전략 때문이 아니라, 전쟁 전에 하나 지침을 정하려고……”

“아,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요!”

“그러죠. 군을 통합하지 말고 각자 맡은 군으로 성문을 공략했으면 합니다.”

슈네처가 바로 본론을 말했다.

사전 정보에 따르면 퍼들스퀘어의 성문은 동문과 서문 두 개였다. 공략 군세를 통합한 뒤에 좌우군으로 나누는 게 아닌, 처음부터 릴리군과 슈네처군으로 나누어져 각자 성문 한 개씩을 맡자는 뜻이었다.

“마음대로 해요!”

릴리가 손을 휘휘 저으며 귀찮은 듯 말했다. 릴리의 부관들은 표정이 굳어졌지만 슈네처는 킥킥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럼 그대의 전쟁에도 무운을!”

슈네처는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천막을 나갔다.

“……장군!”

그가 나가자마자 부장이 소리쳤다.

“왜 슈네처 장군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대부분의 공성병기가 슈네처군에 있고, 전력을 통합하지 않으면 우리 릴리군은 병기를 지원받을 수 없게 됩니다! 게다가 본래의 편성된 군으로 한 성문씩 맡는다는 것은 아군끼리 공을 경쟁하자는 뜻이 아닙니까? 자칫하다간 공이 전부 슈네처군 쪽으로 몰릴 수도…….”

“부장.”

그녀가 탁 소리 나게 한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는 뺨을 손바닥위에 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가까이 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리 와봐요.”

“……?”

아무리 카사르의 2인자라도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릴리의 몸에서 나오는 살기에 부장은 시키는 대로 걸어갔다.

“더 가까이.”

부장은 식은땀이 줄줄 났다. 무슨 여자애가 저런 박력을 뿜어낸단 말인가.

부장이 테이블 앞까지 다가와 차렷 자세를 하는 순간, 릴리가 한쪽 무릎을 테이블에 올리고 몸을 쭉 일으켜 그대로 부장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

“흐읍!”

부장들이 굳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한 번만 더 제 앞에서 언성을 높였다간, 목 매달아 진형의 선두 깃발에 올리겠습니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부장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은 릴리가 말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다들 꺼지세요.”

그 말에 부장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천막을 빠져나갔다. 텅 빈 지휘관 천막에 홀로 남겨진 그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아크.”

그녀의 눈에 살벌한 빛이 감돌았다.

============================ 작품 후기 ============================

알테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알테님 너무 좋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

Dd1010 / 카사르 혁명단?!

로리콤MK / 이런 상황까지 로드가 예측해서 컨트롤할 수 있다면 그냥 신이 아닐까요 ㄷㄷ;

기름맛에너지드링크 / 독선남들;

치우환 / 로드에게는 나이스 굿인 상황이네요

멸린 / 하하; 의도한건 아니지만 제왕의 독재에 반발하는 사람은 역사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박성빈 /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확실히 과학자 영웅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어서... 만약 같은 설정으로 차기작을 쓴다면 정치형 영웅 / 기술형 영웅 이렇게 또 나누고 싶네요. ㅠㅠ

EMVER /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주군을 찾는게 참 힘들고 또 중요한거 같아요 ㅎㅎ;

춘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그러네요

니알라토텝 / 아크는 본인의 유연한 스타일에 비해 기사도가 경직되어있다고 판단한거겠죠. 예를들어 아크는 후퇴전술 기만전술을 중요시 하는데, 기사도 정신에 의하면 적에게 등을 보이는건 수치니까요. 그런 부분들을 손봤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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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암 / 이런 방식은 탈이나기 마련이지요 ㅋㅋㅋ

@...(-1)... / 테란 고수분을 제가 몰라뵙고! 리마스터가 나와서 또 당분간 즐거우시겠어요.

@바닥인생 / 네. 걸리는게 많기야 하겠네요 ㅠㅠ. 기사도와 어비스는 물과 기름같은 느낌...

@벌레 / ㅋㅋㅋㅋ 기승전 가웨인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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