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1 두 개의 신념 =========================
“하하하! 바로 그 물음을 기다렸습니다! 사실 저는……!”
캠밸이 말하려는 순간 수리코프가 날개로 그의 입을 때리며 앞으로 나왔다.
“내가 먼저 왔으니 순서를 지켜! 망할 꼬마!”
“……읍! 읍! 뭐야, 이 새는? 죽고 싶은 것이냐? 감히 귀족의 신체에 손을!”
“돈 안 되는 망국의 귀족 따위에겐 볼일 없다! 짹짹!”
“뭐라고? 이 새 대가리가!”
비월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남자가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전령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비월 장군! 언더하임에서의 공문입니다!”
비월은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며 공문을 받아들었다. 하연이 비월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와아! 정보부 빨라! 방금 우리가 전투를 끝낸 걸 알고 바로 다음 지침을 보낸 거야?”
비월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정보부의 인장이 없으니 그건 아닐 거야.”
비월이 문서를 받아 펼치는 순간, 전령의 소매에서 단검이 착 튀어나왔다.
‘……릴리의 자객인가!’
기겁한 해루가 비월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휘둘러진 자객의 단검이 중간에서 멈췄다. 자객은 경악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스스로 자신의 목에 단검을 꽂고 자리에서 쓰러졌다.
“꺄아아아아악!”
“암살자다!”
“그, 그런데 자해했어……?”
갑작스런 암습 시도에 주위는 난리가 났다. 비월도 놀란 눈으로 자결한 자객을 보았다.
“저자에게서 묘한 피 냄새가 나기에 따라가 보길 잘했군요.”
긴 소매의 옷에 머플러를 두른 중년 여인이 죽은 전령의 뒤에서 걸어왔다.
“아, 당신은…….”
비월은 그녀의 얼굴이 기억났다. 어젯밤 비월이 연설하는 도중 인의에 대해 되묻던 바로 그 중년 여인이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소인은 비노쉬라 합니다.”
“…소문의 그 떠돌이 용병단인가.”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비노쉬 용병단이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비노쉬는 시선을 돌려 캠밸과 수리코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저와 같은 생각으로 온 한데, 맞지요?”
“…….”
“그렇담 제가 먼저 하죠.”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월 장군. 비노쉬 용병단을 비월군의 휘하에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뭣!”
갑작스런 제안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자유롭게 대륙을 떠돌아다니던 비노쉬 용병단이 스스로 군에 받아줄 것을 요청하다니! 특히 이들의 악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퍼들스퀘어에서 지내는 동안 비월 장군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본래 우리 용병단도 순수한 목적의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퇴색되어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흔해빠진 용병 조직으로 전락했지요. 이제 우리들도 오랜 방황을 그만 두고, 장군과 함께 뜻을 세우고 싶습니다.”
비월이 당황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번엔 수리코프가 앞으로 나왔다. 선수를 빼앗겨 불쾌한 눈으로 그녀를 한 번 쏘아봐준 그가 비노쉬의 옆에서 자세를 낮췄다.
“짹짹! 저희 하얀매 상단을 거두어주시지요! 저희의 자금과 신용, 그리고 거래처들은 비월군의 바탕이 될 것입니다. 장군의 군세는 앞으로 어비스의 최대 규모로 커질 터, 큰 군을 운용하기 위해선 큰 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장군의 가능성에 전재산을 걸겠습니다.”
캠밸 또한 질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나 샘딘 캠밸, 그대를 주군의 예로 모시고 싶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지요?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운명임을 직감했…….”
“삐약! 지금은 프러포즈 시간이 아니다, 삐약!”
“시끄럽다, 새대가리! 이 캠밸을 받아주신다면 가문의 군대와 권력은 모두, 온전히 그대의 것입니다.”
“…….”
비월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이 놀라운 상황에 호들갑을 떨던 하연은 해루의 옆에 착 붙어서 귓속말로 물었다.
“……세상에! 세상에!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요?”
“나도 놀랍구나. 대륙의 중립 세력들이 이유 없이 우릴 도울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부하로 받아달라는 제안을 해올 줄이야.”
“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요?”
해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자들인지는 좀 더 곁에 두고 지켜봐야겠지만, 힘, 재력, 그리고 권력. 우리 비월군이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갖출 수 있는 기회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건 확실하지.”
