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1 대국의 사정 =========================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앙? 옛날 생각 안 나지? 흑익 사무실에 와서 질질 짜면서 도와달라고 할 땐 언제고! 딸꾹!”
“……질질 짜지는 않았는데.”
“주인니이이임!”
“……다들 좀 진정해. 아니, 그리고 남의 결혼에 너희들이 왜 이렇게 난리야!”
발끈한 표정의 유니벨이 자리에서 튀어 올라 로드의 멱살을 붙잡았다.
“왜 이렇게 난리냐고? 그런 괘씸한 소릴 지껄이고 있는데 난리가 안 나게 생겼어? 멍청한 헛소리가 나오는 주둥이는 요 주둥이냐아!”
말끝이 약간은 꼬부라졌지만 유니벨은 나름대로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면서, 마찬가지로 강렬하게 취기가 오른 목소리는 향긋한 와인향을 머금고 있었다.
“엉엉! 주인니임! 버리지 말아주세요오!”
그리고 아래에선 로드의 다리에 매미 유충마냥 매달린 베아트리체가 엉엉 통곡을 하고 있었으니, 로드는 정신이 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만, 둘 다 그만해! 확정을 내린 게 아니야. 단순히 상대방에서 내건 조건일 뿐이란 말이라고!”
“그래, 그래, 남자란 새끼들은 다들 그렇지, 끄윽!”
유니벨은 로드의 말을 듣지도 않고 베아트리체를 인형처럼 끌어안은채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 다 줄 것처럼 아가리 털면서, 막상 손에 넣으면 먹다 남은 반찬처럼 구석에 처박아 두는 게 남자 새끼 들이지! ……내 팔자야! 내가 뭐가 못나서 이런 얼간이 말에 넘어가서!”
유니벨은 로드의 가슴에 정의의 철권을 한방 때려준 후 퍼질러 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로드의 안타까운 모습을 본 신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 듯 했다. 그렇게 울던 베아트리체는 금세 지쳐 잠이 들었고, 당장이라도 사방에 마력탄을 난사할 것 같던 유니벨의 고함소리 또한 줄어들어갔다.
‘……내가 두 번 다시 유니벨에게 술을 주면 사람도 아니다.’
로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잠든 베아트리체를 안아 들어 베개 위에 제대로 눕혔다. 그리곤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유니벨의 옆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로드는 컵에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내 걱정 해준 거지?”
로드는 꿀떡꿀떡 물 마시고 있는 유니벨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아이취급 하냐며 성깔 부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얌전하게 있어 주었다. 입술을 축인 그녀가 로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팬더.”
“왜?”
“이유가 어쨌든 그 여자의 제안을 생각해보겠다고 한 건…… 결국 마음이 있단 거잖아?”
“무슨 소리야. 난 아직 그녀의 얼굴도 본적 없는데.”
로드가 양팔로 머리 뒤를 받치며 말을 이었다.
“기네비어도 정말로 내가 혼인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고 던지는 제안은 아닐거야. 받아들이면 좋은 거고, 그렇지 않아도 그에 준하는 대가를 내게 받아낼 여지가 생기는 거니 좋고. 그녀 입장에선 손해 볼게 없는 거지.”
“……흥, 상인은 절대 그런 모호한 거래 안하거든.”
“하하! 이건 돈 문제가 아니라 정치니깐. 그리고 내가 무턱대고 아무나 붙잡고 막 결혼할 사람으로 보여?”
유니벨은 취기가 돈 얼굴로 씩 웃었다.
“하긴, 그런 출렁출렁 아줌마들 보다는 애새끼들에게 발정하는 종마지.”
“……꼭 말을 해도.”
로드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픽 흘렸다.
“야, 팬더. 끅. 그렇게 부정할거면 여기서 제대로 말해봐. 네 이상형은 뭔데?“
“…응?”
“이상형! 이 삘딱아! 끄으… 아, 자꾸 헛기침이 나오네. 한 번 말하면 못 알아 처먹어?”
로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나랑 마음 맞고 편한 사람이면 괜찮지 않을까.”
“미친놈.”
거의 동시에 나온 대답이었다.
