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7 쥐덫 =========================
로드가 할 말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 몇 분이 지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는 풀플레이트 아머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부장으로부터 확성구슬을 받았다.
“소장을 찾았다고 들었소, 타국의 왕이여. 무슨 할 말이 있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겠지요. 아크는 당신을 버렸습니다.”
가웨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확성구슬을 투구 가까이에 댔다.
“……그렇다고 한들 그쪽과는 관계없는 일이오.”
“왜 당신을 버린 주인을 위해 아까운 목숨을 바치려고 하는 겁니까?”
“그것이 도리이기 때문이오. 소장은 기사가 되면서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소.”
로드는 확성구슬을 입에서 때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과연 고결한 기사. 정보에 따르면 아크가 그녀에게 행한 짓들은 온갖 정이 다 떨어질 만큼 잔혹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도 아크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고 있었다.
“야, 팬더. 저런 꼴통 기사들한테는 무슨 소리를 해도 안 먹혀. 그냥 빨리 쓸어버리고 아크를 뒤쫓는 게 나아.”
유니벨이 옆에서 핀잔을 주었다.
“…주인님. 명령을.”
베아트리체도 칼자루를 쥔 채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로드는 말없이 가웨인군을 바라보았다.
‘……글쎄, 쟤들을 힘으로 뚫고 가는 건 정말 피하고 싶은데.’
그녀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었다. 악에 받친 카사르 최고 강군을 힘으로 무너뜨리는 것은 로드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밑 준비는 다 됐고, 말렉처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도 아니야. 여기서 어떻게든 설득하겠어.’
그간 스파이들로 그녀를 잘 관찰해온 로드는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크게 한숨을 쉰 그가 다시 확성구슬에 입을 대었다.
“가웨인 경. 당신이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는 ‘나라’를 정의하자면 무엇입니까?”
갑작스러운 생소한 질문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같은 영토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회집단이오.”
“그렇다면 그 사회집단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죠?”
“백성이오.”
“맞습니다. 나라를 섬긴다는 것은 백성을 섬긴다는 것과 같은데, 가웨인 경이 여기서 허무하게 개죽음을 당하는 행위는 정녕 백성들을 위한 길입니까?”
가웨인은 굳어버린 듯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왕이 나라다. 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이 없어도 나라라는 체계는 유지될 수 있지만 백성이 없고 왕만 있는 나라는 없거든요. 한번만 더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더러 죽으라고 하는 쪽은 왕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등 뒤에 있는 자들은…….”
로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웨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수년간 자신을 믿고 따라온 자들의 믿음직한 얼굴들이 보였다.
“저들이야 말로 백성이고, 나라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당신이 살기를 원합니다.”
“…….”
가웨인은 그 자리에서 못이 박힌 듯 서서 말이 없었다. 그때 부장이 다가왔다.
“어비스 왕의 말이 맞습니다! 장군. 대체 무엇 때문에 망설이십니까?”
부장은 지금까지 계속 가웨인을 설득해왔었다. 부장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입을 모았다.
“장군! 다른 사람도 아닌 장군께서 아크의 희생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크를 위해 죽는 것이 진정으로 카사르를 위한 길입니까? 장군!”
“우리와 계속 함께 해주십시오!”
구기사들과 병사들은 모두 아크에게 배척받은 낙오자들. 특히 지난번 감독관 일 이후 왕실에 대한 의리와 충성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가웨인은 투구를 벗고 모두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확성구슬을 내려놓고 이야기했다.
“…먹힐까?”
유니벨이 로드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보통사람이라면 먹혔겠지만 가웨인은 워낙 강경하니까…….”
“흐응.”
잠시 후. 이야기가 끝났는지 그녀가 로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비스의 왕은 들으시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장이 카사르의 기사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소. 그래서 그대에게 갈 수 없소.”
‘…실패인가.’
로드가 속으로 좌절하고 있는데 가웨인이 덧붙여 말했다.
“다만, 방임정도는 괜찮겠지.”
그녀가 옆으로 팔을 들어 올려 수신호를 보냈다. 처처척! 2천명의 병사들이 질서정련하게 둘로 갈라져 길을 텄다.
“소장은 아크에게 검을 겨눌 수는 없소. 아크를 지키려는 백성들에게도 검을 겨눈 꼴이 되기 때문이오. 하지만 소장과 소장의 군대는 지금부터 일체 그대를 방해하지 않겠소. 그리고 그대가 아크를 쓰러트려 준다면…….”
그녀가 미소를 보였다.
“소장은 다시 백성을 섬길 것이오.”
로드의 얼굴에 희망이 차올랐다.
“……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쪼오아!”
신이 난 유니벨이 로드의 등을 퍽! 소리 나게 쳤다.
“얼른 가자고! 아크를 잡으러!”
로드는 쓰린 등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그래, 가자.”
*
로드군이 가웨인군에 붙들려 있는 사이, 아크군은 저만치 거리를 벌렸다. 그들은 나무가 드문드문 있는 산림지형을 빠르게 통과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쪽 루트로 기어들어 와주다니.”
