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230화 (230/296)

00228 대국의 사정 =========================

아크와 가신들이 회의실에 집결했다. 참여자는 아크, 릴리, 가웨인, 아론다이트, 베디베어, 이렇게 다섯이었다.

“릴리 양, 괜찮겠어?”

아크가 그녀의 목에 생긴 사슬 자국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릴리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무리하지 말고 앉아 있어. 회의 진행은 내가 할 테니.”

아크는 가신들을 한번 둘러보며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집어들었다.

“다들 소문은 들었겠지만, 본토로 넘어간 로드가 엠파이어를 점령했어. 우리가 언더하임을 차지한 것보다 더 빨랐지.”

가신들이 침음을 흘렸다. 철벽을 자랑하는 수도 엠파이어가 함락 당하다니, 바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수많은 영토와 언더하임을 쥐고 있는 우리가 더 유리한 상황이니까. 아마 로드는 언더하임을 수복하러 내려올 거야. 실제로 보호트 군이 엠파이어에 주둔한 어비스 병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해왔어.”

아크가 깃펜을 들고 지도의 언더하임을 둥글게 표시했다.

“그러니 우리의 기본 전략은 언더하임에서의 농성이야. 이곳만 쥐고 있으면 로드가 어떤 전략을 가졌던지 간에 공격을 강제할 수 있지. 시간을 끌기만 해도 우리가 급격히 유리해질거야.”

“……저도 아크의 말에 동의해요. 다만.”

릴리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다만 이곳 언더하임의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창고에 식량은 없고, 이곳에 살던 주민들도 태반이 영외로 빠져나갔어요.”

“그러고 보니 수도를 지키는 것 치고는 병력도 적었지.”

아론다이트가 맞장구를 쳤다.

“구조물의 보수도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았어요.”

작고 왜소한 체격의 여기사인 베디베어도 조심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요. 애초에 로드 폴렌티아는 수도를 내어줄 각오를 하고 우리 본토로 넘어간 거예요. 언더하임은 빼앗기도 쉽지만 잃기도 쉬운 요새가 되어버렸죠.”

회의실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계획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아크의 말처럼 언더하임을 수복하러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버티기만 하면 이기는 전쟁이죠. 그걸 막기 위해 로드 폴렌티아는 장기 농성이 힘들도록 인력과 식량을 빼돌린 겁니다.”

“……그렇다면 관건은 보급이겠군요.”

똑똑.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모두의 목소리가 멈췄다.

“폐하, 죄인을 압송했습니다.”

“아, 그래. 들어와.”

다른 가신들이 의아한 눈으로 아크를 보았다. 회의 중에 난데없이 죄인이라니?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기사들이 죄인 두 명을 압송해왔다.

“……저 자는!”

가신들은 깜짝 놀랐다. 죄인 중 한 사람은 놀랍게도 희대의 천재라고 칭송받던 소년 기사 퍼시벌이었다. 어린 나이에 당당히 카사르의 장군이 되어 한 군세를 이끌던 그가 지금은 허름하고 찢어진 옷차림에 밧줄로 꽁꽁 묶인 채로 나타났다. 밝은 색감의 적발은 눅눅하게 떡이 져서 두피에 달라붙어 있었고 얼굴엔 때가 꼬질꼬질했다. 언제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불타는 눈동자는 기력이 사라져 초점이 희미했고 겁먹은 듯 연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한 사람은, 티아의 화공 때 퍼시벌을 들쳐 업고 사지를 탈출한 그의 부관이었다.

기사들이 그들의 등을 힘껏 발로 찼다. 두 사람은 아크의 발 앞에 힘없이 쓰러졌다.

‘……!’

지켜보는 가신들은 조금 당황했다. 아무리 패장이라고 해도 한 때 장군급이었던 가신에게 너무 가혹한 대우가 아닌가? 고작 한 번의 패배로 전쟁포로보다 못한 취급이었다.

“안녕, 퍼시벌 군?”

아크가 쪼그려 앉아 퍼시벌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장 존경하던 사람이 앞에 있었지만 퍼시벌은 감히 아크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저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엉—말 실망했어. 퍼시벌 군.”

아크는 그런 그에게 죽기보다 싫어했었을 말을 내뱉었다. 퍼시벌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서럽게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가신들은 차마 동료의 추태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잠시 못 본 사이 장군 퍼시벌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또래의 철없는 울보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퍼시벌 군의 죄목은?”

아크가 그들을 압송해온 기사에게 물었다.

“2천의 군세를 책임지는 장군으로서, 적 티아군을 상대로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아군을 전멸로 몰아놓은 패장의 죄. 그리고 그런 큰 죄를 지었음에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숨어버린 도주의 죄입니다.”

“좋아, 물러가.”

