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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227화 (227/296)

00225 타락의 악마 =========================

로드는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카사르의 왕궁에 당당히 입성했다.

“리리스 녀석, 날뛰라고 했지만 이렇게나 골치를 썩일 줄이야.”

실내에 들어온 로드가 로브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로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브를 걸치고 그 안에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비는 그쳤지만 자칫 고인빗물이 피부에 닿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키리안, 민간인들의 피해는 어때?”

로드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키리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다행히 민간인들은 검은 비가 내릴 때 모두 집에 틀어박혀 있어서 큰 피해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검은 비로 인해 영지의 농작물이 전부 말라비틀어지고 식수가 더럽혀지는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속출했습니다.”

“……으음.”

그래도 로드는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최악의 경우는 주거지까지 타락자들이 다수 생성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어비스와 리리스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런 심각한 상황까지는 면한 듯 했다.

“병사들을 풀어서 땅에 고인 빗물을 제거하도록 해. 이래서야 사람들이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하겠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암살단원들이 쇠사슬에 묶인 중년 남자를 데리고 와 로드 앞에 무릎 꿇렸다.

“적장 멕케이입니다.”

“응. 수고했어.”

그들이 경례를 취하며 사라지자마자, 멕케이가 부릅뜬 눈으로 로드를 보며 ‘이보시오!’하고 소리를 높였다.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악마의 힘을 쓰다니! 제정신이오? 그대들은 정녕 명예라는 것이 없냔 말이오!”

“……어째 카사르의 기사들은 뱉는 대사가 다 거기서 거기라니까.”

로드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볼까요, 멕케이 경? 만약 내가 왕으로 명예롭게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그대들에게 붙잡혔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어떻게 내 명예를 보상해주겠습니까?”

“……적이지만 그대의 명예를 칭송하며 고통 없이 보내드렸을 것이오.”

“에이, 봐봐. 결국 죽이겠단 거잖아.”

로드가 픽 비웃음을 흘리자 멕케이가 발끈했다.

“명예로운 죽음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희생이오! 그대들 같은 불량배들이 어찌 그것을 알겠소? 참으로 한탄스럽소!”

“나는 명예로운 죽음보단 이승의 더러운 진흙탕에 뒹굴면서 오랫동안 살랍니다.”

키리안이 멕케이의 뒤로 슥 돌아와 배틀액스를 쥐었다. 명령만 내리면 바로 목을 떨어뜨리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로드는 손을 내저었다.

“감옥에 가둬라.”

“……아, 알겠습니다.”

키리안이 병사들을 시켜 멕케이를 끌고 나가게 했다. 그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던 로드는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승리가 우선이야. 허울에 집착하다가 함께 싸우는 동료들이 죽거나 다치는 꼴을 볼 순 없으니까. 그렇지?”

베아트리체가 헤헤 웃으며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키리안이 다가와 물었다.

“폐하. 멕케이를 처형하지 않으실 겁니까?”

“그는 아직 이용가치가 있어. 만약에라도 아크가 우리 쪽 포로를 잡으면 교환 카드로 쓸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로드의 눈썹이 내려앉았다.

“…물론 포로교환을 하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

키리안이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로드는 훤히 알 수 있었다. 우두커니 서있던 키리안은 전후 수습을 하러 간다며 왕궁을 나갔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일로 흩어지고, 로드와 베아트리체는 적당히 쉴 방을 찾아 왕궁 실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사르의 왕궁은 그 규모가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구조가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 했다.

“그건 그렇고 리리스는 이 난리를 피우고 어딜 간 거야? 혹시 밖에서 본 적 없어?”

베아트리체가 도리질했다. 입에는 간식인 빵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 녀석, 정말 어딜 간…….”

로드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옆에 있는 베아트리체 또한 물고 있던 빵을 한 입에 삼키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안녕.”

백과 흑의 머리를 한 여인, 리리스가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도 제 말하면 온다던가, 로드가 흠칫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리, 리리스?”

그녀가 대뜸 로드 쪽으로 성큼 성큼 다가오자 베아트리체가 검을 뽑으려 했다. 로드는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그러지 말라고 말해놓고는 입을 열었다.

“어딜 갔었던 거야?”

