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0 대국의 사정 =========================
“……로드 폴렌티아.”
기네비어는 침대에 털썩 앉아 헛웃음을 흘렸다.
“내 불찰이로구나. 전쟁에서 이겼다고 여기가 적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다니. ……차라리 잘 되었다. 고통 없이 끝내다오.”
그러나 메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십니다. 폐하께서는 기네비어님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저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폐하께서는 기네비어님의 재능을 중히 쓰고자 하십니다.”
“하하하하!”
기네비어가 큰 소리로 웃어 보인 후 메이드를 노려보았다.
“비참하구나. 버림받은 꼴이 타국에도 알려진 것이냐? 허나 너희는 나를 너무 얕보았다. 어비스에 갈 일은 없을 터이니 어서 그 검으로 내 목을 긋거라.”
“……제가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곧 릴리에게 숙청당하실 텐데요.”
기네비어의 표정이 굳었다.
“당신이 죽은 뒤, 비로소 릴리는 마음 놓고 아크와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게 되겠죠. 실로 비극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느냐! 그 망할 계집이 내 기분을 망쳐놓더니 이제는 적국의 암살자가 쐐기를 박는구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메이드가 그렇게 말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기네비어님의 말씀대로, 적국민인 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현재 기네비어님은 상관 살인미수죄 혐의를 받고 계십니다. 누가 봐도 이번 사태를 빌미로 숙청당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요.”
“…….”
기네비어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분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대로 릴리의 예리한 칼날이 다가올 때까지 넋 놓고 기다리실 겁니까? 아니면, 다른 길을 걸어보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그녀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메이드가 눈을 빛냈다.
“원하신다면 아크의 목숨까지.”
“…….”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기네비어는 스스로의 심정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크의 죽음을 언급한 상대에게 격노했겠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세상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반드시 당신을 왕비로 삼을 겁니다.’
과거 어린 아크의 목소리가 기네비어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이 고백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잘 꾸며낸 거짓. 애초에 아크는 자신보다 한 수 위였을지도 모른다. 순수한 척, 진심인 척, 권력을 노리고 접근한 자신을 역으로 유혹해 단물만 쏙 빨아먹은 후 내쳤다. 그래, 사실은 릴리의 말이 맞았다.
나는 아크에게 속았다.
의식의 흐름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해내자, 기네비어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어쩐지 속이 후련했다. 답은 나와 있었는데 왜 계속 미련을 가졌을까? 아크의 곁에서 맴돌며 그가 다시 돌아봐 주기를 기다린 과거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이제 두 번 다시 당하지 않으리라.
“……좋다, 암살자여.”
기네비어는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금 그녀가 가장 불타듯 느끼는 감정. 그것은 증오였다. 복수하고 싶었다. 자신을 이렇게 망쳐버린 그와 그녀에게.
“다만 내게도 조건이 있다.”
아크의 마법에서 풀려난 기네비어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권력을 좇는 독사로 돌아왔다.
*
관문을 공격하던 보호트군이 물러났다. 만일 관문을 무너뜨린다고 해도 엠파이어가 어비스의 손안에 넘어간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답이었다.
보호트군이 레드킵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로드는 유니벨과 관문을 지키던 병력들을 엠파이어로 불러들여 쉬게 하고, 새로이 쌩쌩한 병력 2천을 뽑아 관문으로 보냈다.
그날 밤, 로드의 방에서는 간만에 로드와 베아트리체, 유니벨 세 사람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자, 자, 이것 봐. 유니벨.”
로드가 활짝 웃는 얼굴로 드레스를 펼쳤다.
“엠파이어 시내에서 내가 직접 골라 온 거야!”
침대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빨간 머리의 소녀는 로드의 드레스를 힐긋 보더니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아하하. 별로야? 그럼 이건 어때?”
로드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작은 케이스를 꺼내 내밀었다. 그 안에는 루비가 박혀있고 겉을 금으로 정교하게 세공한 목걸이가 있었다.
“빨강색이라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자, 내가 껴줄…….”
유니벨은 시선만 움직여 목걸이를 보았다가 ‘흥’하고 콧방귀를 꼈다.
