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5 쥐덫 =========================
“추정 병력만 17000명이라고?”
“예, 폐하.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전령의 보고를 들은 아크는 압박감이 코앞으로 훅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인정할 수밖에, 이번 공격은 뼈아팠어.’
당장 언더하임에 주둔해 있는 아크의 병력은 1만 정도였다. 이번 벤 블레그덴의 활약으로 어비스군은 확실히 수의 우위를 가져갔다.
하지만 아크는 아직까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질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카사르의 병사들이 우위였고, 시간이 지나면 그 차이는 계속해서 벌어질 터였다. 또한 언더하임을 끼고 싸우는 수성전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언제든지 들어와 봐. 로드 군.’
아크는 자신의 ‘수성’에 자신이 있었다. 도시에 남은 광물을 녹여 만든 수백 통의 끓인 쇳물과, 요소요소에 설치하여 성벽을 올라오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고정 병기, 별동대 구성 및 시가전 대책까지 완벽히 세워두었다.
그러나.
어비스군은 공성 자체를 걸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언더하임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야영지를 세우고, 위치를 하루에 한번 씩 바꿔가며 언더하임으로 들어오는 보급만을 차단하고 있었다.
기껏 수성 준비를 완벽하게 마쳐놓고 기다리고 있던 아크는 허탈감을 금치 못했다.
‘……흐, 조금도 내 뜻대로 움직여주진 않겠다는 거지?’
아크라도 이번 로드의 수법엔 약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수성전을 대비했더니 대놓고 청야전술(淸野戰術)로 나온 것이다. 우위의 병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급만 끊어먹고 있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봐. 나도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으니.’
로드와 아크, 두 플레이어 모두 수도 패널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장기전 양상이 세워졌다. 유일한 변수는 ‘비’뿐이었다.
두 사람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
“……입안이 쩍쩍 달라붙는군.”
“아, 목말라! 물 한 모금만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다!”
언더하임에서는 병사들의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내리쬐는 땡볕에 성벽 위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근무를 서야 했지만, 빠져나가는 땀에 비해 물을 마시지 못해 스트레스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크에게도 이 불만이 보고되었지만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참아야 한다. 로드 쪽에서 먼저 공격해올 때까지. 혹은 비가 내려줄 때까지.’
인내력의 싸움이었다. 누가 버티지 못하고 공세로 돌아서느냐.
그러나 수동적인 전략은 언제나 휘하 부하들의 불만이 뒤따라오기 마련이었다. 회의를 할때마다 기사들 사이에서 공세를 취하자는 의견이 많이 나왔으나, 아크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적을 요격하러 나갔다가 역으로 적에게 둘러싸여 당할 위험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아크가 거절의 의사를 밝히니 몇몇 기사들 중에서 불만의 찬 얼굴들이 보였다.
‘……역시, 내 권위도 예전 같지 않아. 수도 패널티가 적용되고 있군.’
그래도 아크는 가신들과 병사들의 불만이 커지려고 할 때마다 유연하게 잘 대처했다. 중간 중간 술과 고기를 풀기도 했고, 테라광산에서 정찰병들을 보내 동굴수를 찾아내기도 했다. 곧 지하 수맥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의도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목이 너무 말랐던 병사 하나가 왕궁창고로 숨어들어와 물을 훔쳐 마신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나, 근처를 지나던 부관급 기사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고 격분한 그는 병사를 도시 한복판에 끌고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 시켜버렸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기사는 군율을 지엄하게 지킨 자신에게 칭찬이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으나 아크의 반응은 냉담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예?”
“굳이 도시 한복판에서 처형시킬 필요가 있었냔 말이다.”
“폐하! 다름 아닌 왕실의 물건을 도둑질 한 자이옵니다! 모두의 본보기가 되도록 조치한 것뿐인데……!”
아크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일한 식수를 왕궁에 보관하고 분배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여러 병사들이 불만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기의 조치는 기름에 불을 붙은 격이었다.
‘우리는 땡볕에 하루 종일 성벽위에 서있는데, 귀족들만 실내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있다!’
‘귀족들은 매일 마시면서 병사가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이 그렇게 잘못이냐!’