웃는 얼굴로 다가온 리리스가 난데없이 로드의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고마워.”

“……헉!”

졸지에 그녀에게 안기게 된 로드는 극한의 공포를 경험했다. 체면이고 뭐고 입 밖으로 ‘살려주세요!’라고 외칠 뻔 했다. 뭔가 잘못 했나? 이대로 몸을 터뜨려 죽일 생각인가? 베아트리체더러 구해달라고 해야 하나? 짧은 시간동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히 그녀는 로드를 순순히 놓아주고는 몇 발짝 물러나 웃어보였다. 그녀가 비켜나자 베아트리체가 로드의 앞을 샥 가로막았다.

로드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물었다.

“……동생 쪽이야?”

“응.”

로드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러고 보니 특유의 ‘눈 마주치면 죽여 버린다.’같은 살기를 뿜지 않고 있었다. 얼굴 표정도 사람을 미천한 벌레 보듯 하던 본래의 얼굴과는 달리 선해보였다.

“네 언니는?”

“지금 힘을 쏟아 붓고 나서 기분 좋은 상태야.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나와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녀에 대한 새로운 정보에 눈이 번쩍 뜬 로드가 바로 이어서 물음을 던졌다.

“힘을 소진하면 린, 네가 자주 나올 수 있는 거야?”

리리스의 웃는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주의해. 로드 폴렌티아. 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언니뿐이야. 너희에게 허락된 이름은 하버트가 지은 키메라 코드네임 ‘리리스’밖에 없어.”

“아, 알겠어. 그렇게 하지.”

온순한 동생 쪽이라도 악마라 그런지 대단한 위압감이었다. 그녀가 살기를 거두고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아까 네 물음에 답하자면. 그래 맞아. 원래 언니는 내게 자리를 잘 양보하지 않으려 하거든. 전투일 때도 대부분 언니가 나서지. 지금은 기분 좋은 낮잠을 자고 있는 상태라고 해둘게.”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도 리리스는 어젯밤에 힘을 과다하게 썼다. 날아오는 발리스타의 투창을 무식하게 깡 마력으로 막아내질 않나, 타락의 권능이 담긴 비를 영지 전역에 흩뿌리질 않나. 아무리 A+급 괴물이라도 마력 과다 사용으로 몸이 파괴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로드가 손가락으로 빈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여기서 해.”

리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적당히 기둥 쪽에 걸터앉았다.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로드의 앞에서 그녀를 노려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정은?”

리리스가 물었다. 로드는 긴장하지 않은 척 대답했다.

“……여기서 조금 쉬면서 준비를 했다가, 바로 언더하임을 도우러 갈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도우러 간다니?”

“카사르의 왕이 병력을 이끌고 언더하임으로 내려갔어. 곧 놈들의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몰라.”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너 재밌는 소릴 하네? 그럼 우리가 던전으로 돌아가려면 그 카사르의 왕을 물리쳐야 한다는 거야?”

로드는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대꾸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놈들의 수도를 빼앗았는데, 놈들은 우리 수도를 공격하고 있다고? …이제 알겠다. 넌 처음부터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리리스의 눈빛이 보검처럼 날카로워졌다.

“우리의 계약은 분명히 엠파이어까지였어. 그런데 이 상황은 뭐지? 보금자리에 돌아가려면 또 싸워야 한다니, 이건 이중계약인걸.”

‘윽.’

이용당했다는 분노일까? 그녀의 눈빛이 점점 더 사나워지며 숨길 수 없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로드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베아트리체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쳇! 여기서 폭주하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무엇을 숨기겠는가, 리리스를 제대로 써먹으려면 이런 방법밖엔 없었다. 그녀는 언더하임 지하던전에서 나오는 광석들을 먹고 산다. 즉 그녀의 보금자리는 지하던전뿐이니, 어딘가로 나가면 다시 언더하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공격하는 카사르군과 싸워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는 상황. 로드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동생에게 생각을 간파당해 버린 것이다. 리리스가 몸을 일으켜 로드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결단코 포옹 정도로 끝나지는 않으리라.

극도의 긴장감이 성내를 가득 채웠다.

“……주인님. 지시를.”

베아트리체가 작은 목소리로 전투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여기서 최고 전력인 두 사람이 치고 박고 싸우다가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로드는 생각에 빠졌다. 필사적으로 변명을 떠올리고 있었다.

