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7 두 개의 신념 =========================
퍼들스퀘어 내부의 피난민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피난민들이 영지민보다 더 많을 지경이었으나, 비월은 식량을 나누어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릴리군이 공성을 해오지 않는 때에는 사령관인 그녀가 손수 배식을 하기까지 하니, 피난민들은 그녀를 마치 천사처럼 우러러보며 찬양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비월의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있다면, 퍼들스퀘어의 영지민들이었다.
영지민들은 백제민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피난민들에게도 싫은 소리 한 마디 없이 기꺼이 많은 것들을 양보했다. 자신들의 집을 피난처로 쓰게 했을 뿐만 아니라, 창고의 식량을 풀어 그들을 먹이는 데 보태었다.
“어려울 때 같이 먹고 살아야지. 전쟁 통인데 어쩌겠수.”
한 피난민이 굶주림 때문에 몰래 영지민 집에 들어갔다가, 집 안에 홀로 있던 노파가 오히려 따뜻한 식사를 대접했고 도둑도 이에 감격하여 참회했다는 미담은 퍼들스퀘어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비월과 영지민들의 노력은 피난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피난민들은 스스로 엄격한 질서를 세웠고, 같은 피난민들을 감시했으며, 일손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저쪽이 따뜻하게 맞아주니 이쪽도 최소한 민폐는 끼치지 않아야지 않겠다는 관념이 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성벽 밖은 적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내부는 더없이 따뜻했고 온정이 넘쳤다.
반면 비월군 내부의 차가운 시선은 여전했다. 피난민들의 여론이 좋다고 한들 전쟁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몇몇 현실적인 성향의 부관들은 비월 대신 해루를 장군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며 은연중에 주장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중립이었던 해루도 어느 순간 적극적으로 비월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지금 영지에서 무슨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게! 선의가 선의로 되돌아오는 경우는 이 썩어빠진 세상에선 무척 드문 경우라네. 은혜를 베풀어줬다가 뒤통수 맞는 이야기들이 어디 한 둘인가? 하지만 지금 퍼들스퀘어는 어떤가? 비월 장군은 우리와는 그릇이 달라. 필시 장군께서도 생각이 있으신 걸세.”
비월의 편을 들어줌으로서 해루 또한 입지가 줄어들었지만, 그녀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비월 또한 고독한 싸움에서 작은 안위를 찾았다.
낮에도 어김없이 피난민들이 들어왔다. 이제는 다른 피난민들이 병사들 대신 몰려와 그들에게 잘 자리와 이곳의 규칙들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나름대로 퍼들스퀘어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저녁 배식을 앞둔 어느 날, 지휘부에서는 피난민들을 영지 중앙의 대강당으로 불러 모았다. 그곳에서 동시 배식이 시작됐고, 피난민들은 언제나처럼 질서정련하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와, 이것 봐! 고깃국이잖아!”
피난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향에서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접하기 힘든 음식을 피난 중에 먹게 된 것이다. 감격한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허겁지겁 단백질을 섭취했다. 강당은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걸까?”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주는 거겠지. 먹어, 먹어.”
사람들이 음식을 거의 다 먹어갈 시점에, 병사들과 제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비월도 있었다.
“비월 장군이다!”
그녀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열렬한 환호가 일어났다. 비월은 확성구슬을 받아들고 앞으로 나왔다. 좀처럼 환호성이 끊이질 않자 그녀가 먼저 고개를 깊게 숙였다.
“퍼들스퀘어의 지휘관, 비월이라 하옵니다.”
그제야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멎어들었다. 비월은 잠시 망설이듯 주위를 돌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만, 반드시 여러분께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하하! 뭐든 말하세요!”
“그럼, 그럼. 누구 말씀이신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방금 드신 음식이 저희가 가진 마지막 식량이었습니다.”
“뭐, 뭐라고?”
말소리가 한 순간에 뚝 끊겼다.
그리곤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음식을 떠먹기 바쁘던 영지민들도 멍한 눈으로 비월을 바라보았다. 이게 마지막이라니?
“저희 비월군은 더 이상의 수성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성을 버리기로 결정했사옵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성문을 열고 총공세에 들어갈 것이옵니다.”
“…….”