“그럼 결국 그 여자도 좋다는 거잖아! 처음 본 년도 편하면 죄다 업어 갈 거야? 완전 줏대 없는 호래자식 아니야? 이거!”
로드는 탐탁찮은 표정으로 구수한 욕설을 내뱉고 있는 상대를 보았다. 말해달래서 기껏 말해줬더니 돌아오는 건 이런 반응이라니.
“좋아, 그러는 넌? 우리 대단하신 재정관 님들 데려가려면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하는데?”
갑작스런 로드의 반격에 유니벨이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이상형 질문이잖아. 아까 네가 먼저 물었던 거거든.”
유니벨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좌우로 안절부절 흔들리던 눈동자의 주인은 이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이미 술에 취해서 빨간 상태라 별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아, 몰라아! 잘 거야!”
곧 과부하 상태가 왔는지 그렇게 소리쳐 버린 그녀는 로드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는 이불을 덮어 몸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여기 내 방인데.”
“……엿 먹어!”
이불속에서 귀엽게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잘 자라.”
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불을 꺼주었다. 조금 시끌벅적해도 로드는 이런 일상을 계속,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었다.
*
카사르 진형, 언더하임.
“오오, 폐하!”
“폐하가 오셨다!”
언더하임 요새를 보수하고 있던 병사들이 아크를 알아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아크는 기꺼이 병사들과 어울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오, 그래, 자네로군!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존입니다! 저는 폐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섭섭합니다!”
주위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크도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미안, 미안. 전쟁이 끝나면 엠파이어 왕궁에 찾아와. 여기 왕궁은 뭐가 하나도 없어서.”
“그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릴리는 보좌관으로 따라와 있었다. 아크의 곁에서 예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의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크는 너무 인기가 많았다. 몇몇 그에게 반하는 구기사들을 제외하면 백성이든 병사들이든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아크는 관중들에게 사랑받는 방법을 알고 있는 천성 정치인이었다.
릴리는 아크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의 남자이기 이전에 이 나라 백성들의 왕이었다. 앞으로는 대륙민 전체가 우러러보는 황제가 될 사람이기도 했다. 릴리도 그 점은 이해해줄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녀가 절대로 용납 못하는 것이 있었다.
“릴리 양. 왜 그래?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크.”
보수 현장을 한 바퀴 돌아본 두 사람은 모래먼지에 흠뻑 젖은 채로 왕궁으로 들어왔다.
“…여긴 원래 모래바람이 이렇게 심한가 몰라. 좀처럼 그치질 않네.”
아크가 투덜거리며 옷을 탈탈 털었다.
“재킷 이리 주세요. 세탁해놓을 테니까요.”
“아, 고마워.”
겉옷을 건넨 아크가 릴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역시 난 너밖에 없어.”
“저도요.”
“이렇게 예쁘고 착한데 사람들이 알아주질 않는다니깐. 네가 자꾸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니까 그렇잖아.”
릴리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아크의 어깨을 가볍게 툭 쳤다.
“그, 그런 적 없다니까요!”
“하하하하!”
눈에 힘을 주어 서운함을 표현한 릴리는 이번엔 자신 쪽에서 입술을 먼저 훔쳤다. 그렇게 한참을 몰입해 있다가 아크가 먼저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먼저 가볼게. 원로들을 만나기로 했거든.”
“언제나 바쁘네요. 아크는.”
“전쟁 중이니까.”
“이해해요.”
릴리는 적어도 아크의 앞에선 사려 깊고 헌신적인 연인이었다. 아크의 명령이라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신이기도 했다. 아크도 그녀의 그런 헌신적인 면모를 높게 평가했다. 신뢰가 가고 어떤 일이 생겨도 기꺼이 자신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아크가 가장 필요로 하는 타입의 영웅이었다.
“그럼.”
“다녀와요.”
아크가 떠나고 릴리는 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상냥했던 그녀의 얼굴이 차갑고 냉정한 낯빛으로 바뀌었다. 핑크빛 생각들이 사라지고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찬 것은, 이번에 함정에 걸린 기네비어를 어떻게 죽여 버릴까에 대한 것이었다. ‘아크의 약혼자’라는 그 빌어먹을 타이틀을 가진 여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현재 릴 리가 가진 가장 큰 관심사였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여자들이 아크를 남자로서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 없었다. 아크는 오롯이 자신의 것이어야 했으니까.
