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3 난민과 노예 =========================
날이 어두워지며 퍼들스퀘어의 첫째 날 공성이 중지되었다. 릴리군은 초전은 탐색전을 펼치는 정도에서 끝냈지만 슈네처군은 성문의 내구도를 크게 떨어뜨리고 특정 성벽을 함몰시키는 등 여러 성과를 냈다. 다만 동시에 주력 영웅 ‘아켈크’와 정예병들인 핸들러들을 다수 잃는 등 그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퍼들스퀘어, 만만치 않은 성이다.”
공성이 늦게 끝났기에 전략 회의는 새벽에 치러졌다. 슈네처가 지휘관 천막으로 제장들을 불러 모아 말하고 있었다.
“까다로운 요새는 아니지만 총사령관 비월을 중심으로 모든 병사들이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있다. 특히 도시 예비병들. 남녀 할 것 없이 무위가 대단하더군.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자들임에 틀림없다.”
부관들도 슈네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의 말씀대로 입니다. 카사르의 성을 점령할 때에도 이정도로 고전하진 않았는데…….”
“이럴 때일수록 확! 승부를 걸어봐야 하는 거 아잉교? 내일 공성병기 다 끌고 가서 확 밀어 뿝시다, 장군!”
“안될 말이오! 릴리 군사처럼 상황을 지켜보면서 장기전을 염두 해야…….”
제장들이 의견들을 주고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슈네처 본인도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나 곧 그의 고민은 지휘관 천막으로 뛰어 들어온 한 전령에 의해서 중단되었다.
“자, 장군!”
전령의 낯빛이 어두웠다. 필시 좋은 소식은 아니리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설마 야습인가?”
전령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에 앉은 한 부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로 야습이라고? 퍼들스퀘어는 성문이 두 개 뿐이고, 두 개의 성문 모두 우리 군이 빈틈없이 포위하고 있거늘! 놈들이 성문을 열고 나오기라도 한 것이냐?”
“서, 성문 쪽이 아닙니다! 후방에서 적의 공격입니다!”
“……후방이라고!”
슈네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 쪽이냐? 어디까지 뚫렸지?”
“공성병기 쪽 입니다! 어비스 놈들이 공성병기에 불을 지르고 있……!”
전령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입을 다물었다.
“자네, 왜 그러나?”
모두의 시선이 전령에게 집중되어 있는 그 순간, 전령의 입술에서 핏물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크아악!”
“허억!”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피가 난자하기 시작했다. 제장들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빌어먹을!”
슈네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팔에 박힌 단검을 보았다. 목을 노리는 공격이었지만 순간적인 대처로 팔을 들어 막아낸 것이다. 그는 단숨에 두 손으로 상대의 팔을 붙잡고 허리를 틀어 매쳤다. 콰직! 테이블을 박살내며 쓰러진 암살자의 목에 자신의 팔에 박힌 단검을 박아 넣었다.
“다들 무사한가?”
절반 정도가 죽거나 중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것 참! 지휘관 천막에 암습이라니!’
야영지 중앙에 있는 이곳까지 당했다는 것은 야영지 전 지역에 적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슈네처의 머릿속에는 부하들의 생사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무기를 들고 나를 따르라!”
슈네처는 제장들과 함께 천막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방향이 정해졌다. 야영지 멀리서 불길이 보였던 것이다.
“……아!”
슈네처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자 부관들이 놀라서 다가왔다.
“……아, 아아! 내 역작이! 내 꿈이!”
“장군! 팔의 상처가 큽니다! 지혈부터 하셔야…….”
“시끄럽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도 난리였다. 병사들의 천막에도 불이 붙어있었고 고함, 비명, 창칼 부딪치는 쇳소리가 진동했다.
“시간을 끄는 것뿐이니 무시해라! 이쪽으로!”
슈네처는 그런 광경에 신경을 두지 않고 전속력으로 지름길을 내달렸다. 떠오르는 불길을 보니 불을 붙인 건 최근인 것 같았다. 서두르면 몇 대 정도는 회수할 수 있으리라. 슈네처와 제장들은 순식간에 지름길을 가로질러 공성병기들을 세워둔 공터로 나왔다.
“어서 오시지요.”
그들의 걸음이 멈췄다. 불타는 공성병기들 앞을 홀로 가로막은 자가 있었다. 펄럭이는 검은 옷과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당장 거기서 비켜서라, 암살자!”
슈네처가 대도를 세워들며 소리쳤다. 비월은 상처 입은 그의 팔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암살까지는 제 뜻이 아니었사옵니다만, 상관없겠지요.”
스르릉. 검집에서 뽑히던 검이 절반 정도에서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냐!”
“본래 계획은 여기로 유도된 여러분들을 소녀가 전원 쓰러뜨리는 것이었습니다만, 암살단 분들께서 위험부담이 크다며 암습 쪽으로 방향을 바꾸셨지요.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는 일이옵니다만.”
“이 건방진!”
“네년 혼자서 우릴 전부 상대하겠다는 거냐?”
제장들이 무기를 세워들었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소녀는 동방의 싸울아비, 비월이라 하옵니다.”
“……비, 비월이라면!”
검이 완전히 발검 되어 뽑히는 순간, 구현의 원리를 알 수 없는 검격이 두 명의 장수를 베고 지나갔다. 비월이 즉시 검집을 허리에 붙이고 경공을 사용해 돌진해왔다.
“어림없다!”
붕! 붕! 한 장수가 거대한 장창을 휘두르며 슈네처의 앞을 가로 막았다. 거리계산을 마친 그가 비월이 달려드는 직선방향으로 예리한 창격을 내질렀다.