“잠깐, 리리스. 오해가 있어.”

“……?”

“너희가 지금 언더하임에 남아있었더라면 죽었을지도 몰라.”

그녀의 오드아이가 부릅떠졌다.

“우릴 모욕하는 것도 정도껏…….”

“카사르의 국보, ‘성검’이 언더하임으로 가고 있다.”

성검이라는 말에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 무구는 너희와 상극인 ‘신성’이 압축된 천사의 검이야. 전설에 따르면 너희들의 전생이라 할 수 있는 사마엘도 천사들에게 당했지. ……언더하임에 계속 있었더라면 네 언니가 위험해졌을 거야.”

“……앗.”

갑자기 리리스가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지금 언니를 걱정해준 거야?”

‘……응?’

지금 이 말이 먹힌 건가? 아직 장담할 수 없지만 반응이 괜찮았다. 로드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한 줄기 광명을 찾은 기분이었다. 간만에 쓰는 ‘감정 증폭’의 고유능력으로 그녀의 감정을 더더욱 고조시키며 로드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당연하지. 너희 언니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으니까.”

리리스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먹히는 같아 보여서 다행이었지만 기분은 조금 이상했다. 왜 언니를 구한다는 것에 본인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그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해 준건 네가 처음이야.”

‘……그런 대사까지 나올 정도냐!’

“좋아, 네가 잔머리를 굴렸다는 건 알겠지만 이번만큼은 넘어가줄게.”

그녀의 몸에서 나오고 있던 살기가 귀신같이 사라지며 웃는 얼굴로 되돌아왔다.

‘…살았다.’

두 번째 죽을 위기를 넘긴 로드가 안도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이야? 로드. 정말로 그들이 성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몸을 사려야 해.”

“걱정 마, 너희가 나설 일은 최대한 적게 할 테니까. 다만…….”

로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 작품 후기 ============================

왜이리들다재밌지 / 네, 그렇습니다. 각자 수도를 노리고 있죠.

박성빈 / 스토리 전개상 수도 방위전은 크게 다뤄지지 않을 예정이지만 (벌써 수도 방위전만 세번째라서 ㅠㅠ 언더하임 좀 가만 내러려둬)그에 걸맞는 대형 전투가 나중에 있을 예정이오니 기대해 주세욧!

레이아니 / 이번작은 신들의 시선까지 나오면 독자님들이 너무 정신 없어 하실것 같아 자제하고 있지만.. 음, 음, 한번 다뤄보는 것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니알라토텝 / 으아아아 자살하고 싶군요 ㅠㅠ 빨리 쓰는것도 재능인것 같습니다. 200편 가까이 쓰고 있는데 글 속도에 가속이 안붙네요.

그래프트 / 정확히 리리스는 A+ 입니다! 세계관 최강급의 캐릭터죠. ㄷㄷ; 다만 한계가 명확하지만요.

로리콤MK / 넵. 생각하는 분야가 다르기도 하죠. 처음에 수 싸움에선 로드가 밀리는 그림이지만, 로드가 변수를 마구 일으키자 로드가 유리해 보이는 것처럼요. 또 아크는 나름대로 자신의 계산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엠파이어를 내줘도 언더하임을 차지하면 전력에서는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한거죠.

...(-1)... / 100명의 고길동씨는 아크에게 가혹하겠네요 ㅋㅋㅋ

재범 / 오늘도 코멘 감사히 보고 갑니다!

spadel / 헉, 비월빠가 나타났다! ...는 넘어가고; 역시 아크보다 세레나를 더 큰 위협으로 보시는군요!

민트레인 / 피차 전력이 비슷하여 박빙이랍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언데드 군세를 거느린 하데스가 점점 유리해 지는 양상으로 흐릅니다. 치엘로는 그 전에 치명적인 피해를 한방 먹여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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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린 / ...일단 고자는 아닙니다. 영웅에게 확 빠져드는 플레이어의 결말은 항상 좋지않기에 정도의 선을 긋고 있는거죠.

@최카츄 / 칭찬 감사합니다! 저도 전작의 아쉬움을 해소하고자 이번작을 썼네요. 221화 수정해둘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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