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3 쥐덫 =========================
드디어 로드가 움직였다.
그가 이끄는 본군 1만 중에, 3천을 관문과 엠파이어의 수비병으로 주둔시키고, 나머지 7천을 이끌고 내려왔다. 이번에도 보호트가 지키고 있는 레드킵을 지나쳐 언더하임으로 직행할 생각이었다.
이에 대응하는 아크는 언더하임의 방어체계를 자신의 스타일로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가 주둔한 시간은 짧았지만, 언더하임은 피닉스가 지키고 있을 때 보다 더 까다로운 요새가 되어 있었다.
아크는 전투에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성검’도 보유하고 있었기에 악마 리리스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식수였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가지 추가적인 계획을 짰다.
“준비 중인 병량부대 중에서, 대량의 식수를 가장 많이 확보할 수 있는 부대를 조사해.”
아크는 전 게노세르크의 거점영지 중 하나인 ‘발트라켄’을 계획의 시작지로 낙점하였다.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어 대륙에서 식수가 가장 풍부한 영지였다. 아크는 이곳에서 퍼 나른 대량의 호수 물로 병량부대를 꾸리고, 작업이 완료되면 다른 어비스군이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대군을 파견해 데려올 생각이었다.
5천을 언더하임에 두고, 주력 5천을 보내는 과감한 전략.
식수만 언더하임에 들어오면 몇 달이고 버틸 수 있었다. 아크의 계획은 어비스의 스파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극비로 이루어졌고 그 진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자, 서둘러라!”
카사르 측의 주둔군 오백 명이 발트라켄에 파견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위에 살고 있던 민간인들에게 전시 동원령을 명목으로 노역을 부과했다. 호수 물을 퍼서 나무통을 채우고 짐마차에 나르는 작업이 계속 되었다.
“얼마나 남았지?”
병량부대의 책임자인 보급관이 젊은 병사에게 물었다.
“저희가 가져온 짐마차 이백 대 중에서 백오십 대는 채웠습니다요.”
“……오늘 밤이면 다 끝나겠군. 우리는 짐마차를 이끌고 발트호른으로 돌아갔다가, 주력군이 오면 함께 언더하임으로 올라갈 것이다.”
병사가 그 말을 들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쇤네는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요. 쇤네도 이 바닥에선 잔뼈 좀 굵다고 자부하지만 식량도 아니고 물만 이렇게 많이 싣는 짓거리는 처음입습죠.”
“……나도 그렇다. 듣자하니 언더하임에 물이 부족하다더군.”
보급관의 대답에 병사의 눈이 커졌다.
“엥? 물이 부족해봐야 얼마나 부족하다고 호수 물을 이렇게 대량으로…… 더 이해가 안 되는뎁쇼.”
“되었다. 우리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대로 하면 그만이다.”
짜악! 짝!
“거기 빨리 빨리 안 움직여?”
날카로운 채찍소리가 들렸다. 카사르군 병사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노역자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채찍에 맞아 쓰러진 노역자들은 황급히 쓰린 몸을 이끌고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날 때 까지 맞았다. 이 과정에서 물이든나무통을 떨어뜨린 자들에게는 다시 잔혹한 매질이 퍼부어졌다.
“나으리. 궁금한 게 있습니다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젊은 병사가 보급관에게 말을 걸었다.
“허허, 또 시작이군. 좋다, 물어 보거라.”
사실 보급관은 이 젊은 수다쟁이 병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장교 출신이 아닌데도 그 어려운 보급업무를 체계적으로 척척 처리해주어서 상당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아직 제안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앞으로도 이 유능한 병사를 부관격으로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저기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나, 물통을 나르는 노동자나, 똑같은 평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저런 관계가 되었을 깝쇼?”
이번에도 괴이한 질문. 이 수다쟁이 병사는 같이 일하는 도중 몇 번이고 저런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그렇지만 보급관도 작업 감독이 지루하던 찰나라 여흥삼아 대답해 주었다.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쇤네는 무식해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요.”
