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5 두 개의 신념 =========================
땅굴을 놓고 두 진형 간의 심리전이 펼쳐졌다.
처음부터 땅굴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던 릴리는 직접 야영지로 가서 탐색을 지휘했다. 땅굴이 있다는 가정 하에 병사들로 하여금 꼼꼼히 지면을 살피게 하니 과연 교묘하게 흙으로 뒤덮여 있는 지점을 발견했다. 릴리는 땅굴 주위에 병력을 물려놓고 그 정체를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야습을 하려 땅굴에서 나오는 비월군을 남김없이 몰살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실, 비월은 하연의 조언을 받아들여 땅굴을 포기했었다. 늦은 새벽까지 야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적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릴리군의 부장은 한숨을 쉬며 지휘관 천막으로 돌아와 릴리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하아암, 유인책인 걸 눈치 챘나 보네요. 어쩔 수 없죠.”
릴리는 자고 있었다. 처음부터 땅굴에 별 기대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니 밤을 새며 긴장하고 있었던 자신만 멍청해진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럴 줄 알고 계셨습니까?”
“저들이 바보라면 왔겠죠. 바보일 경우의 수를 기대해 봤지만 결국 바보는 아닌가 봐요.”
“……끙.”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차선책을 쓰도록 해요.”
릴리는 병력들을 땅굴로 투입시켰다.
그녀의 계획은 땅굴을 장악한 다음, 지면을 받치는 지지대를 설치하고 땅굴의 한 부분만 집중으로 깊고 넓게 파는 것이었다. 그렇게 충분이 땅굴이 커졌을 때, 불을 붙여 지지대를 파괴시키면 지면은 내려앉게 되고, 지면위의 성벽 또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상대의 땅굴을 이용해 상대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계책이었다.
그러나 이 차선책도 여의치 못했다. 카사르병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월군이 중간지점부터 땅굴을 막아버린 뒤였다. 열의에 차서 직접 땅굴로 내려갔던 부장이 이번에도 빈 손으로 터덜터덜 릴리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상대가 신중하네요. 책략 몇 개로 날로 먹는 건 힘들겠어요.”
“이 교활한 것들! 날이 밝는 대로 공성전에서 승부를 봅시다!”
“오늘도 쉬엄쉬엄할 건데요?”
“군사님!”
결국 그녀의 지침대로 삼일 째 공성전 또한 양측 별 피해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넷째 날 아침. 릴리는 잠을 잘 잔 덕분인지 윤기가 도는 피부로 막사 밖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반면 부장은 얼굴이 퀭한 것이 전체적으로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가 의자를 대령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부장.”
“간만에 전황을 보러 오셨군요.”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릴리는 상관치 않는 듯 의자에 앉아 부장이 건넨 토마토 주스를 받았다.
“하암, 여자의 몸으로 전장에 있는 건 여러모로 힘들답니다. 일은 일대로, 외모는 외모대로 신경 써야 하니까요.”
‘이번 공성은 후자 쪽에 더 신경 쓰시는 것 같아 문제라는 겁니다!’
“아, 이거 맛있네요.”
쪼르륵. 빨대로 토마토 주스를 맛본 그녀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그거 고맙군요.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부장은 비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언제나 그렇듯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어떤 물음이라도 진솔하게 답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그토록 매력적이었을 땅굴 작전을 한 번 쓰고 과감히 포기한 인물입니다. 인내력과 자제력이 뛰어나니 수성전에 잘 어울리는 장군. 정도로 평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그 땅굴에 꽂혀있어요? 그만 미련 접으라니까.”
부장이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적병의 사기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거야 매 전투마다 느끼고 있습니다.”
퍼들스퀘어를 공략하는 입장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은 역시 일반 영지민들의 전력이었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무예에 능했으며, 영지와 비월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며칠 기다리는 것 정도로는 그들의 사기가 내려가질 않았다. 오히려 영지를 내 손으로 지켜내고 있다는 자신감과 전투를 통한 전우들 간의 유대로 인해, 날이 갈수록 돈독함 마저 더해지고 있었다.
“그 기세의 중심에는 비월이 있어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벽의 어느 한 곳이 위험해지면 여지없이 그녀가 나타났고, 병들의 사기가 급격히 올라 위기에서 벗어나는 그림이 많이 나왔습니다.”
금세 토마토 주스 한 잔을 모두 해치운 릴리가 빈 잔을 부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전 그녀가 마음에 안 들어요.”
“…예?”
“전장에 나와 사람 죽이는 건 똑같은데, 혼자서 진흙탕의 진주인 마냥 고고한 척 하는 게 눈꼴시다고나 할까요?”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여편네들이 모여 하는 뒷담화 같은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황당해하는 부장과는 달리 릴리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주 전략적인 행동이에요. 퍼들스퀘어의 병사들은 비월에게 상관 이상의 무언가를 대입해서 보고 있어요. 전장의 여신, 선의 관철자, 영지의 수호자 같은. 젊고 아름답고 강한 여성은 병사들에게 일종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법이죠.”
