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0 두 개의 신념 =========================
“용병들 따위가 나라간의 전투에 끼어들 셈인가.”
최전방에서 피난병들을 베어 넘기던 반즈도 후방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군세들을 본 참이었다. 저 세 개의 깃발 중에서 그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 해골과 낫의 문양이었다.
“……용병들 따위? 그런 말을 너희 같은 쓰레기들에겐 듣고 싶지 않은걸.”
반즈가 자신에게 한 소리임을 알고 고개를 돌렸다. 난전중인 피난민들 사이로 중년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자신감 있게 돌돌 말려진 롤빵머리, 소매가 긴 펄럭이는 옷을 입고 목에는 검정 머플러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겉모습만 보아서는 귀부인, 혹은 부유한 상인 같은 이미지였다.
“……미친놈들.”
반즈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대상은 그녀도, 어비스병도 아닌 일처리가 미숙한 아군을 향한 것이었다. 저 거물을 알아보고 못하고 피난민이랍시고 퍼들스퀘어에 처넣었단 말인가.
국적 없이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비노쉬 용병단. 카사르와도 몇 번 인연이 있는 이 중립 용병단은 잔혹성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그리고 그녀 본인이 바로 단장인 비노쉬였다.
이때 난전을 틈타 카사르군 병사 두 명이 피난민들을 베어 넘기며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푸욱!
푹!
“……!”
다음 벌어진 광경에 반즈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두 병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검을 역으로 잡고 냅다 자신의 가슴을 찌른 것이다.
그녀가 몇 걸음 더 걸어가자 근처에서 싸우고 있던 카사르 병사들이 스스로 자신의 무기로 목숨을 끊으며 툭 툭 쓰러져갔다.
절대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정신계의 이능인가?’
당해보지 않는 이상 짐작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의 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정신계야 파훼법을 알고 대비만 한다면 그 효력이 절반 이상으로 떨어지는 것이니 정보 차단을 제대로 했으리라. 그게 아니면 그녀의 이능에 당한 자 중에서 살아남은 자가 없다거나.
“멈춰라, 여자.”
반즈가 검 끝을 세워 경고했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똑바로 다가왔다.
“왜? 내가 두려워?”
반즈가 이를 으득 깨물더니 붉은 잔상을 남기며 돌진했다. 그러나 그의 몸 또한 비노쉬를 몇 발짝 남겨두고는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비웃음을 흘리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반즈의 투구 사이에서 안광이 번뜩이더니 검이 강하게 휘둘러졌다.
그러나 그 회심의 공격 또한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 멈췄다. 팔이 심각한 수전증이 있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비열한! 내게 무슨 짓을 했나!”
“비열이라, 그런 말을 너희 쓰레기들 따위에겐 듣고 싶지 않다니까.”
그녀가 팔을 뻗었다. 몸에서 마력이 솟구치며 검정 머플러가 펄럭였다. 강력한 정신계 공격에 반즈의 눈이 뒤집히려 했다. 그녀의 목으로 뻗은 반즈의 검이 부들부들 떨리며 서서히 자신의 몸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끄으으윽!”
“잘 버티네. 하지만 철혈의 기사라는 명성을 생각하면 정신무장 쪽은 형편없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쪼그려 앉아 시체를 뒤적거렸다.
“아아.”
그녀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아까 반즈가 베었던 노인의 목을 꺼내 그에게 보였다.
“타의에 신념과 영혼을 팔고 인형이 되어버린 슬픈 넋이여.”
푸욱! 반즈가 스스로 가슴에 검을 꽂았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공을 흔들다가 쓰러져 흔히 놓인 시체중 하나가 되었다.
철혈의 기사라는 이름이 무색한 최후였지만, 투구가 벗겨진 그의 입가엔 편안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와아아아아아아아!”
세 난입군이 카사르군 진형의 등을 공격함으로서 상황은 완전히 비월군 쪽으로 기울어졌다.
“장군! 보고 계십니까?”
해루가 신이나서 외쳤다.
“용병단에 상단에 귀족까지! 모두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예.”
비월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왜 저들이 자신을 돕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너무 의아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두 장군이 베푼 인의에서 파생된 효과들이니까요.”
해루의 해설을 들어도 여전히 의아함이 남아있었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사옵니다. 우선은 이들의 도움을 감사히 받고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지요.”