“네 말대로 저들 간의 절대적인 차이는 없을 것이다. 평시에는 두 쪽 다 농기구를 들고 밭을 갈았을 것이야. 하지만 한 쪽은 승자의 국민이고, 다른 한쪽은 패자의 국민이다. 한 쪽은 지시받은 작업을 마쳐야하고, 다른 한 쪽은 강제 노역 때문에 억지로 불려왔지. 두 사람간의 차이는 소속 집단의 차이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느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느냐와 같은 것이야. 이 대륙에서는 본질보다 배경이 더 중요하다.”
“…….”
병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역시 ‘승리’가 우선일깝쇼?”
“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군.”
“아, 별거 아닙니다요. 실은 쇤네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죠.”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와 쓰러진 노역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일단 승리를 거머쥐어야만 이후의 안위도 있다고 생각했고, 쇤네는 당장 민초가 겪어야 할 고충에 눈이 갔습니다. 의견이 갈렸지요. 한쪽은 승리를 우선시 하고 다른 한쪽은 안정을 우선시 했을 뿐, 사실 두 쪽 모두 목표는 같았습니다.”
촌티 풀풀 나던 수다쟁이 병사의 목소리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제 목표는 대륙의 신분제를 뿌리 뽑는 겁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그 망할 시스템 때문에 대륙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돌아다니다보니 과연, 신분제만 악이 아니더군요. ‘압제’의 방식은 이 세상 사람들의 숫자만큼 다양한 것을. 우리들은 영원히 투쟁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다가가자 채찍 휘두르던 병사가 멈추고 돌아보았다.
“…넌 뭐야? 방해하지 말고 비켜!”
“알고 있습니다, 나으리. 이 투쟁이 저의 세대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제 목숨 하나 바쳐서 끝날 일이 아님을. 한 계단씩 차근차근 밟아나가야겠지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가 검을 뽑아들더니 순식간에 채찍 휘두르던 병사의 목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히 날렸다.
보급관이 경악하여 외쳤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수다쟁이 병사가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투쟁하는 중입니다.”
그때 뒤쪽에서 산천을 뒤흔드는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사르군이 보인다!”
“공격하라!”
“오오오오오오오!”
한 무리의 무장한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자유 혁명단 놈들이다아아!”
댕! 댕! 전투를 알리는 타악기 소리가 울려 펴졌다. 보급관은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자유 혁명단이라면 중립 세력임을 공표한 자들이 아닌가, 이제 와서 급습이라니!
“역시 어비스와 한통속이었나, 이 비열한 것들!”
“나으리.”
병사가 말했다. 그는 어느새 가발을 벗어 던지고, 붉은 코팅이 된 안경을 쓰며 보급관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소리를 내뱉든 간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당신들의 몫이었습니다. 중립 세력이든 뭐든 무시하고 쓸어버릴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당신들은 당장 어비스군과 사활을 건 전투를 앞두고 있었기에 귀찮은 일은 피하자는 주의였겠죠.”
“……어떻게 네놈이 그걸!”
“당신들은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먼저 공격해 오진 않을 것이라는 이상적인 이미지를 멋대로 우리에게 투영했을 뿐입니다. 우리에 대한 경계를 풀면 모든 게 편해지니까요.”
“……네놈은 대체 누구냐!”
보급관의 물음에 병사가 검을 가슴위로 굳게 세우며 말했다.
“민초의 검이자 의지. 자유 혁명단의 벤 블레그덴이라 합니다.”
“날 속였구나! 이놈!”
보급관이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차캉! 두 사람이 검을 맞대고 그 사이로 시선이 부딪쳤다.
“나으리께서 주신 가르침. 가슴속에 잘 새기겠습니다.”
“……또 무슨 소릴!”
“수업비로 살려드리고는 싶지만 당신도 기사였죠?”
붉은 안경을 쓴 벤의 눈에서 소름끼치는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씹어죽일 귀족이군요.”
맞대고 있던 보급관의 검이 깡! 소리가 나며 밀려났다. 그가 다시 검을 바로잡는 것보다, 벤의 검이 어깨를 파고들어 상체를 가르는 것이 더 빨랐다. 보급관은 그대로 절명했다.
“형제들이여!”
벤이 폭풍처럼 밀려드는 혁명군들을 향해 소리쳤다.
“검을 들어 압제에 저항하고 자유를 되찾자!”
“오오오오오!”
