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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231화 (231/296)

00229 대국의 사정 =========================

소집 회의가 끝나고, 가웨인은 터덜터덜 왕궁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장이 그녀에게 달려왔다.

“장군! 무사하셨군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

가웨인은 퀭한 눈으로 부장을 돌아보았다.

“이 도시에도 주점이 있소?”

“…예? 시장에서 찾아보면 한 군데 정도는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으시던 분이 어쩐 일로…….”

“이런 기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소.”

영문 모를 대답이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주점을 가기로 했다. 그 전에 무장을 해제한 후 다시 만나기로 했다. 괜히 번쩍번쩍한 갑옷을 입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약속된 시간이 되고나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헉!’

그녀를 보는 순간 부장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웨인은 언제 어디서든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던 갑옷을 벗고 평민들이 자주 입는 린넨 셔츠와 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묶고 있던 머리도 풀어서 어깨까지 늘어뜨리니 꼭꼭 숨겨두었던 여성성이 드러났다. 이제 40대를 바라보는 여기사였지만 그 외모는 전성기 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게 없었다.

‘정녕 내 마누라보다 세 살 더 많은 게 사실이란 말인가!’

부장은 속으로 좌절했다.

“…무얼 그리 보시오?”

가웨인은 쑥스러운 듯 그렇게 물음을 던지며 앞장섰다. 차림은 바뀌었지만 입에 붙은 특유의 군인 말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의 아크 시대에서야 여기사단까지 있을 정도이지만, 그녀가 활약하던 시절엔 여기사는 아주 드문 존재였다. 기사 문화에서 그녀는 남성성을 강요받게 되었고 그녀 본인도 여자라고 불리며 무시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식사할 때나 군막에 있을 때나 항상 갑옷을 입곤 했다.

두 사람은 야시장의 주점 중에서 한적한 곳을 골라 흑맥주를 시켰다.

“……훌륭하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가웨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장도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언더하임이 맥주로 유명한 이유가 있었군요!”

“음. 삶의 낙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오.”

“전쟁이 끝나고 어비스가 합병되면 엠파이어에도 이 맥주가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후후, 동의하오. 언더하임에선 거인들이 술을 만든다고 하던데, 이 감칠맛의 비결이 궁금하군.”

두 사람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술자리의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원채 오랜 세월을 함께 전장을 누벼온 두 사람이었기에 이야기 거리는 끊임없이 나왔다.

“……소집 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부장이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사람은 주점 구석에 방으로 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붉어진 얼굴로 기분 좋아보이던 그녀의 안색이 단번에 나빠졌다.

“아크는 우릴 부하라고 여기지도 않고 있었소.”

“……예?”

“우리는 그가 다루는 장기판의 장기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오.”

가웨인은 회의 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역시 아크는 정상이 아닙니다! 장군! 결단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가만히 부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웨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무서운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장군?”

“거기서 무엇 하시오? 왜 벽 뒤에서 남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소?”

“……!”

팟!

벽 뒤에서 누군가가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정도의 반응이면 결코 일반인이 아닌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검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가웨인이 즉시 벽 쪽으로 오른팔을 뻗었다.

- 블리자드(Blizzard).

콰콰콰콰콰! 얼음 폭풍이 뻗어나가 주점 벽을 부수고 퍼져나갔다. 주점에 온통 서리가 꼈다. 드물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손님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큭, 술기운 때문에 힘 조절이…….’

가웨인이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부장이 재빨리 뚫린 벽으로 달려 나가 보았다. 주점에는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님들과 주인 밖에 없었다.

“…제기랄! 놓쳤나 봅니다! 미행을 붙이다니!”

주점 주인이 덜덜 떠는 팔로 문을 가리키는 모습을 보며 부장이 이를 갈았다.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오.”

가웨인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황금이 몇 개 든 주머니를 꺼내 주인에게 던져주었다.

“여기 있는 손님들의 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남은 비용은 수리비로 쓰시오.”

“……오오오오! 가, 감사합니다!”

죽을상이었던 주점 주인의 표정이 금세 밝게 펴졌다. 가웨인은 한쪽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마룻바닥을 훑었다. 그리고는 구슬 파편을 집어 들었다.

“…놈이 가지고 있던 수정구의 파편인 것 같소.”

“통신 수정구일까요?”

그녀는 고개를 저어보이며 부장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크기와 빛깔은 메모리얼 수정구가 틀림없소. 우리의 대화를 녹음할 생각이었던 것 같군.”

부장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것 보십시오! 틀림없이 아크의 짓일 겁니다! 부하 장군에게 미행을 붙이는 왕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

“장군! 아크는 처음부터 우리를 칠 궁리밖에 없었던 겁니다!”

가웨인은 크게 한숨을 쉬며 주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술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

기네비어는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고 자신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정신을 차리셨군요.”

곁에 앉아 있던 메이드가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물 한 컵을 건네기에 기네비어는 군말 없이 받아 마셨다. 목이 무척 탔다.

“……여긴?”

“왕궁의 의무실이에요. 기네비어님이 실신하셔서 기사님들이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아.”

아크와 릴리가 떠나고, 그 자리에서 울다 지쳐 쓰러진 모양이었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가슴도 한없이 공허해서 한 올의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마치 고장나버린 것만 같았다.

“몸이 나아지시면 말씀해주세요.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다.”

