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6 쥐덫 =========================
로드의 지휘관 천막.
타악. 로드의 손에 든 체스 말이 전략지도 위에 안착했다.
“자, 이걸로 완성이야.”
지도 위의 체스 말들이 언더하임을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로드가 뿌듯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외통수다. 이제 아크는 언더하임에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어.”
“……흐응.”
옆자리에 앉은 유니벨은 턱받침을 한 채 로드의 전략지도를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지만 믿기 힘드네. 정말로 팬더 따위가 아크를 몰아넣은 거야?”
“……따위라니. 이럴 때만큼은 네 잘난 주군을 좀 칭찬해 보라고.”
로드가 거들먹거리며 말하자 유니벨은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네가 아르곤 왕한테 탈탈 털려서 부들부들했을 때가 엊그제 같다, 야. 그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분해하지 않았던가?”
“……전형적인 과거 왜곡이다!”
로드가 발끈해서 말했다. 유니벨은 못들은 척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그치만, 네가 아크를 몰아넣을 정도로 똑똑이 타입은 아니었잖아. 어떻게 한 거야?”
“운이 잘 따라줬지.”
“……운? 전략을 논하는데 갑자기 웬 운?”
“예를 들어 비월이 퍼들스퀘어를 지켜내지 못했다고 생각해봐.”
그가 지도에 나와 있는 언더하임과 퍼들스퀘어에 연결 표시를 했다.
“퍼들스퀘어엔 풍부한 수량의 오아시스가 있어. 만약 카사르측이 이곳을 접수했다면 퍼들스퀘어와 언더하임 두 영지간의 커넥션이 구축되는 거니까, 물로 말려 죽이는 방법은 불가능했을 거야.”
“아, 그러셔?”
유니벨이 짐짓 눈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비월 그 여자가 잘 버텨낸 덕분이다. 이거야?”
“아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로드가 손을 내저었다.
“내가 어떤 전략을 쓸 지 고민하는 시점에 언더하임이 모래바람 철이었던 것도, 카사르의 휘하 기사들이 자유 혁명단을 신경 쓰지 않은 것도, 보급 담당인 기네비어가 스파이 역할을 기꺼이 허락해준 것도, 그리고 리리스를 이용해먹고도 맞아죽지 않은 것도, 전부 적절하게 운이 따른 덕분이라는 거지.”
“……그게 뭐야. 결국 운빨이란 소리잖아.”
유니벨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자 로드가 킥킥 웃었다.
“내가 한 일은 간단해. 내가 어떻게 움직이면 아크가 가장 싫어할까? 모든 전략은 그 물음에서부터 시작됐어. 그리고 전략을 펼쳐가는 과정에서 다가온 여러 행운들을 조합해 내가 세운 전략의 뼈대에 살을 붙이는 거야. 예를 들면, 비월이 퍼들스퀘어를 지켜줬으니까 그곳을 기점으로 정보부를 세울 수 있었고, 과감하게 말려죽이기 작전에 올인 하기로 한 거야.”
“흥, 결국 운에 기대셨단 말이네요.”
기네비어 사건 이후 유독 퉁명스럽게 구는 유니벨이었다. 로드가 손가락으로 유니벨의 뺨을 집게처럼 잡아서 입술이 불룩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우붓?!”
“헛소리가 나오는 주둥이는 요 주둥이냐!”
그녀가 와인에 취해 내뱉었던 대사였다.
“무수지시야!”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그녀가 로드의 손가락을 덥석 깨물었다. ‘아야!’ 로드가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뺐다.
“기억 안 나냐?”
“뭐, 뭐가……?”
“안 나면 됐어. 아무튼 이어서 말하자면, 한낱 인간이 짠 계획은 허점투성일 수밖에 없다는 거야. 처음 세운 전략이 계획대로 잘 흘러가라는 법은 없어. 행운이나 다른 변수가 나타나는 건 하늘의 뜻. 그 ‘우연’에 인간의 ‘계획’이 조합된 것이야 말로 내가 생각하는 완성도 높은 전략이야.”
어느새 유니벨은 진지한 얼굴로 로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아크는 그 부분에서 융통성이 다소 부족했지. 자기가 모든 상황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계획 도중에 일어나는 변수를 줄이려고만 애썼으니까. 그게 녀석의 단점. 너무 완벽하다는 점이 발목을 잡고 있는 거야.”
“……흐응.”
유니벨이 얼굴을 살짝 붉힌 채로 로드를 보았다. 로드가 왠지 소름이 끼치셔 물었다.
“……뭐냐 그 부담스러운 눈빛은.”
“아냐. 잘했다고.”