공통된 공감대를 형성한 병사들의 분노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자, 아크는 역으로 그 기사에게 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책임을 물어 기사 작위를 빼앗고 일반병으로 강등시켜 병사들의 군막으로 내쫓았다. 그날 밤, 그 기사는 돌에 얻어맞아 너덜너덜해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희생으로는 이 들끓는 분노를 완전히 잠재우지 못했다.
여론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다들 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왜 전쟁은 하지 않고 이 지옥 같은 곳에 갇혀 있어야 하느냐!’ ‘대체 윗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등등. 병사들은 격한 불만을 터뜨렸다. 평상시 아크의 인기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적인 승리의 상징이었던 아크의 이름이 지금은 병사들의 입에 욕설과 함께 오르내리고 있었다.
성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크는 입맛이 썼다.
‘……쯧. 확실히 패널티의 영향이 커. 왕의 권위와 지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야.’
아크는 로드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수도 패널티로 인해 로드의 권위와 지지도가 급감하면 저렇게 대규모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할 수 있는 상황은 오래가지 못할 터였다. 권위로 이루어진 군대는 곧 뿔뿔이 흩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로드는 언더하임이라는 좁은 영지안에 1만 대군을 통제해야 하는 아크와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로드가 직접 이끄는 병력들은 자신이 데려온 본군의 절반뿐, 그 외에 각종 클랜군과 혁명단, 로즈안느군, 수인군, 티아군까지 모두 지휘관의 재량에 맡겼다.
“할 일은 하나뿐이야. 각자 맡은 위치에서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버티다가, 집합의 기가 올라가면 모일 것. 그 외에 모든 행동은 자율이다.”
로드는 큰 틀의 규칙을 세워놓고 모두에게 자율 행동을 부과하여 제장들과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을 썼다. 애초에 로드 자체가 충성을 강요하기 보다는 널널한 스타일이었고, 그러한 성향은 수도 패널티로 왕의 지지도가 내려가는 이 순간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아크는 악화되는 여론에도 꿋꿋이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왕궁 복도를 걸어가고 있던 아크에게 최근에 유난히 차갑게 굴던 릴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크. 이야기 좀 해요.”
아크는 재빨리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그래? 릴리 양. 혹시 내게 화난 게 있으면…….”
“그 문제가 아니에요. 군사로서 조언을 드리고 싶어요.”
아크의 얼굴에 있던 장난기도 사라졌다. 그녀가 더없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해봐.”
“언더하임에 있어도 득을 볼 것이 없는데, 왜 계속 여기에 있는 거죠?”
“…….”
아크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릴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가 서적을 조사해봤더니 언더하임의 모래바람 철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해요. 로드 폴렌티아는 이 사실을 알고 시간을 맞춰서 출전한거예요. 우리가 비가 내리지 않는 시기의 언더하임에 들어올 수 있도록. 비가 오려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 텐데 그때까지 버틸 물이 없어요.”
“……나도 알아.”
“병사들의 스트레스는 극도로 높아져 있고, 컨디션도 나날이 줄어들고 있어요. 아크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까지. 이런 상황인데 왜 돌아가지 않는 거죠? 탈출은 충분히 가능해요. 어비스의 포위망은 광범위할 정도로 넓게 퍼져있으니 우리가 전속력으로 한 방향으로만 뛰어도 그들은 우릴 포위하지 못해요. 일점돌파로 포위는 간단히 뚫릴 거예요.”
“……나도 알고 있어!”
아크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정확히는, 로드 군은 전쟁을 할 생각 자체가 없어! 우리더러 제 발로 언더하임을 나가라고 강요하고 있는 거라고!”
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그렇게까지 분통을 터뜨릴 일인가요? 모든 상황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뿐이에요. 로드 폴렌티아가 엠파이어에 주둔시킨 병력은 고작 3천. 우리의 대군이라면 충분히 수도를 수복할 수 있어요. 서로 수도를 빼앗기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거야. 릴리 양.’