전투가 시작되었고, 승패는 불 보듯 뻔했다. 사기가 오른 2천의 혁명군들이 고립된 3백의 병사들을 쓰러트리는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혁명군들 모두 강력한 마력의 보조 효과를 받고 있었다.
혁명군들을 지휘하던 벤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로즈안느와 그녀의 부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로즈안느 장군.”
스펠뮤직 연주를 멈춘 로즈안느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이전 전투에서 로즈안느군은 전멸했지만, 지휘부의 인물들은 로사리움 병사들의 활약으로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참모 코퍼는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은 베틀린시티에 들어왔고, 그곳에서 벤과 만나 합류하게 된 것이다.
“혁명단장을 그만두셨다고 들었는데… 우리를 계속 도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어비스에 들어온 이후, 저는 하나의 생각에 입각하여 행동하고 있습니다.”
벤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최선이 없다면 차악을 택하라. 이미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부분이지요.”
“……?”
로즈안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왕인 로드가 자신이 차악임을 동의했단 말인가? 대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곳에서 아크의 계책을 무너뜨린 후엔 바로 언더하임으로 가실 겁니까?”
뒤쪽에 서있던 부장의 물음에 벤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더 있습니다.”
“……어떤?”
“우선 발트호른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곳은 서부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 영지, 카사르군이 차지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위그드라실에 갇혀 있는 티아 그란디네 님을 구하러 가야겠죠. 그 분의 군세까지 합류하는 순간, 비로소 폐하의 계획이 완성될 겁니다.”
“알겠어요.”
벤은 고개를 돌려 걸어가며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티아 군사님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진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와; 이를 어쩌죠 ㅠㅠ 동시 연재중인 모 플랫폼에서 추석연휴라고 원고 15일치를 미리 보내라고 하는데 ㅋㅋㅋㅋㅋ 하루 한편 올리는것도 이리 힘든데 어쩌나 싶습니다. 멘탈 와장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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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니아 / 원고료는 감사히 받겠사옵니다! 허나 이번에피소드에 비월 파트가 통으로 들어갔는데 아직도 모자르시다는 겁니까아 ;ㅅ; 끄앙
ㅊㅂㄱ / 으음, 전투는 말 그대로 창칼이 오가는 게 전투니까 이 상황에선 전쟁이 더 맞지 않을까요?
MoriyaSuwako / 말려죽이는게 말 그대로 말려 죽이는 ㅋㅋㅋ
책읽는고래 / 언제나 감사합니다
왜이리들다재밌지 / :-[ 귀여워...!
칠채환옥 / 그렇군요. 더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아크가 활약할 여지를 로드가 주지 않고있습니다. 아크는 평탄한 상황에서 변수없이 전쟁을 풀어나가는 스타일이고 직접적인 전쟁에서 강점을 보이는데, 로드는 그냥 지금껏 전투를 계속 피하면서 모략계만 잽처럼 툭툭 가하고 있는 형국이니까 아크가 당하고만 있는것처럼 보이는거죠.
Gneji / 힐하고 때리기...! 그 위험한 고문을!
天空意行劍 / 기우제 시스템은 없답니다 ㅠㅠ 그냥 하늘에 명복을 빌어볼수는 있겠지요.
박성빈 / ㅋㅋㅋㅋㅋ 그렇네요. 현실이라면 로드같은 리더보단 아크같은 리더가 훨씬 더 성공할 스타일이기도 하구요.
에프론 / 칠무산 히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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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콤MK / 실홥니다. 물론 막 모든 여자와 노닥거리고 애인 노릇 한 건 아니지만 다른 여자와 곁에 있는 모습을 보인것 만으로도 릴리의 멘탈은 파사삭
@spadel / 본편에 나오겠지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기후조작은 아니고 기후상황을 읽고 그에 따라 움직인거죠. 에덴에는 지역마다 특수한 기후들이 있는데 언더하임의 경우, 모래바람철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기승전 비월 ㅠㅠ
@니알라토텝 / 주신급까지 털다니; 솔로몬 당신은 대체...
@...(-1)...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앗! 비밀스러운 -1님의 나이를 알 수 있는 이번 코멘트!
@레이아니 / 그렇죠. 아크라는 사람에 대해 완전히 파고들어 활용한 로드가 모략으로 우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