‘으으으, 이 쪼그만 게 다루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제대로 삐쳐버린 모양이었다.
원인은 유니벨을 관문에 내버려두고 방치한 것. 그리고 그녀가 관문에서 보호트군을 막아내며 고생하는 사이 로드는 베아트리체랑 같이 수도에서 편안히 쉬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는 것. 정도로 보였다.
“……미안해, 유니벨. 하지만 너도 알잖아. 네가 싫어서 부르지 않은 게 아니라, 네가 관문에서 빠져나가면 전력이 급감하니까. 그 빈틈을 보호트가 언제 노릴지 모르니 어쩔 수 없었어.”
유니벨은 이제야 시선을 되돌려 로드를 보았다. 여전히 불만을 표시하는 특유의 제스처인 팔짱은 풀지 않았지만.
“그러면 내가 관문에 있을 때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양해를 구하던가!”
“……윽!”
“아니면 최소한 수정구로 연락은 해보던가! 그냥 대충 전령 한 명 보내서 ‘유니벨 장군은 관문에서 대기하시오.’ 하고 네 할 말만 전하면 다야? 앙? 대기하시오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건 통신구의 마력을 아껴야 하니까…….”
로드는 살벌한 진홍색 눈동자를 보고 재빨리 말을 멈췄다. 논리적으로 나와 봐야 그녀의 화를 더 키울 뿐이었다. 어찌됐건 그녀에게 신경 쓰지 못하다가 오늘 부랴부랴 선물을 준비한 건 사실이었다.
“……그럼 이건 어때?”
로드가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한 고급스러운 와인병을 하나 꺼냈다.
“아크 녀석의 와인 저장고에 있더라고. 이 나라에도 딱 한 병 밖에 없는 건데 괜찮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니벨이 홱 와인병을 채갔다. 그리곤 거침없이 코르크마개를 제거하고는 병나발을 불었다. 꼴깍. 꼴깍. 액체가 연신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반쯤 와인이 사라진 즈음에야 병을 입에서 땐 그녀가 ‘캬아’ 하는 추임새를 넣었다. 아저씨가 따로 없었다.
“흥! 딸꾹! 이런 걸로 용서해 주는 건 절대로 아니니까!”
“그래, 그래. 천천히 좀 마셔. 여기 어딘가 안주도 챙겨왔었는데……”
로드가 와인에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가져온 포장지에 쌓인 치즈 덩어리를 꺼냈다.
“우붑.”
“깜짝이야!”
침대에서 자는 줄 알았던 베아트리체가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귀신같이 나타나 치즈를 입에 물었다. 벌써 치즈의 절반이 그녀의 입으로 들어갔다. 오물거리던 그녀가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는지 다시 입을 벌렸다.
“꺅! 뭐하는 거야? 리체! 그거 내거야!”
유니벨이 달려들어 치즈를 사수했다. 베아트리체가 침대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치즈를 입에 물고 떨어지지 않았다. 두 소녀가 뒤엉켜 노는 모습을 보며 로드는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지었다. 후후, 내 가신들이지만 참으로 귀엽다.
“……응?”
그때 통신 수정구의 연결음이 들렸다. 로드가 수정구를 꺼내들어 작동시키자 애니록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 애니! 무사해?”
“애니가 아니라 애니록스입니다! 비월장군이 지키는 퍼들스퀘어에서 간이 정보부를 차렸습니다.”
“잘 됐네. 비월이 버텨줘서 한 시름 덜었다니까. 보고할 일 있어?”
“네, 중요한 사안입니다.”
애니록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로드의 표정은 시시각각 바뀌어갔다. 기뻐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경악하기도 하고,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뭐야, 누구야?”
술기운에 해롱해롱한 유니벨이 로드의 다리위로 올라와 배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 변태 가르마다!”
“……유니벨.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방해하지 마.”
“애 취급하지 말라고오! 나도 재정관이라고오!”
그렇게 칭얼거리며 로드의 다리를 주먹으로 툭툭 치는 모습은 철없는 애 그 자체였다. 로드가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옆으로 치웠다.
“어쩔 수 없지. 100% 확답은 못하지만 일단은 알겠다고 전해줘. 응.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 그리고 우리의 제안을 특히 강조하고. 응, 그래.”
