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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244화 (244/296)

00242 변절 =========================

베디베어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엠파이어 시내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크가 보낸 편지가 들려 있었다. 예전에 단둘이서 만났던 그 공원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아크가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폐하.”

베디베어는 평민 출신에, 몸도 작고 연약해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는, 기사라는 작위와는 전혀 거리가 먼 시골소녀였다. 하지만 아크를 만나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식료품을 사러 엠파이어에 들렸다가 우연히 도시 시찰을 하러 온 아크와 마주했고, 그는 마법처럼 그녀를 알아보고 불렀다.

‘너, 이능을 쓸 수 있지?’

놀랍게도 아크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왕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베디베어는 고유능력인 ‘슬로우필드’를 펼쳐보았다. 아크는 함박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나와 함께 가자.’

궁으로 돌아간 아크는 귀족중심의 기사제를 붕괴시켰고, 제일 먼저 베디베어를 기사의 자리에 앉혔다. 많은 구기사들이 집단 반발했지만 아크는 끝까지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녀가 왕실 가문으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예전 어비스의 퍼들스퀘어 전투에서의 활약이 컸다. 베디베어는 슬로우 필드를 펼쳐 유니벨의 폭격을 막아내는 역할을 맡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아크는 이렇게 말했다.

“그 괴물 같은 폭격을 막아내다니, 카사르의 어떤 기사들도 하지 못했을 일이야. 검이 기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오늘 멋지게 보여주었어. 이제 누구도 베디베어 양을 업신여기지 못할 거야.”

자신에게 그렇게 상냥하게 말해주고, 또 인정해준 사람은 아크밖에 없었다. 베디베어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 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들곤 했다. 아크도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최근에는 그가 이마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어, 어쩌면 좋아? 너무 떨려.’

베디베어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 쪽이 아닌 허름한 골목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크와의 만남은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했다. 초록머리의 괴물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베디베어 경, 어딜 그렇게 가요?”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던가, 베디베어는 태어나서 이렇게 놀라본 적이 없었다.

“……리, 리, 릴리경!”

악몽 속에서도 자신을 괴롭히던 바로 그 사람. 골목 구석에서 로브 차림의 릴리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 뭘 그렇게 놀라요? 나 처음 봐요? 어제도 궁에서 봐놓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겁이 좀 많아서요.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랐습니다.”

“아,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지금 어딜 가는 건가요?”

하필이면 여기서 릴리를 만나다니! 공포감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진정해야했다. 여기서 떨면 잡아먹힌다. 베디베어는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대답했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려고…….”

“아, 산책 좋죠.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대체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심장이 떨어졌을까 궁금했다. 베디베어가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아, 사실은 그게 산책도 하고…… 그 후에 약속도 있어서 따라오시는 건 곤란해요.”

“약속? 누굴 만나는데요?”

“개인적인 사정이라 말씀드리기는 좀…….”

릴리가 웃었다.

“에이, 왜 말을 못해요? 나 몰래 아크를 만나기라도 하는 건가요?”

심장의 두근거림이 절정에 달했다. 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릴리에게도 들렸을 것 같아서 불안했다.

‘……이렇게 되버린 이상 어쩔 수 없어!’

베디베어는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모두 쥐어짜내 말을 꺼냈다.

“……릴리 경. 지금 저를 심문하시는 건가요? 아무리 제1군사라고 하셔도 이건 기사의 명예를 모욕하는 처사입니다.”

“후훗.”

릴리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베디베어 양. 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

릴리가 걸어오면서 말했다.

“괜찮다면 우리가 같이 시간을 보냈던 그 공원의 벤치로 나와 줄 수 있을까?”

“……!”

베디베어는 온 몸의 소름이 확 돋았다. 릴리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했다.

“아크 더 라운드 보냄.”

“어, 어떻게 릴리 경이 그걸……!”

“사실은 그거, 내가 아크의 필체로 쓴 편지거든요.”

웃음 짓고 있던 릴리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 씹어죽일 년이!”

처억! 척! 골목길 곳곳에 숨어있던 철혈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빈틈없이 갑옷을 입고 검을 차고 있었다.

“구, 군사님!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베디베어가 놀라서 물었다.

“뭐긴 뭐겠어? 순진한 척 아크에게 꼬리 흔드는 여우에게 벌을 내리려는 거지.”

냉기가 쌩쌩 날리는 목소리로 릴리가 대답했다. 기사들이 점점 다가왔다. 베디베어는 검도 없는 외출복 차림이었다. 물론 검이 있다고 한들 정예 기사들에게 그녀가 대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죽여.”

릴리가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주, 죽이라니? 릴리는 장난으로 죽이라는 말을 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공포에 잡아먹힌 베디베어가 절박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군사님! 제발! 목숨만은, 목숨만큼은 살려주세요!”

베디베어가 체면도 잊고 목숨을 구걸했지만 릴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다가온 기사들이 그녀를 제압하여 바닥에 쓰러트렸다. 이마가 차가운 돌바닥에 닿았다. 스릉! 등 뒤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군사님 제발! 다시는 폐하의 곁에 머물지 않을게요! 아니, 엠파이어에서 떠날게요! 아예 이 나라에서 떠날 테니까 제발! 목숨만은!”

“진작 그렇게 자기 분수를 알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릴리가 악마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감정 같은 것 때문에 후환을 남기지 않는 성격이랍니다.”

푸욱! 기사의 검이 베디베어의 가슴을 관통했다. 베디베어는 ‘아.’ 하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스럽게 몸을 떨었다. 정말로 찔렀다는 사실이 믿기 힘든 듯 눈이 크게 떠 있었다.