기사들이 회의실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져 있는 퍼시벌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있었다. 그는 실패라는 것을 모르고 성장해왔다. 아크에게 발탁된 시골 소년에서부터, 한 군세를 이끄는 장군의 자리까지 별다른 굴곡 없이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나라의 모두가 그의 업적과 천재성에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첫 실패’는 퍼시벌에겐 너무나 가혹했다.

퍼시벌은 그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티아군의 매복을 뿌리치며 적장의 목을 몇 명이나 베어냈을 때에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아크에게 칭찬받을 일을 상상하며 행복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분은 곧, 병사들을 집어삼키는 화공에 의해 눈 깜짝할 사이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홧김에 티아 그란디네를 잡으러 무리하게 달려들어 보았지만, 오히려 그녀의 호위들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그들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기도 했다. 결국 퍼시벌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그가 그토록 업신여겼던 부장이었다. 부장은 자신을 희생하여 퍼시벌을 도망치게 했고, 퍼시벌은 부하에게 들쳐 업혀진 채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으어, 으으! 으아아아아아아아!”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버린 퍼시벌은 격한 발작을 일으켰다. 팔 다리가 뇌의 통제를 벗어난 듯 기이하게 꺾이고 흔들렸다.

‘…글렀네.’

‘다시 전장에 나가는 건 무리겠군.’

‘티아 그란디네에게 지독하게 당했네요.’

그의 모습을 본 가신들은 모두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카사르를 떠받칠 재목이라고 여겨지던 그 천재 소년이 한 번의 패배로 저렇게까지 망가지다니.

그때 쪼그려 앉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퍼시벌 군? 출군할 때 내가 몇 가지 당부한 거, 기억나?”

아크가 직접 이름을 부르자 퍼시벌의 발작이 멎었다.

“……설마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겠지?”

말투는 상냥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서늘한 무언가가 깔려 있었다. 지독한 공포에 사로잡힌 퍼시벌은 머릿속 어딘가에 파묻혀 있던 기억을 수면 위로 강제로 끌어올렸다. 그가 한탄 같은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기억…… 나요.”

“뭐라고 했는지 말해 볼래?”

“…지, 진형을 꾸리면 무, 무, 무리하지 말고 다른 군세의 지, 지원을 기다릴 것…….”

퍼시벌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적이 유인하면 함부로 뒤쫓지 말 것. 경험이 풍부한 부장의 조언을 충실히 들을 것. 아크의 당부를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입으로 말할 때마다 퍼시벌은 극도의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왜 퍼시벌 군은 내 말에 따르지 않았을까?”

“으브브브! 죄송합디다! 잘모해씁니다!”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서 완전히 무장 해제되어 버린 어린 소년은, 그 정신적 상처를 모두의 앞에서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고 아크는 그 상처를 잔인할 정도로 후벼 파고 있었다.

아크가 물음을 던지면 퍼시벌은 울먹이며 시인했다. 그 과정이 반복되어갈수록 소년의 얼굴은 지독한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보다 못한 가웨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폐하! 이건 좀…!”

“가만히 지켜보세요, 가웨인 경.”

아크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도 느끼는 게 많을 테니까요.”

“……!”

퍼시벌의 자백을 받아낸 아크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알았지? 퍼시벌 군. 네 판단력은 폐기도 불가능한 쓰레기야. 네 쓰레기 같은 판단 때문에 2천의 안타까운 목숨들이 불구덩이에 타죽었어. 그렇지?”

“네! 네! 네!”

퍼시벌이 아주 빠르게 고개를 휙휙휙 끄덕거렸다.

“네 판단력은 뭐라고?”

“쓰레기! 쓰레기 입니다!”

“좋아.”

아크가 다시 퍼시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판단력은 쓰레기라도 퍼시벌 군의 검술은 우수하니까.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는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

아크는 마치 최면을 걸듯, 느리지만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어 말했다.

“이번 사태는 네가 독자적인 판단을 내려서 일어난 거야. 두렵지? 네 판단이 또 어떤 끔찍한 사태를 불러일으킬지.”

퍼시벌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 네 모든 감정과 판단을 배제하고, 오로지 내 말에만 충실히 따르는 거야. 그러면 모든 게 편해질 거야. 그럴 수 있지?”

“네네네네네네!”

“너의 판단은?”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입니다!”

폐인이 된 소년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의 울부짖는 것 같은 외침이었다.

“좋아.”

아크가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춤을 매만졌다.

“아차, 검을 안 차고 왔구나. 좀 도와줄래? 아론 양?”

“옙!”

그녀가 아크 쪽으로 뛰어가더니, 그녀의 몸 자체가 아름다운 검으로 변신해 아크의 손에 착 쥐어졌다. 그는 퍼시벌의 밧줄을 잘랐다.

“자, 퍼시벌 군.”

