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2 쥐덫 =========================
카사르군이 언더하임에 주둔한지 며칠 시간이 더 흘렀고, 문제점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았다.
이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 언더하임에서는 비 외에 물을 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근방에 강이 흘렀다고 전해지는 곳은 진작 말라붙었고, 로드가 언더하임을 떠날 때 식량 창고를 비우며 동시에 영지 곳곳에 있던 우물들 또한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뜨려 놓아서 우물 활용도 힘들었다.
보급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이대로 가면 식수가 모자랄 것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이거야 원, 별게 다 신경 쓰이게 하네.’
아크는 언더하임을 차지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레드킵과 영지 근방에서 식량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 적의 영지에서 싸울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보급로의 차단으로 인한 식량부족이다. 빈틈이 없는 성격의 아크는 1만 대군도 거뜬히 먹일 수 있는 양의 식량을 넉넉히 챙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상치 못한 부분에 있었다.
통상적으로 군에서 병량부대를 꾸릴 때 짐마차에 식량을 위주로 싣지, 무거운 물을 수백 수천 통씩 일일이 싣고 다니지는 않는다. 물은 대륙에 지천에 깔려있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자원이었으니까. 비가 한 번 오면 며칠을 버틸 수 있는 양의 물을 마련할 수 있다. 주위의 하천이나 호수에 가도 된다.
하지만 아크가 언더하임을 차지한 뒤 이상할지만큼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어비스의 영토들이 소우지(小雨地)로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대륙의 평균보다는 강수량이 낮은 편이기는 했지만 비는 내릴 만큼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만 비가 내려도 물이 금방 빠져버리는 지질적 특성 때문에 황무지가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카사르 측에서도 어비스를 상대할 때에 평소와 같은 병량부대를 꾸렸다.
그런데 카사르군이 주둔한 이후,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뜨거운 햇볕만이 내리쬐고, 모래바람이 끊임없이 불어 닥칠 뿐이었다.
설마 이게 로드의 전략일까? 아크는 잠시 의심해 보았으니 곧 스스로 고개를 내저었다. 식수부족만을 노리는 수법이라면 성립되기 힘들었다. 이 큰 대도시에서 물구할 곳이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고, 단순하게 생각해도 한번이라도 비가 내리면 그 전략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아크는 영지 운영의 문제라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은 대비책을 세워두기로 했다. 아크는 결전을 벌이기에 앞서 괜한 변수 때문에 발목 잡히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언더하임으로 보낼 군량과 식수를 마련하도록 하라.”
아크의 지시는 전 영토에서 식량과 식수를 언더하임으로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카사르 본토, 그리고 언더하임에서 비교적 가까운 알란드, 오펙투스, 알브헤임, 게노세르크의 영토등에 주둔해 있던 카사르군이 각 영지에서 군량을 모아 언더하임으로 보낼 군량부대를 편성했다.
각 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군량이 모이기 시작한다는 소식은 로드에게도 발 빠르게 전해졌다.
“…음, 역시 그렇게 나왔군? 아크 녀석이라면 뭐가 문제인지 바로 눈치 챘겠지.”
아크의 강점은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그 무대로 상대를 불러들여 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크에 의해 평탄화된 무대가 전장이 된다면, 사실상 아크는 무적에 가까웠다. 철두철미하고 빈틈없는 전략으로 다소 느리지만 완벽하게 승리를 거머쥐어 왔다.
‘…나 같은 건 금방 나가떨어지겠지.’
그래서 로드가 쓰는 방법은 아크의 무대에서 싸우는 게 아닌, 아크를 함께 진흙탕을 끌어내리고 그 엉망진창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전쟁 초반에는 아크의 의도대로 끌려 다니는 그림이었으나 로드가 ‘수도 교환’을 유도하는 강수를 둬서 지금의 상황까지 만들었다. 이번 일로 로드는 전략의 가닥을 확실히 정할 수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뿐이야. 아크가 하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철저하게 박살내서, 아크가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혼전으로 끌어들이는 것.’
“…폐하! 우린 어떻게 할까요?”
통신 수정구로 통화중이던 애니록스가 지시를 내려달라고 하자 로드가 입을 열었다.
“그 녀석들을 쓰자고.”
며칠 후, 아크의 명령대로 각 영지에서 만든 군량부대 행렬이 언더하임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로드의 덫이 발동되었다.
“알브헤임에서 넘어오던 상단 행렬이 용병단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고용자는 알 수 없습니다!”
“중부에 산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히그마 산적단도 있습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알란드 영토의 곡창지대가 외국 도적들에 의해 불타고 있습니다!”
“중립 상단으로 둔갑하여 보낸 군량들이 전부 중간에 약탈을……!”
병량부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카사르 진형에 속속 전해졌다. 어비스에 충성하는 군세들이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 언더하임으로 오는 군량을 차단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들의 정체는 주로 언더하임의 클랜장들이 이끄는 무리들이었다.
메넬라오스의 용병길드.
조폭클랜.
어비스 도둑 협회.
히그마 산적단.
망자 연구회.
다크엘프 연합, 하이네의 검.
이들 모두 어비스 의회에 소속되어있으며, 어비스의 성장과 함께 대륙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들이었다. 로드는 클랜장들에게 언더하임을 지키라고 명하는 대신 영외로 보내 숨어있도록 했다. 그리고 아크가 언더하임을 점령한 후 그곳으로 향하는 병량부대를 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언더하임의 자금줄을 조달하는 ‘흑익’과 ‘밀매상 조합’이 언더하임으로 자원이 향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중립 상인들을 압박했다. 유나이티드가 멸망해버린 후 이들은 암시장을 넘어서 일반 상인들의 세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클랜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은 다름 아닌.