아크 자신의 생각대로 전투가 진행된 것은 전반부 뿐. 이때 그는 어비스의 방대한 영지를 절반 이상 차지하는 압도적인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로드는 조금도 아크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레드킵에서 완벽한 방비를 하고 기다렸더니, 로드는 레드킵을 무시하고 엠파이어로 직행했다. 그리고 이번엔 언더하임에서 방비를 하고 기다렸더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급만 차단하는 청야전술로 나왔다. 마치 본토로 돌아가라고 압박하는 듯이.
아크는 이 모든 게 짜증이 났다. 로드는 자신이 자멸할 때까지 이런 식으로 나올게 틀림없었다.
‘수도 교환이후 다시 수도의 원상복귀라……. 웃기지도 않아.’
서로의 병력은 유지한 채 수도만을 다시 서로에게서 돌려받는다. 얼핏 생각하면 별 손해가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 상황을 로드가 유도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틀림없이 로드의 노림수가 있을 것이고, 아크는 그 노림수를 엠파이어에 두고 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혁명단.’
아크가 알고 있는 혁명단 시스템의 가장 기본적인 골자는 어비스 소유의 영토에 혁명 사상을 심어놓고, 타국 세력이 다시 영토를 수복했을 때 내부에서 반란과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로드는 틀림없이 엠파이어에 혁명 바이러스를 뿌려놓았을 것이다. 그동안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자신만을 바라보며 지지해주던 수도의 백성들이 혁명 사상에 오염되어 등을 돌리게 됐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크는 분통이 터졌다. 이제는 엠파이어도 안전하지 않다. 사방에 적이 깔린 것이나 다름없다.
통제 불가능하며 배신의 여지가 있는 아군은 아크가 가장 싫어하는 요소였다. 그리고 그런 꼴을 보지 않기 위해 언더하임을 차지한 채로 버텨서 엠파이어에 있을 혁명단의 힘을 빼놓으려 한 것이다.
이대로 로드의 의도대로 넘어가주면, 앞으로도 계속 로드에게 끌려 다닐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크. 결정을 내려야해요. 언제 올지 모를 비를 기다리며 이곳에 계속 갇혀 있을 수는 없어요.”
릴리가 재촉하듯 말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아크는 그녀를 지나쳐 걸어가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 작품 후기 ============================
고통받는 아크. 사실 이번편은 수성측의 노고의 아주 일부분만 묘사했네요. 원래는 성 안에 갇혀서 더 길고 현실적인 곧통을 주려고 했지만(소설 남한산성 참조) 별로 재미가 없는 부분이라 빠르게 넘어가고 진도 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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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니아 / 노력은 해볼게요! 다음 에피소드에서...! (퍽) 등장시킬 각이 잘 안나오네요. 으으아;
모순의결정 / 오오오오옹!
로리콤MK / 아크 체크메이트!
밤하늘에뜬별 / 이 지적을 해주셔서 감사하네요! 이번 에피소드 자체가 로드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군들의 컨셉을 보여주고자 해서 상대적으로 주인공 시점이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ㅠㅠ 다음편 부터는 주인공 시점이 늘어날거예요.
T스톤 / 벤이 카사르 통수를 치고 스톤님이 벤의 뒤통수를...! 쿠폰 감사합니다!
왜이리들다재밌지 / 뒈짓!
책읽는고래 / 말렉, 숙부님이 그립습니다 ㅠㅠ 그분이 남아 있었다면 아크 따위!
jhl / 카사르의 전력 또한 언더하임에 집중되어 있어서 same same 이에요. 레드킵에 있는 보호트가 통수를 칠수있긴 하지만 고작 2천이라..
박성빈 / 붕떠버려쓰요!
할레데임 / 통수 어택 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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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158 / ...? 말리는 듯 하면서 채찍이라니요! 살려주...
@니알라토텝 / 오옷! 힘을 필력으로 비유하는게 너무 좋네요(?). 저도 당연히 필력을 우선시 하지만 속도파 작가들도 인기 많더라구요 ㅠㅠ
@...(-1)... / 큰그림보소; 벤이 로드의 뒤통수를 치고 비월 옹립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spadel / ㅋㅋㅋㅋㅋㅋㅋ 하루에 코멘트 세개 정도는 비월등장요구라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