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212화 (212/296)

00211 난민과 노예 =========================

전쟁 하루 전, 퍼들스퀘어.

“내일이면 카사르 놈들이 온다지?”

“얼마나 오는데?”

“이제 곧 말해주겠지, 뭐.”

“흑사회가 물러갔더니 이번엔 카사르가 오는 건가… 평화로울 틈이 없구먼.”

모든 영지민들이 퍼들스퀘어 중앙에 위치한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바로 내일이면 전쟁이 시작될 것을 알기에,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들이었다. 정규군 병사들이 영지민들을 통제하며 줄을 세웠다.

“장군께서 입장하십니다!”

곧이어 비월이 부관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동양풍의 싸울아비 도복을 차려입었고, 머리는 곱게 땋아서 뒤로 묶었다. 단아한 외모와 정돈된 몸가짐에는 특유의 기품이 느껴졌다. 왠지 모를 분위기에 압도당한 사람들은 그녀가 강단에 올라오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사령관을 맡은 비월이라 하옵니다.”

그녀가 깊이 허리 숙여 영지민들에게 인사했다.

강단을 지키는 병사들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전시에는 영지민들 또한 한 사람의 병사로 취급될 뿐이고, 그 일반 병졸에게 낮은 자세로 인사하는 총사령관은 몹시 드물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볼 수 있는 군의 기본적인 문화. 대장은 병들에게 얕보이면 아니 된다. 언제나 카리스마와 권위를 가지고 병들을 통솔해야 하며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공손한 모습은 기존의 상식을 깨트리는 일이었다.

“현 상황에 대해서는 소녀가 직접 설명하겠사옵니다.”

헐레벌떡 뛰어온 임시참모 하연이 그녀에게 종이를 넘겼다. 비월은 낭랑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퍼들스퀘어를 공략하러 올 카사르군은 릴리군 2500명과, 슈네처군 2000명. 도합 4500명의 군세이다. 퍼들스퀘어는 예비병을 모두 합쳐서 2000명 남짓이고, 요새 자체도 그리 방호능력이 우수한 편은 아니었기에 결코 유리한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간단한 브리핑을 끝낸 그녀가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감사했사옵니다.”

“……?”

뜬금없는 감사인사로 시작한 비월이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은 소녀를 비롯한 낯선 이방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셨사옵니다.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얼마나 마음이 편안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으며 퍼들스퀘어에서의 생활을 회상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누려온 혜택이 타의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비월과 백제민들도 처음 퍼들스퀘어에 도착했을 때는 영지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들끼리 잘 살고 있는 곳에 초대받지 않은 외부인이 들어온 격이었으니까. 영지민들은 누리고 있던 풍족함을 버리고 다소의 불편함을 공유해야만 했다.

하지만 퍼들스퀘의 영지민들은 뭔가 달랐다. 왕명 때문에 마지못해 자리를 내어주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웃을 진심으로 환영했고 나라 잃은 백제민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그리고 자기 일처럼 나서서 백제민들의 정착을 도왔다. 비월은 정이란 것을 타지인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회상을 끝내고 눈을 떴다.

“……하지만 지금 확실히 말씀드려야 할 것은, 이 앞의 싸움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란 사실이옵니다.”

그렇게 말한 비월은 손가락을 뻗어 성문을 가리켰다.

“동문을 개방해두었사옵니다.”

“……?”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투이옵니다. 아이를 가졌거나, 노파를 모시고 있거나, 혹은 목숨을 보전하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 분께서는 지금이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주시길.”

영지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병사들 또한 혼란에 빠진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이거 정말로 전쟁 전에 하는 지휘관 연설이 맞아?’

일반적인 전쟁 연설이라 함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지휘관은 모든 성문을 굳게 닫으며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 개미새끼 한 마리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다. 결사항전의 마음으로 뼈를 묻을 각오를 다지고 싸우자.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등등. 지휘관에 따라서는 왕에 대한 충정, 혹은 적에 대한 험담 등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이야기든 한다. 그런데 비월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영지민들의 탈출을 종용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신다고 해도 소녀는 어떤 처벌도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전쟁이 무사히 끝나면 이곳으로 돌아오셔도 괜찮사옵니다.”