이야기를 듣는 피난민들의 얼굴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당황함, 놀람,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
성이 아직 멀쩡한데도, 스스로 성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와 전면전을 벌인다고 한다. 그 까닭이 자신들을 먹이느라 식량을 소모했기 때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지만, 너무 빨랐다.
“소녀와 병사들이 벌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사옵니다.”
피난민들이 혼란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비월은 차분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소녀는 서문을 열고 모든 병력을 동원해 힘껏 적에게 부딪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동문의 카사르군 병력이 서문 쪽으로 옮겨올 터이니, 피난민 여러분은 그 틈을 타서 동문으로 빠져나가주시옵소서.”
“…….”
강당은 깊은 적막에 빠졌다.
“이보시오! 비월 장군!”
누구하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이때, 한 피난민 노인이 시뻘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마지막 식량이었다고 하셨소? 그쪽 사정도 나빴으면서 대체 왜 우리들을 받아줬단 말이오!”
“그것이 의로운 일이었기 때문이옵니다.”
비월은 망설임이 없이 대답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있사옵니다. 눈앞의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살려야 할 것이고, 먹일 수 있다면 먹여야 할 것이옵니다. 사람을 구하는 일에 무슨 계산이 필요하겠습니까? 힘들지만 여력이 있다면 마땅히 서로 돕는 것. 그것이 인의이옵니다.”
“지금 인의라고 하셨습니까!”
이번엔 소매가 기다란 옷을 걸친 중년 여성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차림이 부유해 보이는 것이 어딘가의 상인 같았다.
“비월 장군은 인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를 도왔다고 했지요. 그런데 장군께서 싸우는 동안 우리는 다른 문으로 빠져나가라니요? 장군께서는 우리더러 인의를 져버리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피난민들이 화를 내는 이유. 자신들 때문에 그쪽도 죽을 위기에 빠졌으면서, 왜 원망하지 않는가? 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단 말인가? 차라리 욕을 시원하게 한 바가지 먹는다면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이제 그대들도 밥값을 하라며 사지로 몰아넣게 한다면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납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 딸 뻘 정도 되어 보이는 저 여장군은 덤덤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번에도 자신이 희생할 테니 몸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슴에 울분이 차올랐다.
양심의 가책, 죄의식, 죄책감. 지금의 피난민들에게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들이었다. 은혜를 받기만 하는 사람은 몸이 편할지언정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하다. 그 은혜를 조금씩이나마 되돌려 주는 과정에서, 마음의 빚이 사라지고 안정을 얻는다. 그때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피난민들은 이 사실을 퍼들스퀘어에 와서 절실히 느꼈다.
싫은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내어주고 식사를 대접하는 영지민들. 그들은 뭔가를 요구하지 않고 덤덤히 웃기만 했다. ‘괜찮아요.’, ‘어려울 때일수록 도와야죠.’ 처음엔 그저 착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찾아와 보답할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꾸역꾸역 호의를 받아 챙겼다. 그러나 호의가 반복될수록 쌓여가는 것은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마음의 빚이었다.
잊으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으려 해봐도, 어느 순간 영지민들의 때 묻지 않은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슴이 바늘에 쿡쿡 찔리듯 아팠다.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았다. 마치 지독한 덫에 걸린 것처럼.
이대로 저 빛나는 흑발의 소녀와 마음씨 고운 영지민들을 희생시켜 또 살아남는다면, 아마 평생가도 갚지 못할 끔찍한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아가게 되리라.
“거 아줌마 맞는 말 하셨수!”
주름살이 지긋하게 난 목수가 몸을 일으켰다.
“비월 장군은 생판 남인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수! 우리가 그걸 못 본 척하고 도망치면, 이 세상에서 어찌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닐 수가 있겠슈? 다들 아니 그러슈?”
“옳소!”
“어차피 장군이 아니었으면 죽은 목숨이었어요! 장군을 위해 싸우다 죽겠어요!”
“가자, 이렇게 비굴하게 목숨을 연명할 바에 차라리 우리도 여기서 싸우다 죽자!”
함성의 파도가 폭발하여 영지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해일로 발전했다. 대기가 떨리고 산천초목이 흔들렸다.
비월은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떨었다. 몇 번이고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여, 여러분. 소녀는…….”
“받아들이시지요. 장군.”
해루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은혜를 갚고자 하는 일입니다. 장군이 저들에게 인의를 보인만큼, 저들도 장군에게 인의를 베풀 권리가 있습니다.”
