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4 쥐덫 =========================
“폐하. 백성들의 안위가 있는 다음에야 튼튼한 안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백성을 지켜야할 왕이 병사들을 모두 이끌고 왕도를 떠나시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카사르군에게 고충을 겪고 있을 서부 영지의 백성들은요!”
“아까 말했다시피 언더하임의 영지민들은 피난시킬 거야. 그리고 벤. 지금은 전쟁 중이다. 모두를 구하려는 건 욕심이고 자칫하다간 모두를 잃게 될지도 몰라. 가능성이 있는 길이 있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해.”
서로를 노려보며 잠시 말이 없던 벤과 로드는 동시에 한숨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 너와 의견이 안 맞은 적은 처음인데.”
로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아마 이번엔 피차 물러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벤이 말했다.
“그럼 이번엔 네가 양보하는 게 어때? 내 체면 좀 세워주라.”
“싫습니다.”
“…….”
뭐 이런 막무가내가 다 있던 말인가. 당혹스러워서 화를 내는 대신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좋아. 너는 백성들의 안전을, 나는 암울한 상황을 뒤엎을 승산을. 두 쪽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니 서로 지키고 싶은걸 지키도록 하자고.”
“결국 엠파이어에 가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대신 네게 백성들을 지킬 병력을 두고 가겠어.”
벤이 의외인 듯 눈을 크게 떴다.
“……진심이십니까? 적의 수도를 치는데 병력의 수가 적으면 이도저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완강하게 나오니까 어쩔 수 없잖아.”
로드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 로드를 빤히 바라보던 벤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폐하께서는 가장 쉬운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으시는군요.”
“응? 그게 뭔데?”
“왕명에 불복하는 제 목을 베어 버리고, 폐하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는 선택지입니다.”
“……이봐, 내가 무슨 폭군도 아니고.”
로드가 두 팔로 머리 뒤를 받치며 말했다.
“그리고 널 잃는 건 내게 있어 최악의 선택지야.”
벤은 묘한 미소를 흘렸다.
“폐하는 무섭습니다.”
“……또 뭐래.”
“제가 가진 확고한 가치관을 뒤흔드는 분이라 그러합니다. 폐하도 몰락 가문이긴 하지만 귀족 출신이라 하셨지요?”
로드는 원래 로드 폴렌티아의 과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귀족의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 이런 마인드를 가질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폐하는 보면 볼수록 마치…… 다른 차원의 존재 같다고나 할까요.”
로드는 마음속으로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엉뚱하단 소리는 자주 듣는 편이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가 벤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서로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도록 하지요.”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천이면 되겠어?”
“병력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제 나름의 계획이 떠올랐으니까요.”
벤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났다. 그리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가신들이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응?”
그가 팔을 위로 올리는 준비 자세를 취하더니, 냅다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정녕 백성들을 버릴 생각이십니까!”
“……?”
로드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픽 미소를 흘렸다.
‘……이 녀석 좀 보게.’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 간에는 합의가 끝나 있었다. 로드도 목을 가다듬고는 목청을 높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문 뒤의 가신들과 메이드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실컷 싸워댔다. 이후 벤은 집무실을 뛰쳐나오며 혁명단장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의외긴 했지만, 로드는 벤을 믿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정보부로 하여금 널리 퍼져 나가도록했다.
중립을 표방하는 자유 혁명단.
백성을 저버린 로드에게 실망하여 어비스를 뛰쳐나온 벤 블레그덴이 세운 조직. 국가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중립세력. 배경과 동기는 그럴듯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사르측 고위 기사들은 의심의 눈초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쾌재를 불렀다. ‘이게 다 로드 폴렌티아가 자초한 일이다’, ‘그러게 부하 관리 잘했어야지.’ 다들 생각지 못한 행운에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자유 혁명단이 카사르의 공격을 받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엠파이어를 차지해버리는 로드의 파격적인 행보덕분이었다. 그래서 아크는 제1 지침을 언더하임 공략으로 정했고, 기사들은 ‘어비스를 상대하기도 바쁘니 저런 중립 세력은 그냥 내버려두자.’ 라는 결론을 내렸다. 괜히 나서서 벌집을 들쑤실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자유 혁명단은 그들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 숨겨진 비수였다.