‘뚫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비월의 몸은 이미 창의 아래로 흘러 지나가고 있었다. 부관이 재빨리 창을 회수하려 했지만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창대가 강한 힘으로 쑥 올라갔다.
“끄윽!”
손에 어마어마한 반동이 전달되었다. 그가 멈칫한 사이 푸른 검격이 장수의 몸을 가로로 두동강 냈다. 순식간이었다.
“으오오오옷!”
함성을 내지른 한 장수의 피부가 검게 변했다. 지지직! 옷소매가 찢어지며 팔 전체가 전갈의 집게처럼 거대하게 변해 비월에게 휘둘러졌다. 이능 중에서도 희귀한 변신 계열의 고유능력이었다. 후우우웅! 집게를 휘두를 때 마다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월은 작은 몸으로 요리조리 잘 피해냈고, 격분한 그가 팔 뿐만 아니라 신체 전체를 전갈로 변신시켜 전방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쿠쿠쿠쿠쿵! 거대한 전갈의 몸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면을 헤집었다.
‘지금이다!’
옆으로 몸을 던져 회피한 비월은 이제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녀가 다음 회피 동작을 취하는 것보다 그의 집게가 휘둘러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꾸우우웅!
괴수의 집게가 피하지 못한 그녀에게 내리 꽂히며 흙먼지가 솟구쳤다. 그는 100% 승리를 확신하였으나, 잠시 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럴 수가!’
가녀려 보이는 여인이 자기 몸 보다 더 큰 집게를 한 손으로 받아낸 채로 서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건 마력으로 인한 신체강화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동방의 기술이옵니다.”
비월의 검이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딸칵.
전갈의 몸 곳곳에서 푸른 검상 같은 것이 일어났다. 투콰아악! 이내 전갈의 신체가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쿵! 전갈의 집게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슈네처의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힘들게 설득해 데려온 카르프리의 부관들이었다. 청색의 검격이 어둠속을 가를 때마다 부관들이 픽픽 쓰러져가고 있었다. 그 뒤로 병기가 불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럴 수는 없었다.
‘……내가! 내가 뭣 때문에 카사르에 붙었는데!’
왕을 배신했다. 조국을 멸망시킨 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대다수의 카르프리 장수들이 아크에게 불복을 선언하며 죽음을 택했지만 자신만은 살아남은 자들을 설득했고 수많은 모욕을 감내하며 타국의 체제 내에서 노력했다. 그렇게 실력을 인정받아 당당히 피점령국 출신 무장이 카사르군 내에서 1개 군세를 맡게 된 것이다.
배신자라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해도 상관없다. 카르프리의 땅과 이곳의 영지민들은 여전히 대륙에 남아있고, 카사르의 내부에서 이들의 입장과 이윤을 대변할 자가 필요했다.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내야만 했으니까.
무엇보다 슈네처는 판단했다. 아크는 능히 이 대륙을 제패할 자. 결국 모든 왕실은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고 자신이 그 큰 계획의 주춧돌이 될 수만 있다면 카사르의 비호아래에서 카프르리의 영광은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저 여자 한명을 막지 못해 모든 염원이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슈네처가 격한 고함을 내지르며 자신의 대도를 들고 달려 나갔다. 부관들을 상대하느라 검을 맞대고 있는 비월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비월이 눈동자만 움직여 뒤로 달려오는 슈네처를 보았다.
“……!”
평온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시선에 직면하는 순간, 슈네처는 정신적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이 상황을 ‘위기’라고도 여기지 않고 있었다. 달려드는 파리 한 마리를 보는 눈빛. 슈네처는 격노하여 대도를 휘둘렀다.
비월은 한 손으로 적의 검을 받아낸 채, 나머지 한손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을 붙잡고 움직였다.
따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이 휘둘러지는 방향이 틀어져 허공을 갈랐다. 양 손으로 잡고 전력으로 휘두른 대도를 검집으로 치는 것만으로 흘려낸 것이다.
“……이게 무슨!”
검을 흘려낸 그녀가 손에서 검집을 놓았다. 그리곤 두 손으로 칼자루를 붙잡은 채 몸을 빙글 돌렸다. 멀리서부터 청색 검격이 밤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편히 쉬시기를.”
이어지는 눈을 뒤덮은 청색 검격이 슈네처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수고하셨습니다, 장군.”
어쌔신이 한 부관의 등 뒤에 단검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주위에는 비월이 처치하지 못한 다른 장수들까지 모두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전멸이었다.
“저희 단원들이 적병의 발목을 붙들고 있으니 이 틈에 돌아가시지요.”
“……예, 그럼.”
고개 숙여 고인의 예를 표한 그녀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암살단들의 뒤를 따랐다.
최고의 전공이었다. 단 하룻밤 만에 카사르군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군세의 지휘부가 이렇게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내일 예비군 입니다 ㅠㅠ 전역하고 나서도 일년에 5일을 투자해야 한다니... 자영업 하시는 분들은 매출에 직접적인 타격이겠네요. 아 물론 저는 연재 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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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니아 / 핡핡!
에프론 / 음?;
최카츄 / 으아아아 ㅠㅠㅠ 저도 보여주세요! 제발!
왜이리들다재밌지 / 감사합니다!
로리콤MK / 짱짱걸!
니알라토텝 / B입니다. 다만 저렇게 강한건 고유능력으로 인한 보정효과를 받고 있거든요
책읽는고래 / 흐음 가웨인이 자유혁명단으로 간다라... 이쪽도 의외로 재미있겠네요!
...(-1)... / 다음화 부터 킹비월이 다스리는 어비스가 연재됩니다
벌레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프게했어 / 오오옷!
지리산의늑대 /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