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7 대국의 사정 =========================
언더하임의 거리를 홀로 걷고 있는 여기사가 있었다. 은빛의 플레이트 아머는 태양빛의 반사되어 번쩍거렸고, 카사르의 문양을 새긴 망토는 바람결에 펄럭거렸다. 종종 불어 닥치는 모래폭풍에 등을 돌려 콜록거리는 모습은 아직 이곳 지리에 익숙지 않은 이방인 티가 났다.
그녀는 구기사를 대표하는 카사르의 전설, 가웨인이었다. 손에는 서신이 구깃하게 접혀 있었다. 장군급 이상의 제장들을 불러 모으는 아크의 소집령이 담긴 서신이었다. 그녀 또한 소집을 받고 왕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장군!”
가웨인이 왕궁 정원까지 들어와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가웨인군의 부장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보였다. 이 상황에 그리 달가운 얼굴은 아닌 지 그녀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왕궁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군! 정말로 아크의 소집에 응하시려는 겁니까?”
마침내 그녀를 따라잡은 부장이 소리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무 무모합니다! 아크의 명에 따라 순순히 언더하임에 군을 끌고 온 것도 위험천만한데, 소집에 응하시다니요! 무슨 짓을 당하실지 모릅니다!”
무시하는 걸로는 끝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든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감독관의 일은 잘 처리했지 않소.”
“장군! 고작 마을 사람들의 돌발 살해로 위장하고 마을에 불을 질러 증거를 없앴을 뿐입니다! 이정도의 위장으로 아크가 속아 넘어가리라 생각하십니까?”
“…….”
가웨인이 반응이 없자 부장은 더욱 절박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당장이라도 군을 이끌고 이 아크의 소굴에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장군의 명성이라면 로드 폴렌티아라도 흔쾌히 받아줄…….”
“이보시오, 부장.”
걸음을 멈춘 가웨인이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군은 왜 아크의 뜻을 거부하고 반역을 저질렀소?”
“……기사도를 관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좋은 답이군. 그럼 묻겠소. 조국을 배신하고 어비스에게 붙는 것은 기사도를 관철하는 일이오?”
그 말에 부장은 불의의 일격을 맞은 듯 움찔했다.
“하오나, 장군! 애초에 아크가 기사도를 저버리도록 하는 악의적인 지시를 내렸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에 반해서…….”
“그렇소. 소장은 더 이상 아크를 충의로 섬길 생각은 없소. 하지만 아크가 기사도를 저버렸다고 해서 조국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오.”
가웨인은 그렇게 말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소집되어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소장의 명운이 다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소장은 조국에 충성하다가 목이 떨어질지언정 적국 어비스에 몸을 담진 않을 것이오.”
“……장군!”
가웨인은 그 말만 남기고 망토를 펄럭이며 왕궁으로 걸어갔다. 부장은 차마 왕궁 내부까지는 따라오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가웨인 경.”
왕궁 입구에서 등을 기댄 채 서있는 초록 머리의 여자, 릴리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간만이오. 군사.”
“부하와 이야기가 잘 안됐나 봐요? 서로 언성을 높이시던데.”
“별일 아니오.”
가웨인은 그렇게 대꾸하며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릴리는 조금 거리를 둔 채로 따라왔다.
“…후후, 그래도 저는 가웨인 경 같은 타입을 좋아해요. 계산이 서고, 저와 경쟁하지도 않으니까요.”
복도를 걷고 있던 가웨인은 눈동자만 뒤로 움직였다.
“계산이 선다라… 이용해 먹기 좋다는 말로 들리는구려.”
“에이, 설마요.”
“경쟁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오?”
그녀는 묘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때 반대쪽 복도에서 큰 키의 여인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웨인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기네비어 님.”
“반가워요, 가웨인 경.”
저번 로즈안느군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을 받았기에, 가웨인은 그녀를 더욱 깍듯이 대했다. 기네비어 또한 살가운 미소를 지어보였으나, 가웨인의 뒤에 있는 사람을 보고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보기 싫은 계집도 있군요.”
“어머.”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웨인은 자리를 피했고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대면했다.
“…….”
“…….”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지만 두 여자간의 묘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릴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까닥하고는 기네비어를 지나쳐 회의실로 가려했다.
“이야기는 들었다, 천한 것.”
등 뒤에서 들린 기네비어의 목소리가 릴리의 발목을 붙들었다.
