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6 대국의 사정 =========================
로드가 생각해도 엠파이어는 이상적인 도시였다. 도시의 주요 시설, 주거지, 상가, 하수도까지 이 시대의 도시가 갖출 수 있는 모든 인프라들이 완벽히 자리 잡고 있었다. 같은 수도인 언더하임과는 차원이 달랐다. 도시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로드는 상경한 시골 청년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창고에 가보니 많은 황금과 명인이 제작한 무구들로 가득했고, 도시 사람들이 먹어도 1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었다.
‘후후, 이 맛에 수도 먹는 거지.’
로드는 검은 비로 인해 썩어버린 농작물을 배상하겠다며 창고를 풀어 식량을 영지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다. 먹고 살기위해 식량을 받는 사람도, 카사르 본국과의 의리를 생각해 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드는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아크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왕이었다. 엠파이어 내에서 아크의 지지도는 확고했는데, 그만큼 그가 내정을 잘 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하긴, 생각해보니 녀석은 병사들한테도 인기 만점이었지.’
아크 본인이 원채 대인관계 기술이 뛰어나고 군중을 잘 다룬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가 펼친 정책들을 살펴보면 기득권 세력인 기사들을 약화시키고, 가문이나 핏줄 대신 능력주의를 정착시켜 일반 평민들도 기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등 대다수 국민들이 환호를 보낼만한 내용들이 많았다.
로드는 ‘혁명의 바람’을 엠파이어에 심어둘 수 없을까 싶어서 지휘관 창을 확인했지만, 몇 년이나 걸린다는 결과 예상 화면이 나타나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확실히 그동안 싸워왔던 플레이어들과는 격이 달랐다. 아예 혁명이 통하지 않는 곳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엠파이어를 점령할 때 악마 리리스를 사용한 것이 나쁜 평판으로 작용한 점도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영지민들이 우리 땅에서 물러나라며 난을 일으키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고민 끝에 로드는 새로운 혁명단장을 왕궁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예? 여기서요?”
로드의 지시를 들은 혁명단장은 당혹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응. 많이 힘들까?”
혁명단장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힘든 정도가 아닙니다, 폐하. 엠파이어의 영지민들은 아크에게 무한한 충성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크에게 등을 돌리게 해서 나중에 우리를 위해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건…… 지금 상황에선 불가능, 절대 불가능입니다.”
로드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할 수 있고 말고를 떠나서 이번 혁명단장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벤은 ‘불가능’ 이라는 말을 쉽게 입에 담는 남자는 아니었다.
“완전히 설득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로드가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동안 카사르의 국민들을 선동했더라. 그런 인상을 줄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 그리고 우리에게 협조하도록 할 필요까진 없고, 현 카사르 체계의 불만과 아크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려서 이미지를 떨어뜨리는데 집중해.”
“……예, 그 정도라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로드는 혁명 작업과 동시에, 병사들의 피로를 풀고 장비를 재점검하며 다음 전투 준비에 집중했다. 리리스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최대한 빨리 언더하임으로 내려가야 했다.
“폐하!”
그러던 중, 키리안이 사색이 된 얼굴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로드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대답했다.
“……큰일 났습니다. 언더하임이 함락 당했다고 합니다!”
*
‘레드킵’에서 출발한 아크의 3천 병력이 어비스 본토로 내려왔다.
이때 비월군에 패퇴한 릴리군이 아크군에 합류하며 도합 4500명의 병력이 되었다. 이들은 퍼들스퀘어는 무시한 채 바로 언더하임으로 내려갔다.
아크가 선호하는 방식은 뒤끝 없이 퍼들스퀘어까지 함락시키고 가는 것이었지만, 어비스의 후방을 손에 넣은 지금은 굳이 북부 루트를 뚫지 않더라도 퇴로와 보급선이 확보되어 있었기에 문제없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레드킵을 무시하고 엠파이어를 바로 공격한 로드에 대한 대응차원이었다.
아크는 언더하임으로 내려가면서 다른 군세들도 움직이도록 했다.
발트호른과 주위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기네비어군과 가웨인군을 언더하임으로 올라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호의 기사 제레인트의 군세는 티아군을 위그드라실 안에 묶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자리를 지키도록 했다. 까다로운 어비스의 군사를 장군급 하나로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니 손해는 없었다.