“오홍홍홍! 죽여! 모두 죽여버리세용!”
바로 이때를 위해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던 스카 파치노와 마피아들이었다. 스카 파치노는 2000명의 정규병을 이끌고 있는 어비스군의 정식 군대였다. 그들은 주로 서부의 알란드, 오펙투스의 영토를 돌아다니면서 활동했으며 카사르 정규군을 힘으로 제압해버리고 식량을 탈취했다.
‘……흠, 그래. 역시 진짜는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던 거지? 로드 군.’
보고를 들은 아크는 고민이 깊어졌다. 잔 병력들뿐만 아니라 적의 정규군 2천명이 점령지 영토에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으니 군량을 호위하는 부대 몇 백이 붙어도 대책이 없었다. 아크도 이에 대처하기위해 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릴리, 네가 군을 이끌고 가줄래?”
아크가 그렇게 말했으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릴리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아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또 저를 보내시려는 건가요?”
왠지 모르겠지만 원망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그녀의 성격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당황한 아크는 그녀를 달래면서 다른 가신들을 슥 훑어보았다.
“이번 일은 가웨인 경에게 맡기겠습니다. 휘하 2천을 이끌고 스카 파치노군을 말살시킨 다음, 보급로를 재 확보 해주세요.”
“예.”
가웨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에서 사라졌다. 유난히 쌀쌀맞은 느낌이었다. 자신을 탐탁찮게 여기는 것은 알았지만 저렇게 티를 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가신들에게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었지만 아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으니 전쟁 중이라 민감해 졌을 것이라는 정도로 여길 뿐이었다.
그렇게 언더하임에 주둔하는 동안, 탄탄했던 아크의 진영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
며칠이 더 흘렀다. 아크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곳곳에 숨어있는 어비스의 군대가 병량부대를 언더하임 근처로 넘어오기도 전에 차단해버리니, 언더하임에서 마중 나갈 구원군을 보내놓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전쟁은 벌써 시작됐군.’
아크는 지금까지 병량부대가 공격받은 지점을 지도에 표시해보았다. 그러자 중앙 언더하임을 기점으로 둥글게 원이 그려졌다. 마치 멀리서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들은 한 곳에서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으니 병력을 보내 토벌하는 것도 어려웠고, 정규군을 만나면 뿔뿔이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아크가 가웨인군을 보내보았지만 스카 파치노군은 이미 완전히 자리를 뜬 뒤여서 별 소득 없이 돌아왔다.
‘이대로 마냥 비가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어.’
아크는 어떻게든 언더하임에서 물을 채취할 방법을 고심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래 언더하임에서 식수를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큰 수단은 지하수였다. 본래는 영지 내에 수백 개에 달하는 우물이 있어 깨끗한 지하수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물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있는 상황이었다.
“지하수가 흐르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가 우물을 만들면 되잖아!”
아크가 보수 감독관에게 우물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으니 감독관은 난색을 표했다.
“소인이 살펴보니 지반 깊은 곳에 지하수가 있습니다. 우물을 파려면 중간에 거치는 단단한 기반암을 깨야 합니다만, 암석을 깨고 그곳까지 우물을 파내는 건 카사르의 기술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어비스는 되는데 카사르가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송구하옵니다만, 애초에 어비스 측 또한 인간이 우물을 판 게 아닙니다.”
“그럼 누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인족들 중에 두더지 수인들이 우물작업을 도맡아서 했나 보더군요. 그들 정도가 아니면 단시간에 언더하임의 지반을 뚫고 우물을 파는 건 무립니다.”
아크는 뒤늦게 영지 내에 두더지 수인이 있는지 살폈지만 행방은 묘연했다.
‘……로드가 빼돌렸겠지. 이제야 가닥이 잡히는군.’
역시 로드가 얌전히 수도 패널티를 받고 있을 리는 없었다. ‘수도 교환’이후 언더하임을 되찾을 계획을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설마 설마 했지만…….’
로드는 정말로 언더하임에 주둔한 1만 카사르군을 말려죽일 셈이었다. 그것도 식량 부족이 아닌, 물 부족으로.
============================ 작품 후기 ============================
ㅈㅂㄱㄱㅇ / 잘보고 가셨군요. 감사합니다!
최카츄 / 곧 나올 겁니다! ^^
Gneji / 와장창!
포크님 / ㄲㄲㄲ!
rltjsrla / 크으;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앞서 집안을 다스려야 하건만!
할레데임 / 사실 대륙의 모두가 그렇죠 ㅠㅠ
天空意行劍 /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네요. 그냥 원래 그런게 어비스죠.
벌레 / 협잘질 암살과 가웨인은 전혀 안어울리는데요! ㅋㅋ
학교만12년째 / 믿고 맡겨 주시면 배우자의 바람을 포착해 드립니다!
llSongOfBladell / 슬로우 필드라고, 마력의 흐름을 느려지게 하는 능력입니다. 유니벨의 탄환도 이걸로 막아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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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콤MK / 메모리얼 수정구는 어떠한 마력적 조작이 불가능하답니다 ㄷㄷ;
@spadel / 전략 미연시;; 무시무시한 팩트폭격이네요. 그리고 마무리는 기승전 기월!
@니알라토텝 / 무시무시하군요. 인간 여성을 넘어서 마신들까지... (응?
@...(-1)... / 그 이상 소녀에게 술을 주면 안돼에에
@뿡뿡뽀옹 / ㅋㅋㅋㅋㅋ 아크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네요. 쿠폰 감사합니다!
@레이아니 / 수도를 준 이유가 사실 그런 이유도 있죠! 원래 로드의 구역이다보니 접근이 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