아슬아슬하게 수정구의 마력이 바닥나며 연락이 끊겼다.
“변태 가르마랑 무슨 이야기 했어?”
유니벨이 물었다.
“기네비어가 우리에게 협력해 주겠대.”
“아, 그 건이야?”
유니벨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꼭 그 여자 밖에 없는 거야? 우리 수인군을 전멸시킨 책사라며.”
“…그런 불만은 내가 감수해야할 부분이겠지. 하지만 국지전에서 일어난 일로 전쟁의 흐름을 뒤바꿀만한 중대한 찬스를 놓칠 수는 없었어.”
“……흐응.”
그녀는 눕는 자세를 바꿔서 로드의 다리를 베게 삼아 뒷머리를 기댔다.
“그래서 네가 한 제안은? 빈말로 스파이 노릇 해달라고 할 수는 없을 거 아냐.”
“전쟁이 끝나면 엠파이어와 북부를 다스리는 대영주로 임명하기로 했어.”
“그건 우리가 제안한 내용일거고, 그거 외에 그 여자가 제안한 걸 묻는 거야.”
로드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술기운이 올라와 있어도 상인의 예리한 직감은 살아있는 듯 했다.
“……흠, 흠.”
“뭘 그렇게 망설여?”
“내 왕비가 되겠다는데.”
뚝.
방 안에 깊은 정적이 일었다. 두 소녀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로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으아아아앙, 주인니임!”
베아트리체가 대뜸 울음을 터뜨리며 로드의 품에 와락 안겼다.
“베, 베아야?”
“주인님은 안대요오!”
“……팬더야.”
머리카락처럼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유니벨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말했다.
“그럼 일단은 알겠다고 한 게 혼인 제안이었어?”
“아, 아니! 100% 확답은 못한다고 했…….”
“너 진짜 재정신이야! 어? 이게 그렇게 막 정할 일이냐고오오!”
앞에서는 유니벨이 빽 빽 소리를 질러댔고, 품에 안긴 베아트리체는 엉엉 울고 있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거 이브랑 이야기 된 거야? 아니겠지. 또 막 저지르는 거겠지! 다른 사람 마음은 생각 하나도 안하고! 그리고 너는 명색이 왕이면서 무슨 혼인을 마구간 종말 마냥 하라는 대로 다 하는 거야? 너 진짜 대가리 빈 거 아니야?”
“……아, 아니 확답은 아니라고 했잖아! 거절할 명분은 만들어 놨고, 또 섭외가 가장 중요하니까 일단 예스라고 답하고 보는 게… 야, 잠깐! 잠깐! 그걸 한 번에 다 마시면 어떻게 해?”
유니벨은 독한 와인 한 병을 전부 비운 후 병을 휙 던졌다. 그리곤 아까보다 더욱 새빨개진 얼굴로 로드를 노려보았다.
“야이, 나쁜 놈의 새끼야! 딸꾹!”
“……일 났다.”
로드가 이마를 탁 짚었다.
============================ 작품 후기 ============================
토론토너 / 리아가 누구더라... 아, 티아인가요! 곧 나올듯 합니다.
책읽는고래 / 응? 선물이요??
알테니아 / 빰빠카빰?
Dd1010 / 어비스 나라 능력 갑툭튀;
류미연 / 어비스를 상대하는 입장에선 섬짓하겠네요 ㅋㅋ
왜이리들다재밌지 / 부작용이 나오고 있죠 ㅋㅋ
ppk12 / 주인공이 악당이라니! 이 악당!
토노와나나야 / 실로 악의 무리 어비스;
그래프트 / 그런 방법도 좋지요! 아마 기네비어가 거절하면 그 수를 썼겠지만 여기선 기네비어가 협력해주니 이용하는 방법으로 갑니다.
spadel / 아, 원래 비월파셨군요! ㄷㄷ 예상하신대로 기네비어는 로드에게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대가는 예상하신것과 조금 다르...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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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콤MK / 정답, 오오!
니알라토텝 / 그때의 폭주화 말렉은 A급 수준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인재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감합니닷
...(-1)... / 아크 < 노진구 였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마무리는 기승전 비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