비월군의 저력은 이 전투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퍼들스퀘어의 영지민들은 흑사회의 지배기간 동안 남녀 할 것 없이 숱한 전투 훈련을 받아온 실력자들이었다. 여기에 비월에 의해 동방의 기술인 ‘내공’을 전수받아 사용했기에 병사들과 영지민들은 한 명 한 명이 정예병 수준이었다.
총사령관인 비월의 실력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철혈의 기사 반즈도 허무하게 당한 지금,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영웅은 릴리군 진형에 없었다.
후방에서 등장한 응원군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기세를 탄 비월군은 릴리군의 중앙을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부장.”
넋 놓은 눈으로 전장을 응시하고 있던 릴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군사님.”
“제가 전술에 있어 무엇을 그르쳤는지 말해 보세요.”
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녀가 전술적으로 잘못한 것은 없어 보였다. 상대가 땅굴을 이용했기에 쓰지 못하게 했고, 상대가 성에 틀어박혀 농성을 하니 피난민들을 보내 식량을 바닥나게 했다. 그리고 상대가 이 피난민을 배불리 먹여 전력으로 쓰려고 하자, 같은 피난민을 앞세워 막게 했다. 그리고 그 피난민들이 배신할 것을 대비하여 일부로 허술한 장비를 주었고, 배신한 뒤에도 철혈의 기사를 보내 저들이 기세를 타는 것을 사전에 차단했다. 릴리는 언제나 비월에게 맞추어, 책사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릴리군은 현재 사방에서의 공격으로 공중분해 되어가고 있었다.
“저 중립 세력들이 우리를 공격한 건 그저 운이 없다고 생각해야 하나요? 아니면 제가 그들의 난입 가능성까지 예상했어야 했나요? 말해보세요, 부장.”
“……군사님의 대처는 완벽했다고 봅니다.”
부장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다만 그것이 범인류적으로 공감을 얻지 못할 방법이었습니다. 즉, 도를 넘어선 것에 대한 부작용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봐야겠지요.”
“……부작용, 인가요.”
그녀는 말없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퇴각하겠습니다.”
“……예?”
부장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릴리가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악착같은 그녀의 성격이라면 어떻게든 이 전투틀 계속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포기라니! 납득하기 힘들었다.
“군사님! 아직 전투는 아직 초반부 입니다! 병력은 여전히 우리가 우위이고, 전장이 고착화되면 질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질 이유는……!”
부장의 몸이 덜컥거리며 목소리가 끊겼다. 릴리의 단검이 그의 목젖에 박힌 것이다.
“…어…억?”
그가 믿기 힘들다는 듯 두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 어째서……! 커헉!”
“말했죠? 한 번만 더 내 명에 토를 달면, 찢어죽일 거라고.”
부장이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던 그녀가 살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켜보던 제장들이 움찔하며 차렷자세를 했다.
“더 시간이 지나면 돌이킬 수 없어요. 후퇴할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옛! 알겠습니다!”
*
후퇴 작전에서도 릴리의 성향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릴리는 난전에 대비한 병력 배치 변경이라는 명령 아래 ‘전 슈네처군’을 전방으로, 릴리군을 북쪽의 후방으로, 티가 나지 않도록 교묘하게 그 위치를 맞바꾸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 자신이 로브를 뒤집어쓰고 제일 먼저 전장에서 이탈, 나머지 주력 릴리군도 순차적으로 북쪽으로 후퇴하도록 했다. 이때 사용한 깃발 신호 또한 릴리군 내에서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적과 싸우기 바쁘던 ‘전 슈네처군’은 진형이 둘로 갈라져 있다는 뒤늦게 사실을 인지했다. 그들은 끝까지 후퇴 명령을 받지 못했고, 지휘관인 릴리가 도망쳤다는 사실도 한참을 지나서야 알았다.
그렇게 릴리는 자신의 주력과 함께 북쪽으로 도망쳤고 슈네처군은 괴멸했다.
병력의 열세로 수성을 시작했던 비월군의 대승이었다.
퍼들스퀘어에 공성을 걸어온 카사르군 4500명중에서 절반 가까이가 전사했다. 릴리와 함께 살아남은 병력은 1500명 정도로, 전투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녀의 빠른 판단은 확실히 유효했다. 그리고 패전한 것에 비해 릴리 본인이 이끌던 병력들은 많이 살렸으니, 죽은 슈네처에게 전멸의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게 되었다.