“……으음, 그것이 비월이 일으키는 사기의 원천이라는 말입니까? 이해가 잘 안됩니다.”
릴리가 ‘훗’하고 웃었다.
“부장. 혹시 레벤의 사회학 서적 읽어본 적 있어요?”
“저는 기사라서…….”
“그럼 오늘 토마토 주스가 맛있었으니, 특별히 쉽게 설명해 줄게요.”
그녀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정말로 토마토 주스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지는 만들어 지는 거예요. ‘황제’라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죠?”
“……으음, 뭐랄까 범접할 수 없는 대단히 위대한 인물 정도로.”
“그래요. 대륙의 역사에 딱 한 번 존재했던 황제. 황궁에는 황제만 다니는 전용 길이 있고 그 길을 일반인이 밟으면 처형이었어요.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면 처형이고, 황제의 그림을 손상하면 처형이었죠. 까놓고 말해 그 황제도 똑같이 먹고 싸고 자는 인간인데도 그런 위엄을 세운 거예요.”
“……그거야 요즘도 가끔 그러니까요.”
“그럼 예를 하나 들어, 부모를 병환으로 잃은 남자가 있다고 해봐요.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는데, 그 대단한 황제님이 행렬을 멈추고 다가와서 친히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해주는 거예요.”
부장이 그 장면을 상상하는 듯 ‘오호’하고 작게 감탄을 흘렸다. 릴리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 남자는 아주 몸 둘 바를 모르겠죠? 감격에 목이 메이고 가슴이 감격으로 터질 것만 같겠죠? 가문의 영광이고, 일평생 자랑거리가 생기는 거예요. 그 남자는 황제가 위기에 빠지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지도 몰라요. 고작 어깨를 토닥여줬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요. 그런데 황제가 아니라, 지나가던 거렁뱅이 부장이 위로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왜 제가 예시의 희생자가 되는 겁니…….”
“허름한 차림을 한 비호감 아저씨가 위로해봐야 별로 좋은 말 못 듣겠죠. 고맙다 한마디 정도 돌아올 수는 있겠네요. 자, 그럼 황제와 부장. 둘 다 똑같은 인간인데 왜 이렇게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다른 걸까요?”
“…….”
부장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꽤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조금 군사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적장 비월이 가지는 그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관들이 수집해온 정보에 따르면 비월은 이 영지에서 영지민들과 함께 지냈다고 해요. 그녀의 인망과 겸손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런 그녀가 왕명에 의해 이 영지를 지키는 총사령관이 된 거예요.”
릴리가 오페라의 가수처럼 두 팔을 펼쳤다.
“그녀는 영지민들에게 함께 터전을 지켜내자고 호소했겠죠. 아아, 누가 봐도 좋은 그림이죠? 긍정적이고, 건강하고, 플러스에너지로 가득한 이미지…….”
잠시 말을 멈추던 릴리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 더럽혀지고 싶어졌어요.”
“예?”
“죽고 죽이는 전쟁에 그런 선한 이미지는 가당찮아요. 애초에 퍼들스퀘어의 영지민들과 병사들은 그녀에 대해 환상을 가진 거예요. 내가 비월의 순수성을 해쳤을 때…….”
릴리의 입가가 악귀처럼 찢어졌다.
“그녀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말 궁금한데요.”
릴리가 계책을 꾸미고 있는 한편, 비월과 지휘부 간부들은 성벽위에 올라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카사르군은 성 앞에 집결했지만 공격해 오지는 않고 있었다. 대치상황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지평선에서 새까맣게 밀려오는 인파가 보였다.
“우와아! 저 몰려오는 사람들은 다 뭐야? 설마 저게 다 카사르군인거야?”
눈이 휘둥그레진 하연의 물음에 비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거야.”
“……잠깐.”
“왜 그러시옵니까? 해루 장군.”
부장 해루의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일어났다.
“……카사르군이 아닙니다. 저들은 민간인들입니다!”
“민간인이라구요?”
그 인파의 정체는 퍼들스퀘어 영지 인근에 살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피난민 무리였다. 주위의 병사들이 검을 세우고 그들을 윽박지르며 계속 걷게 했다. 비월의 안색이 굳어졌다.
“죄 없는 민간인들을 끌어들이다니…….”
“월아, 이쪽으로 오고 있어. 릴리는 어떻게 할 셈이지? 설마 저들에게 무기를 주고 우릴 공격하게 하려는 걸까?”
피난민 무리는 곧 카사르군 앞에 정렬해 세워졌다.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내자 한 기사가 나섰다.
“뭐 하냐? 네놈들. 살고 싶지 않은 건가?”
피난민들이 두려운 눈으로 기사들을 보았다.