기네비어는 혼자 있고 싶었다. 이곳은 복도 밖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서 신경이 쓰였다. 왠지 그 모든 목소리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흉보는 것만 같았다.

왕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에 군사를 사슬로 목 졸라 죽이려한 여자.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 터였다.

의무실에서 나온 그녀는 메이드와 함께 왕궁 5층으로 올라갔다. 일단은 왕의 약혼자라서, 그녀도 왕궁에서 지내야 했다.

‘……이젠 아무 의미가 없게 됐지만.’

기네비어는 계단을 올라가며 회상에 잠겼다.

유력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난 그녀는 거만하고 콧대 높은 성격이었다.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유명 기사들이 그녀와 청혼하기 위해 줄을 섰지만, 기네비어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찾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남자보다는 권력을 원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권력욕이 많았던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탐했다. 그래서 그녀의 타깃은 아직 어린 10대의 아크가 되었다. 그녀는 아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달콤한 말들로 그를 유혹했고, 순진했던 아크는 점점 호감을 표하며 그녀의 매력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왕자를 마음대로 건드린 것이 문제였을까,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에 발을 들인 것이 문제였을까. 그녀의 가문과 적대적이던 한 유력 가문이 아크와 기네비어가 약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 채고 대뜸 ‘영지전’을 선포했다. 그녀는 안전한 엠파이어의 왕궁에 머물고 있었지만, 고향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단 둘이 남게 된 어느 날. 달빛이 처연하게 비추는 창가에 선 아크가 더없이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기네비어.’

처음에 이 말을 들은 기네비어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기사들의 숱한 고백을 들어오며 자라 콧대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그녀였다.

‘저는 날이 밝으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당신에게 적대하는 캐틀린 가문을 칠겁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기네비어는 아크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말렸다. 장차 왕이 될 자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움직여서는 아니 되었다. 그러나 아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세상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반드시 당신을 왕비로 삼을 겁니다.’

수많은 미사여구를 덧붙여가며 사랑을 고백했던 다른 기사들보다, 아크의 순박하고 진심어린 그 한마디가 그녀에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유혹을 하려다가 역으로 상대의 진심에 홀리기라도 한걸까. 기네비어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마법에 빠진 것처럼 행복했다. 권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녀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그저 이 남자의 훌륭한 아내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때의 눈빛, 그때의 진심.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당신은 잊었다고 하시는군요.’

새까맣게 타버린 마음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았다.

“이 방입니다.”

마침내 도착했는지, 메이드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한 방을 가리켰다. 5층에서도 가장 끄트머리 처박혀 있는 방. 기네비어는 자신의 신세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메이드가 문을 열어 주고 기네비어가 안으로 들어왔다. 방은 청소가 되어 있는지 그럭저럭 깨끗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메이드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

그런데 이상했다. 그 메이드 자신도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것이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던 기네비어는 이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메이드가 문을 그대로 잠가버린 것이다.

“누구냐!”

기네비어가 버럭 소리치며 마력 사슬을 일으키려 양팔을 뻗었다.

‘……마력이 나오질 않아?’

“아까 당신이 마신 물에 조금 약품을 타 보았어요.”

메이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수 천 가지의 독을 다루는 이곳 어비스에서 마력을 태우는 약품 정도는 흔하죠.”

“……큿!”

몇 번 더 시도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몸도 나른한 것이 마력을 태운 것뿐만 아니라 자고 있는 동안 다른 약을 먹인 것 같았다.

“네 이년! 내가 누군 줄 알고……!”

메이드는 웃는 얼굴로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 모습에 기네비어의 입이 다물어졌다.

“……릴리가 보낸 것이냐? 아니면 폐하께서?”

“죄송하지만, 두 쪽 다 아닙니다.”

메이드는 다시 단검을 품에 감추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를 보내신 분은 밤의 왕이십니다.”

기네비어의 눈이 부릅떠졌다.

“……로드 폴렌티아.”

============================ 작품 후기 ============================

잉킹둘 / 맞습니다. 소통과 존중이 필요한 것인데 ㅠㅠ

먹는참치 / 스포는 못해드리고 ㅠㅠ 다음에 나올 스토리를 기대해 주시길!

책읽는고래 / 아크 TS라... 무, 무섭네요; 상상해보니

jhl / 그러게 말입니다 ㅠㅠ

알테니아 /  뿝뿝뿝은 다양한 감정 표현이 가능하군요;

박성빈 / 음...!

왜이리들다재밌지 / 아크쉑!

엘야 / 아크의 극혐력이 결국;

모두의칭구 / 이번편으로 아크혐오가 엄청나졌네요;

Gneji / 그런 급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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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del / 요즘 강세인 비월파셨군요! 그리고 아크가 마틴이랑 붙었다면 마틴의 승리를 예상하시네요 ㅋㅋㅋㅋ 흥미로운 관점!

@...(-1)... / 아크가 노진구급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니알라토텝 / 듣고보니 그렇긴하네요. 세레나와 대적하려면 어떤 군사를 뽑아야 할지;

@로리콤MK / 그런 이유 때문에 가웨인이 감독관을 죽인 정황이 있어도 아크가 눈 감고 넘어가고 있는거죠. 평시였으면 잡아들였을듯;

@레이아니 / 오옷, 쿠폰 감사합니다! 감사히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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