아크군, 릴리군, 기네비어군, 가웨인군에 더해 후방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던 카사르의 마지막 군세인 베디베어군 2천명이 합류하면서, 도합 10500명의 대군이 언더하임을 포위한 형상이 되었다.
이에 맞서는 언더하임 수비 병력은 ‘피닉스군’과 예비병을 합쳐 4000명이었다. 총사령관은 피닉스가 맡았다.
아크는 언더하임에 도착하자마자 공성을 명했다.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언더하임의 서문과 동문을 동시 공략했다.
피닉스는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금방 한계를 드러냈다. 병력차이가 컸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언더하임의 요새 구조물이었다. 그동안 숱한 외침을 겪어 성벽과 성문 등이 보수를 해도 감당이 안될 만큼 수명이 다 되어있었다.
릴리의 증폭 효과를 받은 아크의 ‘화염구’가 연신 언더하임의 취약지점인 서문을 두들겼고, 그가 힘을 회복하는 중에는 공성병기들이 성문을 공격했다.
결국 이틀 만에 서문이 박살나며 시가전이 벌어졌다.
피닉스는 주특기인 도시 게릴라 작전을 펼치며 끝까지 싸웠지만. 카사르의 보병들은 언더하임의 좁고 복잡한 길목에 들어서더라도 유인당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위치를 고수했다. 아크의 지휘 하에 철저히 지시된 행동만을 취했다.
그렇게 카사르군 병사들이 어비스 왕성에 도달했으며, 전쟁은 종결되었다.
잔당으로 전락한 피닉스의 게릴라 병들은 시시각각 그 수가 줄어갔고, 마침내 피닉스 또한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
아크는 승전을 선언함과 동시에, 점령지 언더하임의 통치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것으로 수도 교환이 이루어졌다. 엠파이어는 어비스군의 거점이, 언더하임은 카사르군의 거점이 되었다.
*
언더하임 내부의 피닉스 잔당이 거의 평정되자, 아크는 영내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성문을 통과하자 기다리고 있던 여기사와 경비병들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폐하!”
그리고 선두의 여기사는 아크의 가신인 아론다이트였다. 갑주 차림이었지만 검을 차고 있지는 않았다. 검으로 변신하는 보유능력을 보유한 그녀는 몸 자체가 검이나 다름없었다.
아크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수고했어, 아론 양! 다른 녀석들은?”
“잔당처리 중이에요. 수고했는데 엉덩이 안 때려 주시나요?”
아크는 주위의 기사들을 힐긋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릴리 없을 때나 요구해.”
“헤헤, 궁으로 가시죠!”
아크는 아론다이트와 나란히 걸으며 처음으로 언더하임의 모습을 목격했다.
아크의 감상은 ‘황량한 도시’였다. 한 나라의 수도 치고는 허름한 성벽도 그렇고, 영내의 시설이나 주거지도 그렇고, 번화한 엠파이어에 비해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졌다. 게다가 어찌나 모래 바람이 심한지, 자꾸 눈에 모래가 들어가 고생이었다.
“그나마 여기가 번화가래요. 상업지구라던가?”
아론다이트가 해설했다.
“수도를 점령했는데 기분이 찝찝한 건 처음인 걸.”
아크는 길을 따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전쟁통이라지만 도시에 사람 사는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론 양. 도시에 사람들은 얼마나 있고, 창고에 식량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 봤어?”
“네!”
아론다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계속 확인하는 중이지만, 살고 있던 영지민의 대부분은 다른 영지로 피난 간 것 같더라구요. 남아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어요. 식량이나 광물같은 자원들도 텅 비어져 있었구요.”
아크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로드 녀석이 순순히 넘길 리 없지.”
그때 한 무리의 기사단이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지?”
아크가 눈을 깜박였다.
“철혈 기사단? 아, 릴리 경이네요.”
아크에게 도착한 기사들이 경례를 취했고, 그 사이에서 릴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릴리 양! 이번 공성 지휘는 훌륭했어!”
“고마워요, 아크, 그보다 급하게 보고 드릴게 있…….”
이라고 운을 때던 릴리가 아론다이트를 보며 질투의 불꽃을 일으켰다.
“아론다이트! 당신이 왜 아크 옆에 있는 거죠?”
“헤헤, 급한 거라면서요?”
릴리는 그녀를 한 번 쏘아봐준 후 보고를 재개했다.