“뛰어라. 뛰어서 비월에게 목숨을 구걸해보아라.”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상황 파악을 못하는군.”
기사가 가까운 곳에 있던 피난민 한 명을 베었다. 예고 없이 사람이 죽자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쏟아졌다.
“전부 베어버려라!”
병사들이 피난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피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퍼들스퀘어로 내달렸다. 저항하지 못하는 자들을 상대로 한 일방적인 학살은 언제나 끔찍한 비극이었다.
“저 씹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들이!”
해루가 격분하여 소리쳤다. 하연도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
“……장군!”
그때 다른 수비 포인트에 있던 부관들이 허겁지겁 비월에게 몰려왔다.
“장군! 이건 필시 카사르 군사의 계략입니다! 절대 성문을 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식량 상황도 좋지 못합니다! 저들을 받아줬다간 장기전이 불가능해집니다!”
“틀림없이 카사르군의 첩자도 평민으로 위장하여 숨어 있을 겁니다! 부디 결단을!”
“…….”
비월은 고개를 되돌려 성으로 달려오고 있는 피난민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흐으응.”
이 모습을 일등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릴리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제 생각엔 아마 성문을 열어주진 않을 겁니다.”
옆에 서있는 부장이 말했다.
“열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예?”
“우리의 목적은 비월이라는 새하얀 상징 자체를 더럽히는 것.”
그녀가 소녀처럼 신이 난 표정으로 부장을 돌아보았다.
“비월에 대한 환상이 깨져나가겠죠. 그녀도 결국 승리를 위해 희생을 방관하는 흔해빠진 사람 중 하나였다고. 초월적인 존재에서 일반인으로 격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 노림수였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성문을 열어주면 퍼들스퀘어 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것이니까요.”
“부장. 죄 없는 민간인이 죽어나가는 모습은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부장처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비월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자들도 당연히 생기겠죠. 하나로 똘똘 뭉친 조직 안에 작은 갈등의 씨앗을 심어 넣으면, 나중엔 커다란 균열로 발전해 쏠쏠하게 수확할 수 있을 거랍니다.”
성에 도착한 피난민들이 성문에 달라붙어 성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제발 들여보내 주십시오!”
“비월 장군님!”
“어린 아이가 있어요! 이 아이만큼은!”
성문아래는 피난민들의 간곡한 외침으로 가득했다. 그 광경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릴리가 미소 지으며 수신호를 보냈다.
“비월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네요. 조금 더 몰아세워 볼까요?”
카사르군 궁병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이 성문 쪽에 몰려있는 영지민들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허, 허억!”
화살이 머리 위로 떨어지자 간곡한 외침이 아우성과 절규로 변했다. 피난민들은 성문을 두들기며 악을 질러댔다. ‘살려줘.’ ‘구해줘.’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세상에.’
릴리의 부장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 사람의 기사로서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감히 릴리에게 멈추자고는 말하지 못했다.
“흥미롭지 않아요?”
릴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화살을 쏜 쪽은 우리인데 벌써부터 비월을 욕하고 저주하고 있네요. 비월처럼 본인 스스로를 선하다고 속이면서 살아온 자들은요, 저런 농축된 증오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속에 흉터가 깊게 남아요. 그리고 조금씩 죄책감으로 마음이 갉아 먹히는…….”
“군사님.”
“…왜요?”
“서, 성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릴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제정신이야?”
============================ 작품 후기 ============================
바깥 날씨는 34도. 이 땡볕에 간부가 목진지 점령을 위해 산을 타자고 했을때 강렬한 살인 충동을 느꼈습니다. 다만 제가 살인죄로 강제 완결 공지를 조아라에 올리기 전에 상급부대 지침으로 외부활동 지양 명령이 내려왔네요. 음,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마냥 베스트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심하면 안되겠지만 적절한 농땡이는 조직의 윤활류가 되리라! (이미 더위로 정신이 나간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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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니아 / 끼루기룩리굴끼루긲룩끼룩
dls4920 / ㅠㅠ 코멘트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연재의 원동력이니까요. 건강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님도 더운 날씨에 건강 잊지 마시길!
조이너 / 트읍읍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을때 한국에 토네이도가 몰아쳤어야 했..
왜이리들다재밌지 / 그 때를 위해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니알라토텝 / 으음, 그림이 머릿속으로 상상 되는데요? 주인님은 내 꺼에요! 암살자는 호위에 부적합하오! 애교 vs 논리
도레미파솔솔 / 사실 저도 그렇습니읍읍
아프게했어 / 덕분에 꿀좀 빨았죠!
...(-1)... / 비월 핫흥!
이루미엘 / 이분 예언... 정말정말정말 쩅쟹했어요 ㅠㅠ
벌레 / 카사르군이 성문 두개를 모두 틀어막은 상황이라 야습이 그리 효과가 없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