‘……?’
그녀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멈칫했다. 개인 공간은 항상 자물쇠로 잠가놓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자물쇠가 부러져 있었다.
‘침입자.’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사람을 부를까 했지만, 침입자는 이미 목적을 이루고 방에서 빠져나갔을 것이다. 암살자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자물쇠를 부숴둔 채 방치하여 상대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에.
릴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반에는 그녀가 엠파이어에서 가져온 각종 독극물들로 가득했다. 그 용도는 말할 것도 없이 아크에게 다가오는 숙적들의 제거였다. 그러나 침입자의 목표가 독은 아니었는지 모두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릴리는 자신의 책상의자에 놓여있는 봉투를 발견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봉투를 들어 올려 보았다. 알처럼 둥근 뭔가가 잔뜩 들어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봉투의 내용물을 전부 책상에 쏟아보았다.
투투투툭.
그 둥근 것들은 전부 소형 ‘메모리얼 수정구’였다. 크기가 작은 만큼 오래 작동하지는 못하지만, 일반형보다 몸에 숨기는 게 용이해서 스파이들이 자주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이었다.
‘누구지? 내 스파이들에게 영상을 찍어오라고 말해둔 적은 없는데.’
그녀는 방문을 걸어 잠근 다음 메모리얼 수정구 하나를 작동시켜 보았다.
“……!”
릴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크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폐하! 폐하! 이제 어디로 가실 거예요?”
“여기선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누가 듣겠다.”
“헤헤헷!”
아크는 옆구리에 여자를 끼고 있었다. 게다가 갑옷차림이라면 전쟁 중에 일어난 일, 그리고 저곳은 레드킵이었다. 바로 최근의 일이었다.
‘……정말이었단 거야? 날 퍼들스퀘어로 보낸 이유가…….’
두 사람이 함께 여관에 들어가는 것으로 영상은 종료되었다. 릴리는 격분하여 수정구를 집어 던졌다. 와장창창! 벽에 부딪쳐 수정구가 산산조각 났지만 씩씩 거리는 그녀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럼 설마 저게 전부?’
릴리는 눈이 돌아가서 다음 수정구를 켰다.
“……폐하.”
“그래.”
이번에도 여자와 함께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일개 잡녀가 아닌 카사르의 왕실의 가신, 바로 베디베어였다. 두 사람은 연인처럼 유치한 장난을 치고 있었고, 아크는 가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아…아아아……!”
영상의 베디베어가 부끄러운 듯 미소 짓는 모습에 릴리는 구역질이 차올랐다. 그녀의 몸이 바닥에 주르륵 무너져 내렸다.
아직 수정구는 아홉 개나 더 남아 있었다.
============================ 작품 후기 ============================
악랄한 짓은 다하고 다니는 어비스님들; 믿기 힘들지만 주인공 나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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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바름 / 첩이야 둘 수 있겠지만 정실이 누군지에 대한 경쟁이 치열할것으로;
학교만12년째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나 못하는 그 루트를;
알테니아 / 역시 비월파;;
은아준 / 몸으로 말하는 하렘 ㄷㄷ
모두의칭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할레데임 / 기네비어에게도 쥔공의 플래그를?
밤하늘에뜬별 / 비월은 수확된 상태지 않나욥?
로리콤MK / ㅋㅋㅋㅋㅋㅋ 그러게요 감정증폭이 은근히 만능이네요!
니알라토텝 / 솔로몬이 판결만 공평한줄 알았더디 사실은 천명의 여자에게 공평히;; 의자왕 저리가라네요
spadel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리콘한테 미시를 먹인다니 ㅋㅋㅋㅋㅋㅋ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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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고래 / 쿠폰 요긴하게 감사히 쓰겠습니다!
@...(-1)... / 마무리는 비월 여왕등극! ㅋㅋㅋㅋㅋㅋ
@육식곰 /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벌레 / ㅋㅋㅋㅋㅋ 일편단심 가웨인이시군요! 으아아앙 고민이 많습니다
@최카츄 / 소녀젠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