“……해루 장군.”
“이건 장군이 받아들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결심이니까요.”
“…….”
비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전의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
와아아아아아아아!
그 통렬한 외침은, 성을 포위하고 있는 카사르 진형에서도 또렷이 들렸다. 숙면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그 소리에 벌떡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그리고 릴리 또한 그 외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데, 부장이 헐레벌떡 지휘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구, 군사님! 저 소리 들으셨습니까?”
“어머나.”
릴리는 짐짓 놀란 표정을 꾸며내며 이불로 몸을 덮었다.
“외간 남자가 여자 혼자 자고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절 어쩌실 생각이죠? 그 이상 가까이 다가오면 아크에게 이를 거예요!”
부장은 더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리 농이라도 이번 건 받아주기 힘들군요.”
릴리는 픽 웃더니 이불을 집어던지며 몸을 확 일으켰다. 그 박력에 부장이 움찔했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돌변해 있었다. 민간인들을 무심하게 사지로 밀어 넣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 여자가 더욱 더 싫어지네요.”
“…예?”
“피난민들을 배불리 먹인 후 그들로 하여금 총공세를 펼치게 할 심산이겠죠. 끝까지 고집부리면서 때 하나 묻히려고 하지 않는 모습. 생각할수록 가관이에요.”
릴리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술적인 측면만 놓고 본다면 적이 성을 버리고 스스로 총공세로 나와 주는 상황이니 아주 유리해진 것이지만, 비월이 끝까지 고고한 척 사람들의 인망을 얻는다는 점이 짜증났다.
“누구는 독한 각오로 마음을 버려가며 싸우고 있는데 누구는 계속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는 성인군자 놀이를 하고 있네요. 한심해. 그 허술한 마음이 어떤 결말을 초래하는 지 확실히 깨닫게 해주겠어요.”
“……명을 내려주십시오, 군사님.”
부장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녀의 입가가 기이하게 벌어졌다.
“그들을 무장시킬 준비를 하세요.”
============================ 작품 후기 ============================
이번편은 상대하는 캐릭터가 극과극이라 돌아가며 쓰는 재미가 쏠쏠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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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마루 / 여기서 뒤돌아가다가 목에맨 팬던트를 열어서 아내와 아기사진을 보면 더더욱 완벽... 아, 아닙니다.
알테니아 / 삐빅. 밸런스가 붕괴되었습니다!
책읽는고래 / 후후후! 습관처럼 계속 들어와라~ 들어와라~
할레데임 / 무서운 요구군요 ㄷㄷ
왜이리들다재밌지 / ㅠㅠㅠ
니알라토텝 / 오아오! 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생사부에 ㅋㅋㅋㅋㅋㅋㅋ 깨알같은 니드호그
민트레인 / 어려운 상황이긴 하죠 ㅠㅠ 다음편도 지켜봐 주세요!
그래프트 / 역사에는 소설보다도 끔찍한 일들이 많죠 ㄷㄷㄷ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릴리는 관대한것처럼 느껴지네요. 뭐, 살려줘서 영지에 넣은것 자체가 전략의 일환이라 그런거지만...
박성빈 / 선동자가 있으면 좋았겠네요. 다만 카사르에는 어비스의 혁명단원들 만큼 솜씨좋고 말빨 대단한 선동자들이 없다는 게 함정입니다.
마왕곰 / 아크가 지배하면서 기사도라는 개념을 거의 뭉개버렸죠. 아크의 기사들은 명분보다 실리를 더 따진답니다. 다만 한 번 기사는 영원한 기사인지라 저런 짓은 아군의 사기도 꺾는다는것은 확실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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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비월과 같은 캐릭터는 '남에게 당하고 얕보이면 호구!' 와 같은 기존 개념으로 퉁 쳐 버리기엔 그 그릇이 다르죠!
@알레든 / 저도 동의합니다. 비월이 릴리의 계략에 따라 영지민들을 죽게 내버려뒀다면 그녀와 같은 급으로 떨어지는 것이었겠죠. 그렇게 되면 지금과 같은 강력한 명분을 얻지는 못했겠죠. 그리고 말씀대로, 비월의 결정은 지금 당장의 전투보다 앞으로의 전투에서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겠죠. 이런 고퀄의 코멘트라니! 저도 다시 한 번 글을 돌아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