“……으으, 하지만 왠지 월이 성격엔 거절할 것 같은데요.”
“……사실 내 생각도 그래.”
고민을 마친 비월이 눈을 뜨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기꺼이 힘을 빌려주신다면, 소녀에게는 크나큰 영광일 것이옵니다.”
“……!”
“오오!”
무릎을 꿇고 있던 세 사람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월아! 정말로 받아주는 거야?”
하연의 물음에 비월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이번 전투에서 피난민들을 희생시키면서 많은 것을 느꼈사옵니다.”
“잠깐만, 장군! 그건…….”
비월은 방긋 웃는 얼굴로 해루의 말을 막았다.
“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오나, 만약 소녀에게 더 큰 힘이 있었더라면, 혹은 더 많은 식량이 성에 있었더라면, 그들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됐었겠지요. 이번 전투만 해도 여기 있는 세 분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 것이옵니다. 소녀는 지키기 위해 더 큰 힘이 필요하다고 느꼈사옵니다.”
해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말인가.
비월의 시선이 움직였다.
“다만 미리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소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옵니다. 소녀는 아직 미약하고, 미숙하며, 사람을 품을 그릇도 작사옵니다.”
이번엔 그녀가 바닥에 몸을 낮추고 절을 올렸다.
“그럼에도 힘을 빌려주시겠다면, 소녀 쪽에서 먼저 간청하고 싶사옵니다.”
“……비월 장군!”
어색한 동방의 문화에 당황해 하던 세 사람은 눈치껏 그녀를 따라 했다. 세 명의 우두머리들과 비월이 맞절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하연은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해루 또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인연은 이렇게 맞절로 시작되었다.
새로운 비월군의 탄생이었다.
*
군주들 간의 전투에서는 로드와 아크는 진행방향이 서로 갈렸다.
로드군은 매복이 아닌, 정말로 수도 엠파이어를 노리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이 소식은 카사르 측에선 한 발 늦게 알려졌다. 소식이 레드킵에 전해질 즈음엔 이미 아크는 3천 병력을 이끌고 언더하임으로 향한 뒤였던 것이다.
로드의 꾀에 당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격분한 보호트는 즉시 2천명의 병력을 데리고 ‘관문’으로 향했다. 엠파이어가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가만히 레드킵에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호트의 병력은 전군이 보병인 만큼 행군 속도가 느렸다. 그리고 이 기동성에서부터 두 군세의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로드의 경우, 2천의 기병들만으로 달리고 달려 먼저 관문에 도달한 다음 이 기병전력 만으로 관문을 무너뜨렸다. 한참 뒤에서 행군해오던 나머지 8천의 보병들은 기병들이 무너뜨린 관문을 그대로 통과하면 됐던 것이다. 로드는 상당한 시간을 절약했다.
보병들로만 이루어진 보호트의 군세가 관문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어비스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한참 늦었군.”
보호트가 한탄하며 관문을 올려다보았다.
“부관, 관문에 주둔해 있는 적의 수는?”
“관문 내부에 숨어 있는 적을 계산할 수는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3천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3천이라고? 많이도 두고 갔군. 로드 폴렌티아는 7천 병력만으로도 엠파이어를 함락시킬 수 있다는 계산인가?”
엠파이어는 예비병까지 합쳐 5천명 가까이 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며, 지휘관은 수성의 달인 멕케이 장군이었다. 아크 또한 어비스가 총공세를 펼쳐도 엠파이어를 단시간에 함락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평가했었다. 보호트 자신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보호트 장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부관들이 말했다. 아크는 관문을 쭉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관문의 보수는 거의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문 쪽도 대강 울타리로 막아놨군. 그렇다면 우리군은 초전부터 전력으로 밀어붙이겠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가 로드군의 뒤를 잡을 것이다!”
“예, 장군!”
“총력전을 준비하라. 전군 출격준……!”
휘이이잉! 보호트가 말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뭔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라 방심하고 있었던 보호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았다.
쾅!
허공에서 새빨간 폭발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이 기겁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뭐지?’
보호트가 손을 들자 바람이 일어나 연기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그 연기 너머, 관문에 걸터 앉아있는 누군가가 시선에 들어왔다.