유니벨이 씨익 웃으며 주먹으로 로드의 가슴을 툭툭 쳤다. 아팠다.
“있지.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팬더는 어떻게 그렇게 아크에 대해서 잘 알아? 성격을 파악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그냥 심리를 꿰차고 있는 수준인데?”
“……한때 내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 열심히 팠지.”
“……?”
“설명하자면 길어.”
지구에서 아크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상현실 프로게이머였고, 로드 자신은 그냥 방구석 게임폐인이었다. 그때 당시의 로드는 아크의 경기 일정이라면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아무튼, 이대로 비가 쭉 오지 않아준다면 아크는 성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거야. 곧 출전할지도 모르니 한 번 더 병사들 상태를 체크해줘.”
“네에, 네에. 또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이제는 피차 척하면 척이었다. 유니벨이 일어나서 지휘관 천막 밖으로 나갔다. 로드는 홀로남아 지휘관 창을 켰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 정서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어.’
제일 먼저 확인한 곳은 하데스를 상대하는 동맹국 켈타인. 지도상에서는 거점 영지 하나를 내준 상황이지만, 역으로 적진의 깊숙한 거점영지를 차지했다. 아마 워프게이트를 활용해 적의 취약한 영지를 공격한 모양이었다. 역시 치엘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로드는 다른 먼 지역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왔구나. 세레나.’
동부도 한창 전쟁 중이었다. 어비스와 카사르가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 위기감이 들었을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둘 중 한곳에서 무난히 승자가 나오는 그림이었기에 가이아에서는 전력을 키우기 위해 숙적 에브게니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가이아의 플레이어 요한은 아르곤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이아의 병력들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세레스티나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가이아의 본토에 정박하여 수도 마사비엘을 직접 공격했다. 그녀가 어떤 전략을 사용했는지, 이번에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왔는지는 알수없었지만 마사비엘은 간단히 점령당했고 요한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어딘가에 숨어있는 모양이었다.
문화시대에 돌입하고 최신 병종들로 무장한 아르곤을 막을 수 있는 나라는 가이아, 에브게니아, 이카루스 이렇게 셋 정도였다. 그러나 이카루스는 이미 그녀에게 크게 당해서 전력을 회복하는 중이었고, 가이아와 에브게니아 두 쪽 다 전쟁으로 피해가 적지 않을 터였다. 이제 와서 세 나라가 힘을 합쳐도 과연 아르곤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역시 세레나. 타이밍하난 절묘하다니까.’
로드도 마음 같아선 아르곤의 대륙진출을 견제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카사르를 상대하기도 벅찼다. 세레스티나는 철저하게 존재감을 지우고 지내오다가 다른 강대국이 손 쓸 틈 없는 시기를 완벽히 노렸다. 아마 그녀의 역량이라면 얼마안가 동부를 모두 손에 넣을 것이다. 로드는 그때까지 카사르를 잡고 문화시대에 도달한 후, 그녀와의 결전을 준비해야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번 전투에서 승리해야 가능한 스토리지. 지금은 당장 눈앞에 닥친 전투에 집중해야 해.’
“폐하! 폐하! 정보부에서 전갈입니다!”
부관이 직접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와 소리쳤다. 로드는 지휘관 창을 닫으며 그를 보았다.
“깜짝 놀랐네. 뭔데 그래?”
“팬더! 무슨 일 있어?”
출전 준비를 하러 밖에 나갔던 유니벨도 부관을 보고는 얼른 지휘관 천막으로 뛰어 들어왔다.
“기네비어의 정보입니다! 오늘 새벽, 아크가 카사르 본토로 귀환할 것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로드가 격한 기쁨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에! 이제 집에 간다아!”
유니벨도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방방 뛰어다녔다.
“아크의 퇴각 루트는?”
“북쪽입니다. 레드킵으로 직행할 것 같습니다.”
“좋아.”
방방 뛰어다니던 유니벨이 로드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말했다.
“새끼들, 꼴좋다! 쟤들 가는 거 그냥 보내줄 생각은 아니지?”
“물론, 대가는 치르게 해야지.”
로드와 유니벨이 동시에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부관은 움찔했다. 왕과 신하는 닮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다들 준비해.”
*
이른 새벽, 아크는 1만 병력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은 드디어 이 지옥 같은 언더하임을 떠난다는 생각에 들떠있었지만 아크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본토로 돌아간다.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이대로 아무 문제없이 카사르에 들어가면, 로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언더하임을 되찾은 꼴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빚은 반드시 갚아주마.’
카사르군은 새벽바람을 맞으며 북쪽으로, 계속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어스름 속, 희미한 여명이 밝아오려는 시점에, 북쪽으로 올라가는 카사르군을 향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병력들이 있었다. 로드가 직접 이끄는 본군 5천이었다.