베디베어의 몸에 서서히 떨림이 멎어가다가 이내 완전히 침묵했다. 릴리는 대수롭지 않은 듯 기사들에게 물음을 던졌다.

“예전처럼 뒤처리 수단은 준비해 뒀겠죠?”

“예, 군사님. 그녀에게 원한 관계를 가진 더미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좋아요, 빈틈없이 처리하도록 해요.”

릴리는 죽은 베디베어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속이 다 시원했다. 만약 이 편지를 보내놓고 베디베어가 오지 않았다면 살려둘 용의도 있었지만, 기어이 약속장소까지 기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릴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베디베어는 처음부터 아크에게 꼬리칠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되지, 안 돼. 아크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야.’

그 어떤 여자도 아크의 마음을 흔들 수는 없었다. 언더하임에서 본 영상들 모두가 릴리의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었다. 아크나 다른 사람들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릴리는 그날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영상에 나온 여자들은 전부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버럭 하는 목소리에, 릴리는 심장이 멎는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 아크!”

“……릴리.”

맞은편 골목 쪽에서 아크가 다가오고 있었다. 천하의 아크라도 이 장면을 보고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아크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릴리는 저것이 그가 극도로 분노했을 때 나오는 눈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분노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아크! 아니에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베디베어 경은……!”

“릴리 경.”

릴리의 입이 딱 멈췄다. 지금 자신을 뭐라고 부른 것인가? 그리고 저 딱딱한 목소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릎을 꿇어라.”

“……!”

릴리의 몸이 굴욕감으로 떨렸다. 그녀는 카사르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부하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당장!”

아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결국 잘못한건 사실이었기에 릴리는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릴리 경. 그대는 현행범이다. 왜 그녀를 죽였지?”

릴리는 고민했다. 변명을 지어내서 이 상황을 모면할 것인가? 하지만 아크가 직접 상황을 보고 말았으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아크를 원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 표독한 빛이 들었다.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아크에 대한 원망이 솟구쳤다.

“어째서죠? 아크! 제가 곁에 있었잖아요! 저만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왜 다른 여자와……!”

“나는 질문을 허한 적이 없다. 철혈기사단, 그녀를 포박하라.”

그 말에 기사들이 움찔했다. 철혈 기사단은 릴리가 직접 키운 충실한 사냥개들이었다. 그들이 주춤거리자 아크가 다시 소리쳤다.

“왕명이다!”

정신이 번쩍 든 기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두 팔을 포승줄로 묶었다.

“다시 묻겠다, 릴리 경. 최근 엠파이어 영지 곳곳에 일어났던 살인 사건. 보호트 군에게 조사해보라고 시켰더니 희생자는 모두 내가 만난 여자들이더군. 네가 벌인 짓이지?”

“……네.”

“어비스와 내통했나?”

“그건 아니에요!”

그녀가 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나는 배신자를 찾고 있다. 그리고 릴리 경은 베디베어와 내가 만난 사실까지 알고 있었지.”

“아크!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그녀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 지!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음을! 내가 당신밖에 없다는 건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잖아!”

아크는 잠시 말이 없다가 한숨을 쉬었다.

“…네 애정은 너무 비틀어졌어.”

“아크! 말해주세요! 당신은 날 사랑했나요?”

“넌 이 세계에서 만난 여자들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여자야.”

아크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왕이다. 네가 완전히 소유하고자 억지를 부리는 건 지나쳐.”

“…아크!”

“그리고 그 때문에 다른 여자 가신들을 괴롭히는 것도, 심지어는 그녀들을 죽인 것도 문제야. 넌 나를 배신했어.”

“배신한 적 없어요! 아크, 난 당신밖에 없어요!”

“내 중요한 가신을 해치고 사건을 덮으려고 한건 심각한 배신행위야.”

아크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옥에 가두어라.”

“……아크!”

멀어지는 아크의 등을 향해 그녀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외쳤다.

“당신은 아까 ‘가장 아끼는’이라고 답했어요! 하지만 내가 물어본 건 사랑이에요! 마지막으로 대답해주세요, 아크! 당신은 날 사랑했나요?”

아크가 고개만 움직여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냉정하게 대꾸했다.

“……난 이 세계의 누구도 사랑해본 적 없어.”

해일처럼 밀려오는 충격에 릴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 나쁜 개자식아아아아아!”

아크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에 아크의 심리와 과거에 대한 설명이 나올거예요. 월요일에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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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죠죠타로 / 갑자기 불쌍을 담당하는 캐릭으로;

dlstka / ㅈㅁㄱ...

책읽는고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감합니다. 수습은 정상인의 몫인데 이걸 어떻게...

알테니아 / 당근! 당근! 오랜만이다 당근송

사탕수수158 / 사십편?; 저는 초능력자가 아닙니다!

벌레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베아 인형으로 역할 급감 ㅋㅋㅋ

할레데임 / ㄴ...네?;

라이듄 / ㅠㅠ 점점 갈때까지 가는

Gneji / ㅋㅋㅋㅋ 로드 예언적중중

아프게했어 / 이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천재십니까? 그 와중에 NTR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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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콤MK / 히익.... 위험하다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루타르 / 그 점은 다음편에 설명이 나올 예정이에요. 아크의 과거에 그렇게 된 이유가 있지요.

@spadel / 키야아아; 지금 나온 부분만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추측해주셨네요. 자기보호에 가까운 마인드와 자기상황에 냉정하게 관조하는것이 불가능한 상황 그리고 신과에 계약까지 고려하시다니 크으!

@...(-1)... / 호와 불호가 아주 명확하시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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