“……행운이네요.”
그리고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로즈안느군과 키리안군이었다. 카사르군이 북쪽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두 사람은 가장 도주할 가능성이 높은 루트에 자리를 잡고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맞은편의 키리안군에겐 어떻게 공격 신호를 주죠?”
로즈안느가 물었다.
“그냥 우리 쪽에서 시작하면 알아서 따라올 겁니다.”
“좋아요.”
카사르군 병력의 절반 정도가 통과하는 순간 그녀가 공격명령을 내렸다.
“와아아아아아아!”
요란한 함성과 함께 좌우편에서 매복하고 있던 두 개의 군세가 동시에 들이닥쳤다.
“저, 적습이다!”
“양쪽에서 온다!”
두 군세가 밀려들어 카사르군의 허리를 들이받았다. 순식간에 대열이 무너지며 진형이 반쪽으로 갈라졌다. 아주 이상적인 시작이었다.
“아크! 적의 매복이에요!”
이 모습을 본 릴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아.”
아크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그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은 채 한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릴리가 놀라서 가까이 다가왔다.
“아크? 괜찮아요?”
“하아아, 이것들이 진짜…….”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아크의 스산한 눈빛에 릴리는 움찔하며 물러났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니까 누굴 호구로 아나. 아주 개나 소나 다 덤벼들어요.”
언더하임에 있는 동안 아크는 참고 참고 또 참았다. 인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차곡차곡 쌓여있었고 매복을 당하자 기어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친 아크가 팔을 펼쳤다. 그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수들이 깃발들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래, 원한다면 상대해 줄게.”
아크의 지시가 떨어졌다. 난전중인 중앙을 제외한 머리 쪽과 꼬리 쪽의 병력들이 정확히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쌍의 날개처럼 펼쳐졌다. 병사들은 무거운 갑주를 입었지만 놀랄 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무, 무슨?’
이 모습을 지켜보던 로즈안느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상대는 대열의 허리가 양단되어 진형이 두 갈래로 갈라져버린 상황이다. 일반적인 병사들이라면 자기들끼리 얽히고 부딪치며 혼란에 빠져야 마땅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침착하게 대응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적병을 둘러싸려 하고 있었다. 매복을 당한 병사들치곤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이 완벽했다.
로즈안느 옆에서 지켜보던 부장도 혀를 내둘렀다.
‘……이게 아크인가. 적지 않은 병력을 통솔하면서 이런 움직임이 가능하다니.’
아크의 병사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깃발의 지시에 따라 철저히 움직이도록 세뇌에 가까운 훈련을 받았다. 눈앞에 자신을 죽이려는 적병이 검을 휘두르고 있어도 ‘명령’이 최우선, 명령에 조금이라도 늦은 반응을 보이면 바로 부관에 의해 목이 달아났다.
순식간에 일직선 방향으로 펼쳐진 좌우의 날개가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중앙은 난전, 그리고 방패를 앞세운 좌우의 병사들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다가오는 형국이었다. 포위망 때문에 로즈안느군과 키리안군의 병사들은 중앙으로 몰리고 있었다.
날개 포위망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공격받고 있는 카사르군 병사들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다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서로 등을 맞대고 진형을 짰다. 그리고 방패로 몸을 감싼 채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말뚝처럼 버텼다.
중앙으로 몰린 어비스군의 인파에 파묻혀 잘 보이진 않았지만 군데군데 카사르 병들의 진형이 점처럼 박혀있었다.
“어비스 녀석들, 설마 잊은 걸까나?”
아크가 신호를 보내자 중앙의 기수들이 재빨리 검은색 깃을 내리고 빨간색 깃을 올렸다.
“우리가 가진 이능을.”
중앙에서 말뚝처럼 박혀 방패만 들고 있던 기사들의 몸에 푸른 아우라가 솟구쳤다. 그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한 조가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며 사방의 적에게 검을 휘둘렀다. 이것은 마치 톱니바퀴 형태의 분쇄기들이 동시에 빙글 빙글 돌아가며 적병을 갈아버리는 것만 같았다.
“미, 밀지 마!”
“으아아아아!”
카사르의 국가고유능력중 하나인 ‘불굴의 의지’는 퇴로 없이 적에게 360도로 완전히 포위당할 시 병사들이 '광분'상태가 되어 공격력이 대폭 올라간다. 아크의 이 전술은 불굴의 의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방에서 카사르군의 날개가 포위망을 좁혀왔고, 중앙 한복판에는 인간 톱니바퀴들이 돌아갔다. 톱니바퀴에 닿은 어비스군 병사들은 언어 그대로 갈려나가고 있었다.
“……장군! 이대론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이 저쪽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네, 여기서 스펠뮤직을 사용하겠어요!”
로즈안느가 류트줄을 튕기며 연주를 시작했다.
- 삼중 연주.
- 스펠뮤직, 비창. 달밤의 우편마차.