“설마…….”
보호트의 인상이 급격히 굳어졌다.
양 갈래로 늘어뜨린 붉은 머리에 진홍색 눈동자. 손바닥위로 분필 같은 것을 제자리에서 던지며 가지고 놀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보호트가 침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유니벨 풀하우스.”
“장군! 유, 유니벨이라면…….”
“그래. 어비스를 대표하는 강자 중 한 사람이다. 로드 폴렌티아는 그녀를 여기에 두고 간 것인가.”
보호트는 의아했다. 오로지 자신의 2천을 막기 위해 유니벨 같은 주요 전력을 관문에 박아두고 가다니, 엠파이어 공성은 어쩌려고 이러는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녀의 고유능력을 생각해 본다면 차라리 베아트리체를 남겨 두고 가는 게 적절했을 터였다.
“……아무튼, 그녀가 지키고 있다면 시간이 오래겠구나.”
보호트가 팔을 뻗었다.
“서두르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 야영지를 건설하고 나무를 해와서 사다리를 만들어라.”
“예, 장군!”
관문에 걸터앉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빨간 머리의 소녀는 ‘쳇’하고 혀를 찼다. 금방이라도 돌격할 태세였던 카사르군이 갑자기 야영지를 건설하며 공성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른 쳐들어오라고 도발했더니 오히려 더 신중해지고 난리야! 아 진짜!”
그녀가 홧김에 탄환을 바닥에 내팽개치자 부관들이 기겁한 소리를 내며 주위에서 멀어졌다. 유니벨은 그들에게 신경 한번 쓰지 않고 무릎을 모아 얼굴을 툭 올렸다.
“흥, 나만 여기 내버려 두고 리체랑 둘이서 엠파이어로 갔겠다? 두고 봐. 팬더!”
============================ 작품 후기 ============================
이제 비월의 전투도 끝났고, 각 영웅들의 개인전 단계는 마무리 되어가네요. 로드 쪽으로 넘어가서 빠르게 진도 빼겠습니다.
간단히 격파한 군세만 짚고 넘어가보면!
로크 : 스노노군, 로즈안느군 격파됨.
아크 : 퍼시벌군, 슈네쳐군, 릴리군(절반생존) 격파됨.
-------------
레이아니 / 그러네요. 효율만을 중시하다 보면 그런 점을 놓치기 쉽죠.
ArSeN_Ru / 플래그 꽂으려 애쓰는 조연들...
할레데임 / 오늘 오후쯤에 동맹전쟁 나라들 정리해 둔거 있는데 그거 올려보도록 하죠 ㅠㅠ
天空意行劍 / 에스프레소 맛있나요? 저는 아메리카노에도 시럽 빵빵 타서 먹는 초딩입맛이라...
니알라토텝 / ㅠㅠ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현실에는 너무너무 많죠. 죽도록 일시켰다가 조금만 어긋나면 부하에게 책임 뒤집어 씌우고, 꼬리자르기 하고 ㅠㅠ
†Rayble† / 그런 방법이! 내일은 녹차라떼로 가겠습니다
...(-1)... / 오, 다즐링? 입맛이 고급스러우시군요! (음?
알테니아 / (몸을 들썩거리며 좌우를 한번씩 보다가 끝내 단호한 얼굴로) 육딸라.
쿨레라군 / 음음, 저는 패도를 인의를 배제한 통솔이라고 봤거든요. 사도가 그보다 더 강도가 높은 것이라면 사도겠네요.
---
@박성빈 / 동감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베풀면 손해, 얕보이면 호구, 이런 인식이 원채 팽배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이익만을 쫓다가 부조리에 기대게 되는것 같네요. 요즘은 덤, 혹은 순박한 인심 이런 단어 자체를 도시에서 쓰게 되는 경우가 없는듯 해요.
@벌레 / 무..무슨 조합이죠? 그게? 음... 생각해 보니 어울릴것 같기도 하는? 병사들에게 존경받는 명장들이라는 공통점이 있겠네요. 다만 그 성격이 팬심, 존경, 동경 정도의 차이는 있겠네요.
@로리콤MK / 나중에 고유능력에 대해 본편에서 설명나올거에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