“아크. 방금 본토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러고 보니 엠파이어는 내성 공성 중이랬던가. 후후, 로드 군이라도 이번만큼은 골치 좀 썩을 거야.”
“……엠파이어가 함락 당했다고 합니다.”
아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게 빨리?”
“악마 리리스가 엠파이어에 출현했다고 하네요.”
“…쯧, 그렇게 된 건가, 언더하임에서 끝까지 안 보여서 의아하던 참이었는데.”
아크는 분노하는 기색도 없이 차분히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로드와 아크의 차이는 명확했다. 로드는 처음부터 ‘수도 교환’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다. 이를 위해 언더하임의 인력과 자원을 외부로 빼돌리고, 엠파이어를 점령했다.
반면 아크는 로드의 꿍꿍이를 모르고 있었다. 로드가 전 병력으로 수비를 포기하고 엠파이어를 총공격하니, 자신도 이에 대응하여 언더하임을 빠른 타이밍에 점령한 것이었다. 그러니 같은 수도 점령이라도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다.
‘이게 네 노림수였구나? 로드 군.’
같잖은 수작에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이 화가 나긴 했지만, 아크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대세에 지장은 없어. 내가 노리는 건 수도 패널티니까.’
양 측의 수도가 빼앗긴 채 서로 수도 패널티를 받으면서 시간이 유지되면, 로드 쪽의 전략 악화가 훨씬 더 크다.
당장은 자원 상황과 점령한 도시의 차이가 커 보이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가장 중요한건 서로 1만 남짓 남아있는 병력. 이 병력을 어떻게 굴릴 것이냐가 핵심이었다. 로드가 엠파이어에서 자원을 얼마나 수탈하든, 전쟁에서 이기면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
‘자, 그럼 로드 군은 어떻게 나오려나?’
아크는 자신이 더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영토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로드의 거점영지는 엠파이어, 퍼들스퀘어, 위그드라실, 플랫랜치 정도. 최남단에 위치한 베틀린 특구도 무사하긴 했지만 중간에 길목이 되는 발트호른을 빼앗겼으니 큰 의미가 없었다.
반면 아크 자신은 어비스의 영토 다수를 빼앗았으며 점령지인 카르프리, 글레이시온, 알란드, 오펙투스의 영토 모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장기전으로 가도 전혀 불리하지 않았다.
시간은 카사르의 편이다.
아크는 틀림없이 로드가 언더하임을 되찾으러 내려올 것이라 생각했다. 로드의 계획이 완성되려면 수도 패널티가 커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할 테니까.
‘나는 이 포지션만 쥐고 있으면 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와보라고, 로드 군.’
아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언더하임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요즘 국내로든 국외로든 혼란의 카오스네요; 세상 와이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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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이리들다재밌지 / 이 다음편도 재밌게 봐주시면 좋겠네요. 베아는 귀엽네요.
로리콤MK / 닉네임 값이라는 표현은 이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최카츄 / ㅠㅠㅠ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spadel / 분석글이 너무 좋네요! 조금더 보완하자면 아크는 자신이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장기말들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키워낸 자들이 현재의 릴리,보호트를 비롯한 젊은 가신들. 그리고 신기사들이죠. 가웨인과 같은 구기사들은 강력하긴 하지만 100%컨트롤 할 수 없고 그에 따른 변수의 위험 때문에 배척하는 것이 아크의 성향입니다. 진정한 리더쉽은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의 자들이라 해도 품어내는 것인데, 아크는 그런 부분이 부족했고, 결국 지금의 불화가 만들어졌죠.
그래프트 / 보신 것이 맞습니다! 일명 '날 때린건 네가 처음이야' 클리셰죠.
니알라토텝 / 저도 그런 생각으로 한편 한편에 신경을 많이 기울이고 있습니다. ㅠㅠ 가속이 붙으면 좋을텐데요.
...(-1)... / 이 무슨 ㅋㅋㅋ 비월 반란설; ㅋㅋㅋㅋㅋ
벌레 / 출현해야 할 캐릭터들이 많군요 ;ㅅ;
책읽는고래 / 지도 있어요! 설정란에 보시면 딱 나옵니다!
재범 / 플래그 유효타가 들어가긴 했으나 리리스는 특별하죠. 동생을 잡았으면 이제 언니까지 꽂아야 진정한... 난이도가 두배!
하치만4세 / 불가능합니다! 각 나라의 플레이어만 각 나라의 고대 퀘스트 수행이 가능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