“도합 4천이 넘는 병력으로 작은 성 하나 깨지 못했을 뿐더러, 수성하는 적에게 당해 병력의 절반마저 잃어버리다니… 제 1군사라는 칭호는 허울뿐이구나.”
릴리의 표정에 발끈한 기색이 어렸으나 금방 그 자리를 인위적인 미소가 뒤덮었다.
“아하, 오랜만이죠? 이렇게 큰 소리 떵떵 쳐보는 건.”
“……뭐라고?”
릴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같잖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수공으로 수인군을 대파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험난한 산맥에 스스로 기어들어온 상대의 무식함을 비웃어야 할 거 같은데요? 하긴 대진운도 실력이라면 실력이겠죠.”
왕의 약혼자를 상대로 수위 높은 비아냥이었지만 기네비어는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적의 수준을 탓하며 공을 깎아내리는 것이 전형적인 소인배의 논변이구나. 확실한 사실은 나는 3천의 적을 일거에 멸했고, 네년은 2천이 지키는 성을 함락하지 못해 대패했다는 것이다. 폐하께서 네년의 무능을 고려하여 군사 자리에서 파하더라도 할 말이 없겠지.”
“아.”
릴리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아크와 함께 언더하임으로 내려오면서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몰라요.”
기네비어의 앞에서 굳이 아크를 이름으로 지칭하자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다. 처음으로 상대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 릴리는 쐐기를 박아 넣었다.
“아크의 천막에서 밤새도록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아침에 몸살이 걸려서 꼼짝도 못할 뻔 했다니까요? 그래도 기분은 좋았으니까 용서해줬지만.”
“……네 이년이 감히!”
기네비어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시뻘게졌다.
“기네비어 님, 당신은 의미 없는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적의 3천을 대파한 공을 세운 건 좋아요. 하지만 그 다음에 아크의 지침은 어땠죠? 당신의 처우가 조금 나아졌던가요? 아니에요. 당신은 발트호른에 처박혀서 언제나 하던 보급업무 같은 뒤치다꺼리나 했어요. 그게 현실이고, 앞으로의 미래도 그럴 거예요. 왜냐하면…….”
창가로 시선을 던져놓던 릴리가 기네비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아크는 저를 사랑하고, 저는 당신을 싫어하기 때문이죠.”
기네비어의 목에 힘줄이 돋았다. 방금 릴리는 본인이 이번 일의 배후에 있다는 이야기를 돌려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이야기가 이렇게 됐으니 그냥 다 까놓고 말할까요? 나이 먹을 대로 먹어서 자글자글한 주름살을 화장으로 가린 당신을, 젊고 창창한 아크가 무슨 이유로 좋아하겠어요?”
“……그만!”
기네비어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디까지 천한 소리를 지껄여 내 명예를 더럽힐 셈이냐? 내가 과거에 폐하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알았더라면 그딴 헛소리를 늘어놓진 못할 것이다!”
“……우와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그것도 몰라요? 아크가 당신과 약혼을 한 이유는 당신 가문을 등에 업고 왕권을 굳히기 위함. 희망에 부푼 늙은 여자한테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이제 아크는 카사르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고 당신은 필요가 없어진 거죠. 실은 당신도 알고 있었으면서.”
기네비어의 몸이 경련하듯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분하고 덤덤한 모습을 보여야 하건만, 이 모습을 가장 보이기 싫은 상대에게 보이고 있었다. 발가벗겨진 것보다 더 부끄럽고 치욕스러웠다.
“…그런데 참, 이해가 안 되네요.”
릴리의 혓바닥은 멈추지 않았다.
“기네비어 님은 왜 버려진걸 알면서도 아크의 곁에 머무르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군사자리를 자청하며 스스로 군대를 이끌기도 하고, 그게 왕의 약혼자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잖아요? 아, 설마…….”
그녀의 입꼬리가 벌어져 올라갔다.
“설마 내가 잘하면 아크가 한 번 더 봐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소녀 같은 마음으로…….”
“네년이이이이이이이이!”
결국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기네비어의 마력이 불길처럼 솟구치더니, 그녀의 양 팔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쇠사슬이 뻗어나가 릴리의 몸을 촤르륵 묶었다. 압박감에 릴리가 비명을 내지르며 휘청거렸다.
“……읏!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 입 닥쳐! 닥치라고!”
기네비어의 사슬이 릴리의 몸을 더욱 강하게 옥죄었다. 릴리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네가 우리에 대해서 뭘 안다고!”