*
발트라켄을 평정하여 아크의 중요한 식수 보충 계획을 무너뜨린 벤은 이어서 아군 병사들에게 카사르군의 갑옷과 군복을 입도록 했다. 그리고 짐마차에 빈 통을 잔뜩 싣고 발트호른으로 향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들은 발트호른에 도착했다. 성벽 위에 있던 경비들이 용무를 물었을 때, 벤은 완벽한 카사르군 연기를 선보였다. 이틀 전에 발트라켄으로 향한 병량부대라고 밝히며 왕명을 수행하러 왔다고 전했다. 벤이 왕명을 부르짖으며 재촉하자, 경비들도 딱히 의심할거리가 없었기에 성문을 열었다. 이틀 전에 병량부대가 발트라켄으로 떠난 것도, 식수를 가져오기로 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성문을 통과해 영내에 들어오자마자, 병사들은 돌변했다.
위장한 혁명군들이 공격하기 시작했고, 짐마차에 숨어있던 로즈안느군 또한 뛰쳐나와 날뛰었다. 이미 300명의 수비 병력을 보낸 터라 발트호른의 주둔 병력은 별 볼일 없었고, 큰 힘들이지 않고 영지를 재패할 수 있었다. 성 위에는 카사르의 깃발이 내려가고, 어비스와 혁명단의 깃발이 동시에 올라갔다.
“……이거 큰 신세를 졌소.”
감옥에 갇혀있던 대영주, 반인반마의 케이론이 풀려나 벤과 로즈안느에게 감사를 표했다.
“우리는 바로 다음 작전을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영지의 안정화는 맡겨도 되겠지요?”
“물론이오, 그거야 내 특기이니.”
케이론의 시선이 로즈안느에게로 향했다.
“특히 베틀린 측에게는 큰 빚을 졌소.”
“아, 아니에요.”
로즈안느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에겐 여전히 케이론은 어려운 사람이었다.
“거, 잘 아셔서 다행이군!”
그때 로즈안느의 옆에 있던 부장이 치고 들어왔다.
“그쪽 수인군이 상대를 제대로 맡았더라면 우리까지 허무하게 패전당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오라버니! 그만하세요!”
“그 말은 사실이오. 그래서 큰 빚을 졌다고 한 것이오.”
케이론이 덤덤하게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다시 나란히 협상 테이블에 나란히 앉을 때가 온다면 이 빚은 반드시 갚겠소. 그리고 다른 걸 모두 떠나서 그동안 베틀린을 무시했던 우리의 무례에 대해 사과하고 싶소.”
케이론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그대들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소.”
“……케이론 님.”
베틀린은 게노세르크에게 왕실을 잃고 멸망당했다. 그 때문인지 수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특구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 베틀린은 강군인 가웨인군을 상대로 그 능력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때 벤이 끼어들었다.
“여기서 그런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풀면 하루 밤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합니다. 그리고 케이론 님. 전투가 가능한 수인군을 편성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케이론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말했다.
“……지금 발트호른의 사정으로는 무리겠지만, 내가 산에 올라가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소. 야생 수인들 1천명 정도는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르오.”
“설득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들은 인간의 문명과 동떨어진 야인이 아닙니까?”
“…해내야지요. 통합 어비스의 일원으로서 민폐만 끼친 격이오. 어떻게든 수인의 체면을 바로 잡겠소.”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와 로즈안느 님은 바로 티아 님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
발트호른을 차지한 뒤, 자유혁명단 2천명과 베틀린시티의 병력 1천이 합쳐져 도합 3천의 병력은 그 길로 바로 위그드라실이 있는 엘프의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세계수의 밑동에 진을 친 ‘제레인트’의 병력들이 빈틈없이 세계수를 포위하고 있었다.
벤은 통신수정구로 티아에게 연락하여 자신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린 후, 모든 병력으로 제레인트군의 등을 총공격했다.
제레인트군의 화력은 전방에 집중되어 있었고, 적이 뒤에서 나타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를 찌른 공격에 병사들이 당황하는 사이, 티아의 병력들까지 일제히 세계수를 달려 내려왔다.
제레인트군은 거의 두 배가 넘는 병력들에게 앞뒤로 공격당하는 꼴이 되었다. 난전 끝에 전의가 꺾인 병사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낙승이었다.
“이거 놓아라! 놔!”
“가만히 좀 있어!”
두 팔이 결박된 제레인트가 몸부림치며 끌려왔다. 그녀를 붙잡아온 부장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제레인트를 본 벤이 휘파람을 불었다.
“카사르군의 장군입니까? 이거 예상치 못한 거물을 낚았군요.”
“……이이익! 차라리 죽여라아! 이놈들!”