“…….”

“새벽까지 문을 열어 놓겠사옵니다.”

깊은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요거, 요거, 당돌하구만.”

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강당에 모여 있던 영지민들 중, 나이가 꽤 되어 보이는 노년의 남성이 킥킥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감히 장군께 무슨 말버릇이냐!”

강단에 올라서있던 부관이 발끈해서 검을 뽑으려 했다. 그때 뒤쪽의 병사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그만하라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비월 또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장간 할아버지.”

“그래, 월아.”

비월마저 사적인 호칭을 쓰고 있었다. 장군이 저렇게 나와 버리니 부관은 무안한 얼굴로 검에서 손을 땠다.

“그동안 좀 귀여워해줬더니 네가 정녕 우릴 능멸하려 드는 것이냐?”

“사실이 아니옵니다.”

“크흐흐! 사실이 아니라? 그래. 너도 여기서 꽤 지냈으니 하나 물어보마. 우리가 흑사회의 지배를 얼마나 받았는지 아느냐?”

‘흑사회’는 퍼들스퀘어를 장악하고 있던 어비스의 강력한 범죄조직이나, 현재는 벤과 혁명단의 활약으로 완전히 박멸되었다.

“…30년이라 들었사옵니다.”

“그래, 30년! 네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린 놈들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다.”

비월은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의 목소리는 확성구슬 없이도 쩌렁 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았다.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일 할 수 있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 세상이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주위에서 영지민들이 공감하는 듯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뭐라고? 이제는 카사르가 온다고? 그리고 또 뭐? 여기서 도망치라고 했느냐? 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들이란 말이냐!”

영지민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그 중에서는 격한 고함소리도 섞여 있었다.

“어떻게 되찾은 자유인데 다시 카사르에 지배당할 수는 없소! 차라리 죽고 말지!”

“여기서 평생을 살았는데, 여길 떠나면 도대체 어딜 가란 말입니까?”

“우린 우리의 터전을 지킬 거요!”

강단위의 부관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사람들…….’

마치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격한 분위기였다. 언더하임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욕설과 고함들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나으리, 여기 출신 아니죠?”

아까 옆에서 그를 말렸던 병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

“쇤네는 1년차지만 하나 깨달은 게 있지요. 퍼들스퀘어를 여타 다른 영지와 같다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칠 겁니다요.”

“……?”

목소리가 조금 줄어들자 비월이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소녀는 그저 각오를 논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만, 졸지에 여러분을 시험한 셈이 되었사옵니다.”

그녀는 영지민들에게 큰 절을 올렸다.

“사죄드리옵니다.”

다시 깊은 정적이 일었다. 파격을 넘어서 충격이었다. 주위에서 부관들이 말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비월은 끝내 절을 모두 마치고 천천히 일어섰다.

“……소녀는 고향을 빼앗겼사옵니다.”

그녀가 무겁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소녀의 원수는 죽었기에 분노 할 대상도 없고, 따르는 주군도 죽었으니 충의를 바칠 대상도 없사옵니다. 고향땅 또한 백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나라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난세인 것이겠지요. 허무. 그것이 소녀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전부였사옵니다.”

“…….”

“하지만 이곳에서 소녀는 다시 일어설 힘을 되찾게 되었사옵니다. 복수나 충의와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옵니다. 소녀는 그저 지금 이 일상을 지켜내고 싶습니다. ……너무나 사소한 것들. 이웃집 아이들의 물장난, 대장간 할아버지의 잔소리, 목장 아주머니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이.”

비월은 생각나는 일상의 풍경을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 했다. 중간 중간마다 영지민들이 환하게 웃고 떠들며 공감을 표시했다. ‘연이가 태워버린 냄비’가 나올 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연이 볼을 부풀렸고, ‘아내를 보러가는 화가 할아버지의 저녁 산책.’이 나올 때에는 잠시 좌중이 조용해지며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곧 태어날 검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의 아이들.”