아크가 아론다이트를 바닥에 박은 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마지막 기회를 줄게. 더 이상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퍼시벌이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패전에는 책임이 필요해. 본래는 널 처형해야 마땅하지만 한 번의 패배로 재능 있는 기사를 잃는 건 아쉬우니까. 음, 이런 건 어떨까? 퍼시벌 군에게는 판단장애가 있어서 전투 중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모든 죄는 곁에서 그를 보좌한 부관에게 있다.”

아크는 거기까지 말하며 옆에 누워 있는 부관을 보았다.

“이런 시나리오로 해줄게. 그러니까 네가 죽여.”

“네?”

퍼시벌의 몸이 다시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저 부관은 불길에서 생을 걸고 자신을 구해낸 목숨의 은인이자, 그동안 계속 함께 숨어살며 퍼시벌을 동생처럼 아껴준 사람이었다.

그가 떨고만 있자 아크가 한마디 했다.

“또 다시 날 실망시킬 셈이야?”

“……!”

누가 등을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아론다이트를 꽉 움켜쥔 퍼시벌이 부관에게 다가갔다. 부관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잠시만요! 장군! 제발 자비를!”

부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퍼시벌이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촤아악! 부관의 피가 소년의 얼굴에 엉켜 붙었다. 그가 아론다이트를 손에서 떨어뜨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판단은, 쓰레기.”

“훌륭해.”

아크가 짝짝 박수를 치며 두 팔을 벌렸다. 퍼시벌은 곧장 그의 품에 안겼다. 아크가 등을 토닥이자 퍼시벌은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신들은 소름끼치는 기분에 몸을 떨었다. 특히 가웨인은 저 소년의 일이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상황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크의 ‘길들이기’.

그는 합리적인 전략가였다. 전략의 실패로 인한 패배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모든 패배에는 배울 점이 있고 보완해 나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최악은, 장기말이 지시를 이행하지 않아 이상한 변수를 일으키거나, 역으로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

아크는 완전히 자신에게 복종하는 장기말 만을 원했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길들인다. 그것이 아크의 방식이었다.

============================ 작품 후기 ============================

알테니아 / 핫! 쿠폰 감사감사합니다! 황송한 마음으로 잘 쓸게요!

박성빈 / 이번편도 코멘 감사!

왜이리들다재밌지 / 흔들리는 아크... ;ㅅ;

도레미파솔솔 / 오옷, 어떤 꾀임이죠?!

할레데임 /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스토리 라인에서 어느정도 굳혀진 터라, 앞으로를 기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국가 목록은 시간나는대로 틈틈히 쓰고 있답니다. 부록이지만 의외로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네요.

ppk12 / ...헉; 그건 너무 악당아닐까요? 릴리급인데...;

학교만12년째 / 인간관계 측면에선 맹점을 가지고 있는건 사실이긴 하지만, 뛰어난 플레이어긴 합니다. 사실 아크가 릴리와 기네비어를 번갈아 쳐다볼때, 이미 상황파악을 모두 마쳤고 어느쪽 편을 드는게 유리한지 계산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아크의 선택은 릴리의 편을 드는거였죠.

냐르 / 켙타인 통수설? 헉;

류미연 / 저도 동감합니다 ㅋㅋㅋ

그래프트 / 의외로 릴리는 아크에게는 아주 헌신적이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인물입니다. 그녀 자체의 능력도 우수하고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인물이니 아크도 중용하는 거죠. 다만 그녀는 질투가 너무 심하다는게 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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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콤MK / ㅋㅋㅋㅋ 아이고 아크야 ㅠㅠ

@니알라토텝 / 기네비어도요? 로드 인재 풍족각;

@...(-1)... / 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두 사람은 이름도 생략하시는군요; 머시기로 통폐합;

@벌레 / ㅠㅠㅠ 귀넵비어

@Epic[에픽] / 정확하시네요. 릴리야말로 로드의 모략을 간파하고 되돌려줄수 있는 모략가 타입의 인물이지만, 비월같이 극단적인 상성을 가진 캐릭터에겐 무력했죠. 사이다는 준비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길!

@레이아니 / 프로게이머 출신이 어딜 가진 않는군요 ㅠㅠ

@spadel / 캬! 장문의 코멘 우선 감사드립니다! 아크의 성격적 단점이 드러나는 부분이죠. 모든걸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개혁을 하면서, 기존에 자리잡고 있던 기네비어나 가웨인 같은 인물들을 유동성있게 잘 구슬릴 줄 알았다면 좋을텐데. 벽을 쳐 버리니 문제가 생기는 거지요. 만약 아크가 어비스에서 플레이 했다면 유니벨이나 피닉스같은 토착세력 인물들이 과연 살아있을까요? 로드는 유니벨을 구슬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아크는 그녀를 처단했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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