“아, 가만히 있으래도!”
부장이 뒤로 묶인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로 힘을 주다가 잘못해서 장갑을 벗겼다.
“꺄아아아아악!”
제레인트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기사의 체면도 내던진 채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방금 저분께 무슨 짓을…….”
로즈안느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부장을 노려보았다.
“아무 짓도 안했습니다!”
부장은 맹렬하게 고갯짓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제레인트는 연신 ‘죽여라!’를 외치고 있었다.
“죽여라! 이 변태 새끼들아아! 차라리 그냥 좀 죽여줘! 엉엉!”
“아,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사람 오해받게!”
그때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티아가 백마를 타고 도착했다. 모두가 고개 숙여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군사님.”
“다들 오랜만이니라.”
멋들어지게 백마에서 내린 그녀가 헝클어진 금발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부장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침을 꼴깍 삼켰다.
‘와, 미친. 뭐 저리 아름다운 엘프가 다 있냐?’
‘정신 차려요, 오라버니!’
티아는 목 놓아 울고 있는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적장 제레인트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주공은 인재를 좋아하지. 혹시 모르니 위그드라실의 감옥에 가두어 두겠노라.”
티아가 손짓하자 세이지가드들이 와서 제레인트를 일으켜 데려갔다. 그리고는 벤과 로즈안느를 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공이 언더하임으로 온다고 하여 슬슬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그대들이 와서 병사들을 더욱 아낄 수 있었느니라.”
“죄송해요, 군사님.”
로즈안느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저희가 전투에서 지는 바람에 군사님께 폐를…….”
“아니다. 본녀가 좀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대의 병사들이 전멸당할 일도 없었을 터인데.”
재회한 그녀들이 전투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티아와 눈을 마주쳤다.
“지원에 감사하노라.”
“아닙니다.”
티아는 딱히 벤에게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다. 그래서 벤은 더 의아함이 들었다. 그는 단장 자리를 버리고 나가 제3의 세력을 세운 일종의 ‘반역자’로 알려져 있었다.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묻지 않으십니까?”
“본녀는 눈치 채고 있었느니라.”
티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적을 속이기 위해 아군을 먼저 속이는 건 주공이 흔히 쓰는 방법이지.”
“…그렇군요.”
“그럼 이제 우리도 출발하겠노라.”
벤이 티아군까지 해방시킴으로서, 어비스 세력의 병력은 더욱 늘어났다.
벤의 자유혁명군 2천, 티아에게 1천을 더 받아 2천을 만든 로즈안느군, 그리고 2천의 티아군. 이렇게 세 개의 군세가 재편되었다. 여기에 야생 수인군 1천이 추가되어 한 루트를 막아줄 것이다.
초전에 요격 명령을 받고 내려갔다가 카사르군에 패배했던 후방 군세들이 다시 일어나 남쪽을 커버하게 된 것이다. 로드에게는 아주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여기에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는 로드의 본군 7천 병력.
서쪽을 틀어막은 2천의 스카 파치노군.
그리고 그물처럼 촘촘히 배치된 클랜장들의 군세까지.
어비스의 모든 전력들이 언더하임을 둘러싸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갈갈 당하지 않으려 아침일찍부터 도서관에 가서 빡글을 해보았습니다. 사실 나도 막상 일이 닥치면 하루에 다섯편씩 뽑아낼 수 있을지도?
결과 : 오늘 분량 한편 씀.
전 틀렸어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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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니아 / 비월... 최대한 등장시키도록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흑흑
텍틱스 / ㅋㅋㅋㅋㅋ 몰아보면 속은 편하죠. 즐감되셨기를!
로리콤MK / 로드가 판만 짜주면 아이들이 척척!
이엑제이 / 저뿐만 아니라 플랫폼 일괄 요구라 따질수도 없고 ㅠㅠ 다른 방법을 강구해봐야 겠군요 하;
小羽 / 각이보입니다 자살각이요!
火炎無 / 갈갈갈갈갈갈
니알라토텝 / 좋은 방법이네요; 휴재는 피할수 없을것 같은데 15일 중에서 몇일치를 쓸수있느냐에 따라 방법을 정해봐야겠습니다;
...(-1)... / 으, 응? 아닌가요? p.s : 우리 비월양 많이 나왔잖아욧! 빽!
재범 / 명복을 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후
이루미엘 / 그저 웁니다 엉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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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158 / 채찍맞으면서 쓰면 15편 가능할까요? 찰싹!찰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