아크는 몰려오는 군세를 보며 이를 갈았다.
‘언더하임을 내주고 돌아가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이젠 뒤까지 물어뜯으시겠다?’
“……아크, 어떻게 하죠? 상대할까요?”
릴리의 물음에 아크는 고개를 저었다.
“저것들을 잡는 건 어렵지 않지만 우리군의 발목이 잡힌 사이 다른 어비스 병력들까지 오면 곤란해. 이쪽도 군세 하나를 보내 저들을 막아 세우고 본대를 먼저 북쪽으로 보낸다.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보호트의 지원군이 마중 나올 거야.”
“그러면 누구를 보내죠?”
사실상 결사대를 보내자는 것이었다. 아크는 가신들을 슥 둘러보다가 말했다.
“상대는 로드가 직접 이끄는 어비스의 최강군. 우리도 최강군으로 맞서야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가웨인 경.”
“…….”
가웨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사르의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휘하 2천을 이끌고 어비스군을 막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릴리는 안심 반 걱정 반의 얼굴로 아크를 보았다.
“아크. 괜찮을까요? 가웨인 경은……”
“괜찮아. 릴리 양도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잖아? 기사도와 명예에 병적으로 집착하지. 그정도면 자의식 과잉의 수준을 넘어섰어. 그녀는 목숨을 끓을지언정, 나라를 배신하지는 못해. 그런 사람이야.”
아크는 병사들 사이로 사라지는 가웨인의 마지막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실력은 확실한 인물이라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자신이 보낸 감독관을 죽인 건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반역을 저지른 그녀를 모른 척 해주며 지금까지 살려둔 이유는 바로 이런 상황에 써먹고 버리기 위함이었다.
‘바뀌지 않는다면 처분하는 게 맞겠지. 부디 온 힘을 다해 싸우다 죽어다오. 가웨인.’
*
“아, 저기 있다! 아크의 모습이 보여!”
유니벨이 손가락을 뻗으며 소리쳤다. 언덕을 내려온 로드의 병력이 카사르군의 꼬리에 따라붙었다.
“좋아. 놈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주자고.”
그런데 도망치는 카사르군의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최후방에 나열되고 있는 군세가 있었다. 로드는 거대한 푸른 깃발을 보고 그것이 가웨인의 군세라는 사실을 알았다.
‘……버림 수로군.’
로드가 주먹 쥔 팔을 들어 정지 명령을 보냈다. 양쪽 군이 서로 멈춰서며 두 군세의 거리는 불과 몇 백 미터를 남겨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뭐 하려고?”
“……그녀와 이야기해 보겠어.”
로드가 확성구슬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 옆을 베아트리체와 유니벨이 호위하듯 따라붙었다.
“가웨인 경. 로드 폴렌티아입니다. 할 말이 있습니다.”
============================ 작품 후기 ============================
성묘 크리 맞음. 다녀오겠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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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 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치얼스! 알란드에 대한 이야기는 본편에서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알란드를 다시 동맹으로 삼는것 보단 잡는게 깔끔하기는 하겠네요.
T스톤 / 이온음료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책읽는고래 / 감사감사합니다아!
spadel / 음, 아크가 언더하임에 갇혀 받는 압박보다 지금 제가 받는 압박이 더 큰듯 합니다
Gneji / 아크 군의 선택은?!
Lusia / 음, 빠르게 끝나지 않을수 있어도 아크의 결말(?)은 정해져 있으니 기대해주시길.
로리콤MK / 지금 상황을 깰수 있는 수가 하나 있죠. 비가 와주는 겁니다 (?)
Black_Rose / 헉; 이분 소름;
쿨레라군 / 그러네요. 후퇴 타이밍은 몇 번 정도 있었을 텐데 아크는 시간을 좀 더 끈 편이네요. 근데 사람이 어떻게 미련을 남기지 않고 과감한 결단을 할 수 있을까요 ㅠㅠ 위대한 지휘관들이나 가능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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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라토텝 / 음, 그러고보니 확실히 속도파분들이 휴재도 오래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긴 하네요
하치만4세 / 컨디션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긴 하네요. 음,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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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158 / 순회공연을 했더라면 또 양상이 달라졌겠네요. 하지만 아크가 언더하임을 제일 먼저 차지한 이유는 혁명단이 두려워서 입니다. ㅎㅎ;
@...(-1)... / 오오오! 로드야 드디어 네가 해냈구나! 적어도 로드 > 아크 인것 같다!
@알테니아 / ㅠㅠ 엉앙! 비월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할 수는 없잖아요 ;ㅅ; 노력은 하겠습니다! 노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