비월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 시선은 부른 배를 소중히 쓰다듬는 산모와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백제민 병사를 향해 있었다. ‘아아!’ 열렬한 외침이 쏟아졌다.

“우리는 다른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아픔들을 서로 보듬으며 지내왔사옵니다. 하오나, 영지민 여러분들까지 우리 백제민들과 똑같은 아픔을 겪을 필요는 없사옵니다.”

스릉! 그녀가 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을 머금은 검이 밤하늘에 드리워졌다.

“은혜를 갚고 싶사옵니다. 소녀는 목숨을 바쳐 이 터전을 지켜낼 것이라, 하늘에 맹세하옵니다.”

거대한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오오오오오오!”

“마음껏 부려먹으라고! 비월!”

“캬캬캬캬!”

영지민 남자들은 흥에 겨워 웃통을 벗어 뱀 문신을 드러냈다. 한 때는 속박과 노예의 상징이었으나, 흑사회가 완전히 박멸된 후 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해낸 자유의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더불어, 이곳은 우리 백제민들의 소중한 두 번째 고향이 되었습니다. 두 번 다시 고향을 잃을 수는 없사옵니다.”

이번엔 백제민들과 백제출신 병사들이 소리 질렀고, 곧이어 이곳에 있는 모두가 함성의 바다를 만들었다. 30년의 노예 생활, 혹은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멸국의 순간. 그 깊은 한이 뜨거워진 가슴속 열기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그 열기를 목구멍을 통해 표출해냈다. 서로 얼싸안는 자들도 있었고 감격에 겨워 끅끅거리면서도 소리를 지르는 자들도 있었다.

‘……대단하다.’

부관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카리스마와 위엄으로 만들어 낸 사기가 아니었다. 이런 류의 지휘관도 있을 수 있구나.

“…반드시, 이 일상을 지키겠습니다.”

비월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차올랐다.

============================ 작품 후기 ============================

카하드라 / 굴리는거 너무 좋... 아, 아닙니다.

멸린 / 네. 겉으로 보기엔 완벽에 가까운 병력의 구성이지만 그 병력을 쓰고 지휘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기에...

T스톤 / 능력자 바람둥이는 박멸해야 마땅합...

방명록 / 릴리는 기본적으로 아크의 말에 철저히 복종합니다. 부하들에게 화풀이 하긴 했지만 결국 아크의 뜻대로 퍼들스퀘어로 간 걸 보면 알 수 있죠. 이전 퍼들스퀘어 전투에서도 아크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서 아크가 감동먹은 씬도 있구요. 다만 릴리는 한가지... 개인 감정이 일그러져 있는거죠.

알테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딸라의 힘!

지리산의늑대 / 주인공 혐오를 멈춰주세요 ;ㅅ; 엉엉

책읽는고래 / 문제많은 집안...

ArSeN_Ru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쪽 꽉찬 돌직구로군요.

로리콤MK / 완벽해 보이는 카사르 군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지요. 전개상 아크와 갈등을 빚는 캐릭터들만 연속으로 나열해서 보여드릴 수 밖에 없어서 그렇게 느끼시는것 같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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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라토텝 / 아크도 그렇게 나누었어요. 말 잘듣는 신기사들은 중용하고, 말 안듣는 구기사들을 가웨인군에 몰아 넣었지요. 그래서 감독관을 보내는 등 그쪽에 간섭이 심한거구요. 그리고 급등용한 이를 더 아껴주는건 조금 문제같긴 하네요. 능력주의자라고 해도 기존 인물들이 불만을 품을 수도 있으니...

@...(-1)... / ㅠㅠㅠ 성격은 이상하지만 다들 유능하긴 유능하다구욧!

@푸아암 / ㅋㅋㅋㅋ 사실 릴리는 부대 운영은 잘 하고 있답니다. 인재긴 하거든요. 다만 개인적인 감정이 너무 커져서 슬슬 다른사람들에게 까지 피해를 주기 시작한다는게 문제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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