기네비어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묵묵히 견뎌온 마음의 상처가 곪아 터져버렸으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릴리도 독했다. 그녀는 사슬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굳이 알 이유가 있을까요? 당신 스스로만 대단한 비밀인 양 여기고 있었을 뿐이에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닥치라고 했지! 이대로 죽여 버릴 수도 있어!”
기네비어가 손바닥을 펼치자 사슬이 가슴을 타고 올라와 릴리의 목을 빙 둘렀다. 사실상 검을 목젖에 들이민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릴리의 입가에 걸린 승자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엔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솟아올랐다.
“헛수고야! 무슨 짓을 해도 이 사슬을 풀 수는…….”
“그 반대예요.”
팟! 릴리의 증폭 능력이 기네비어의 사슬에 부여되었다. 그러자 사슬의 크기가 두 배로 부풀며 더욱 강한 힘으로 릴리를 조이기 시작했다. 압박감에 릴리의 눈이 뒤집어지며 입에는 거품을 물었다.
“이 미친년이!”
자살이라도 할 셈이란 말인가! 기네비어가 다급히 능력을 해제했고, 릴리의 몸은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릴리 양!”
쿵! 기네비어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등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크와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괜찮아?”
아크가 다가와 릴리의 몸을 끌어안았다. 릴리가 서서히 눈을 뜨더니, 이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아크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다, 다행이에요. 아크.”
“릴리 양!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순간 기네비어는 함정에 빠졌음을 느꼈다. 그녀가 설명하려고 입을 때려는데, 릴리가 더 빨랐다.
“기네비어 님이…… 콜록! 콜록! 저를…….”
아크가 기네비어를 돌아보았다. 그 차가운 눈동자와 직면하는 순간 기네비어는 얼굴에 핏기가 빠지는 듯 했다.
“아니에요! 폐하! 저 여자가 먼저 도발했어요! 우리의 약속에 대해……! 그리고 저는 그저 겁을 주려고만 한 것인데 릴리가 일부로……!”
“조용히.”
아크의 냉랭한 목소리에 기네비어는 가슴 끝까지 차오른 억울함과 울분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일부로 증폭을 건 거라구요! 제발! 폐하!”
“…….”
아크는 릴리와 기네비어를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네비어 님. 오늘 회의는 참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어찌됐든, 당신이 상관을 공격한 것은 사실입니다. 돌아가서 통지를 기다리세요.”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바닥에 주저앉은 기네비어를 내버려두고, 아크와 기사들은 성큼 성큼 멀어져갔다. 기네비어는 아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악마계집의 술수에 빠져 이대로, 이렇게, 허망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폐하!”
기네비어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만! 하나만 답해주세요! 어느 날 밤 저와 했던 약속, 기억하고 계시나요?”
아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군요.”
아크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대꾸한 후 사라져버렸다. 그 한마디로, 기네비어의 마음은 새까맣게 그을려졌다.
============================ 작품 후기 ============================
저는 어서 한 편 올려놓고 축구 보러 가렵니다! (곧 발암으로 죽을 자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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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트 / 오, 좋은 말이군요! 확실히 공격을 하는 쪽이 더 능동적이니까요.
책읽는고래 / 지도 없이 보셨으면 쪼금 위치가 혼란스러우셨을텐데 ㅠㅠ
왜이리들다재밌지 / 저도 최근 계속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네요. 아크와 세레스티나 모두 어비스의 정보력을 일정부분 차단하고 덤벼드는 것이라 에피소드에서 다소 부각이 안되긴 하네요 ㅠㅠ 계속 신경써 보겠습니다.
벌레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승전 가웨인; 이번편에 나왔네요!
할레데임 / 저도 공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ㅠㅠ 우선 말씀드릴건, 다른 플레이어 상대와는 달리 아크와 세레나는 일정부분 어비스의 정보력을 차단한 채로 싸움을 건 거구요. 그리고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느라 국가의 개성이 조금 묻히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네요. (사실 아크와 카사르는 별로 안 어울리죠. 카사르와 진정으로 어울리는건 말렉;) 아무튼 이 부분은 집필하면서 계속 신경쓰겠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로리콤MK / 명확한 상황 분석이네요! 그리고 쿠폰 감사드립니다! 더 열씨미 할게욧
니알라토텝 / 음, 그런 방법도 재미있겠네요!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1)... / 비월 이성계 포지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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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del / 비월편이 바로 전이었는데 또 내놓으라 하시면! ㅠㅠㅠ
@레이아니 / 와우우;
@알테니아 / 뿌뿌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