비월은 승전을 선언하였다. 피난민들과 영지민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승리를 만끽했다. 강군 카사르군을 정면승부로 쓰러트린 것이다. 그것도 우수한 정예 어비스군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그 어떤 전투보다 큰 의의가 있었다. 앞으로 수십 수백 년간, 이 민초들의 전투는 음유시인들의 주요 가사거리가 될 것이었다.
“자, 자, 부상자는 이쪽으로!”
“한잔 들이키십시오, 공짭니다! 공짜”
비월군을 지원한 세 개의 군세 중 하나인 ‘하얀매 상단’이 마차들을 끌고 와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식량을 제공해주었다. 비월은 이 소식을 듣고 해루, 하연과 함께 감사를 표하러 갔다.
마차 행렬 쪽으로 가보니 상단원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양복차림의 독수리 조인족이 보였다. 누구든지 그가 ‘하얀매’를 상징하는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움에 감사드리옵니다.”
비월이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 당신이 바로 비월 장군이군요! 짹짹.”
“……짹짹?”
하연이 그의 외모와 말투의 어긋남을 느끼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반면 비월은 살짝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그녀는 귀여운 것에 약했다.
“아, 실례. 흠흠.”
그는 민망한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했다.
“하얀매 상단의 상단주, 수리코프라 합니다. 꼬꼬꼬.”
“……그냥 새면 하면 아무 상관없는 건가요?”
하연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비월은 실례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번 전투에 귀조… 아니, 귀공의 도움이 컸다고 들었사옵니다. 협력에는 감사하옵니다만, 저희군은 당장 가진 것이…….”
“아, 이런. 제가 상인이라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날개를 휙휙 흔들었다. 부채처럼 바람이 나와 세 사람의 머리가 휘날렸다.
“우리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삐약!”
“……아저씨. 사실 그냥 분장한거죠? 인간 아냐?”
해루가 하연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얌전히 있으라는 눈치를 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소녀를 도와주신 것이옵니까?”
“아, 그게 사실은…….”
“뭐야, 이 새는? 비켜!”
퍽! 누군가가 수리코프의 어깨를 밀치며 등장했다. 인상적인 사자머리에 턱수염을 스타일 있게 기른 청년이었다.
“캠밸가의 7대 당주, 샘딘 캠밸이라 합니다.”
당찬 소개를 마친 청년은 비월의 손을 붙잡아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냥 캠밸이라 불러주십시오.”
“…누, 누구시온지요?”
놀란 비월이 손을 빼며 몸을 움츠렸다. 예상 못한 반응에 멀뚱히 있던 그가 무안하게 웃으며 허리를 일으켰다.
“아하, 동방 출신이라 들었는데 대륙 귀족의 예법엔 어색하시겠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번엔 해루가 나섰다.
“캠밸가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대륙 전체에서도 유명한 대가문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오셨는지요?”
“하하하! 바로 그 물음을 기다렸습니다!”
캠밸이 눈을 반짝이며 비월을 보았다.
============================ 작품 후기 ============================
아메리카노 질려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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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 응원군 이랍니다!
알테니아 / (시선을 피하며 냉정하게) 육딸라.
하치만4세 / 그렇게 생각하실수도 있겠네요.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그렇겠죠. 다만 작중에서 해루도 영지의 상황을 보고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선의가 선의가 돌아오는 경우는 이 썩은 세상에서 매우 드물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일이야.' 라고. 그냥 상황의 특수성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책읽는고래 / 히익!
etb08222 / 코멘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토론토너 / 응원군이 뒤치기를 하는 상황이죠!
할레데임 / 저도 계속 올린다 올린다 하는데 진도빼다보니 계속 까먹게 되네요 ㅠㅠ 금방 완성된 국가 설정만이라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프게했어 / ㅋㅋㅋㅋㅋ 듣고보니 그런 느낌도 드네요! 오오. 사마의라고 하니까 뭔가 있어보이는...!
벌레 / 기승전 가웨인 ㅠㅠ 곧 개인전이 정리 다 하고 단체전 양상이 되면 나오게 될 거예요!
니알라토텝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실에서 뿜었습니다. 진짜로 ㅋㅋㅋㅋ 드립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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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비월 통수설? 저들 세력까지 합치면 막강하긴 하겠군요.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