- 스펠뮤직, 열광. 사냥꾼의 합창.
- 스펠뮤직, 회한. 초승달은 빛나고.
시작부터 비창과 열광을 깔고 회한을 덧입히는 고난이도의 삼중 연주가 발동 되었다. 요란한 쇳소리에도 그녀의 음악은 마치 병사들의 귀를 찾아가 꽂히듯 들어갔다.
‘할 수 있어. 이대로 4중주까지……!’
“위험합니다!”
부장의 외침에 그녀는 눈을 떴다. 집채만 한 시뻘건 화염 덩어리가 그녀의 앞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젠장! 숙여!”
부장이 번개처럼 달려와 그녀를 안아 들며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아아앙! 방금 그녀가 있던 자리에 화염이 떨어지며 거대한 폭발이 주위를 뒤덮었다.
“휘유.”
투수의 투구자세처럼 화염구를 던진 아크가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그의 손바닥에 회색 연기가 풀풀 나오고 있었다.
“아까 그게 스펠뮤직이란 건가? 별거 아닌데 왜 가웨인이 고전했는지 모르겠군.”
아크는 다시 지휘를 시작했다. 그의 수신호에 따라 이십 개의 깃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놈들에게 뼈저리게 알려주자고. 구차한 술책에 전쟁에선 졌을지 몰라도 전투는 우리가 이긴다는 걸.”
*
“……콜록! 콜록! 크으윽!”
부장은 콜록거리며 품에 안은 로즈안느를 보았다.
‘로즈는 기절했나.’
무리하게 착지해서 무릎이 나가고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그가 끔찍한 고통을 뒤로한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헤헤. 헤헤헤헤.”
그런데 난전 중에 이질적인 웃음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청각이 발달한 부장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머리에 검을 찬 소년이 원숭이처럼 나뭇가지 위에 쪼그려 앉아 히죽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찾았다!”
소년이 훌쩍 뛰어 지상으로 내려왔다.
“분홍색 여자. 찾았다! 헤헤. 헤. 헤헤헤.”
“……이놈은 뭐야?”
부장이 자신의 악기인 피리를 들었다. 피리 끝에서 화살모양의 마력탄이 여러 발 날아갔지만 소년은 너무나 간단하게 검을 휘둘러 쳐냈다.
“로즈안느 장군이 위험하다!”
“놈을 잡아!”
주위 병사들이 소년을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그는 병사들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순순히 기다려주다가 움직였다.
- 파동검. 육망성(六芒星).
소년의 몸이 좌우사방으로 검을 휘두르는 잔상으로 분해되었다. 여섯 방향의 검기는 그것에 닿는 병사들을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어버렸다.
‘……파동검? 설마 저 미친놈이 퍼시벌이라고?’
소년이 부장이 있는 쪽 방향으로 검을 허공에 그었다. 부장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으나, 어느새 금이 간 피리가 깨끗한 단면을 보이며 반쪽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내 판단은 쓰레기. 폐하의 판단이 옳아. 폐하는 분홍 머리를 죽이랬어. 그러니까…….”
퍼시벌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죽어도 죽일 거야.”
============================ 작품 후기 ============================
이번주도 열심히 시작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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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폴 / 합류각?
왜이리들다재밌지 / 그러네요. 점잖은 기사라는 캐릭터가 들어오면 뭔가 균형이 맞아지는 느낌이긴 하네요!
알테니아 / 엉앙 ;ㅅ; 때리지 마세요!
로리콤MK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음 먹을 반찬은 멸망보너스?!
니알라토텝 / 문.화.시.대!
ppk12 / 상당한 연상인데 하렘에 참가?!
벌레 / 아이돌 ㅋㅋㅋㅋㅋㅋ 삼십 후반부인 누님께 아이돌이라니 ㅋㅋㅋ
T스톤 / 응? 왜 아크가 권유를 하죠? ㅋㅋㅋㅋㅋㅋㅋㅋ
쿨레라군 / 음, 덕분에 여러모로 다시 상황을 보게 되네요. 아크는 언더하임이 유리한 전장이고 할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비가 내리지 않다는 것을 간파 못해서 무너지게 됐지요. 아, 한가지 저도 아크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게 뭐냐면 내편이 아니더라도 B+급 영웅을 그냥 바로 내치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결정이 아닐까요 ㅋㅋ;
그래프트 / 산화하라고 보냈는데 길 열어준 가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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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비월한정 무료임대 우주선 클라스가... 이 세계관에 프로토스를 끼얹으실 셈입니까!
@박성빈 / 최종승리 조건은 한 나라만 남는거예요. 2등 3등 플레이어들은 모두 소량의 혜택을 받게 되구요. 사실상 1위를 가리는 싸움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닷!
@최카츄 / ㅠㅠㅠ 제 잘못이 아닙니다! 모든건 로리콘인 로드 잘못입니다! 이 나쁜 로드! 로즈의 기를 죽이다니이! 그리고 작가인 저는 건전한 취향을 가지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