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9 혹한의 전투 =========================
카사르의 수도 엠파이어로 향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인 ‘관문’을 두고 두 나라의 군대가 맞붙었다.
휘몰아치는 혹한을 뚫고 2만 명의 어비스 대군이 관문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사다리를 올려라!”
처저척! 돌격하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펼쳐진 사다리들이 관문의 고층을 향해 일제히 뻗어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눈보라가 너무 심해 사다리가 균형을 잃고 지상으로 떨어져 버리거나, 의도치 않은 곳에 걸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비스군의 화살 공격도 사나운 설풍(雪風) 때문에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바람과 시야 모두가 엉망이었다.
“윽, 이게 뭐야? 무기가 손에 달라붙었어!”
“앞에 상황이 어떻게 되가는 거야?”
“이러다간 싸우기도 전에 다 얼어 죽겠다!”
병사들의 아우성이 눈보라를 타고 퍼져나갔다. 남부인들이 대부분인 어비스군에게는 처음 겪는 혹한 속의 전투,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역시 쉽지 않다, 주공.”
지휘부에서 공성 지시를 내리던 티아가 팔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군은 아직 혹한전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노라. 추위를 견디며 싸워본 경험도 없다.”
“……과연 까다롭네요. 왜 아크가 이토록 배짱을 부리는지 알겠습니다.”
로드가 엄지손가락을 까득 깨물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쓰러트려 보이겠습니다.”
한편 수성 측의 보호트는 관문의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까맣게 밀려들어온 어비스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군. 수적우위로 밀어붙이는가.’
그가 요새에 걸쳐진 사다리를 발로 차 밀어내며 확성구슬을 들었다.
“무리하게 적을 쫓아 밖으로 나가지 마라! 혹한이 우리가 가진 최대의 무기다! 우리가 철저히 제자리를 지키면 혹한이 알아서 적들을 죽여줄 것이니 요새를 지키는 것에만 신경 써라! 놈들이 이렇게 몰아치는 것도 잠시일 뿐이다!”
“예! 사령관!”
“들었느냐! 철저히 버티기만 해라! 놈들은 제풀에 주저앉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관문을 지키는 카사르군 병사들의 사기도 높았다. 모두가 나라의 위기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충성심 가득한 병사들은 목숨을 바쳐 요새를 지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전투 초반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보호트는 방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황을 살폈다.
‘상대는 로드 폴렌티아와 티아 그란디네다. 두 사람이 머리를 짜 맞춘 것 치고는 무척 단순한 전술이 아닌가? 되든 안 되든 다양한 시도를 해볼 줄 알았는데…….’
보호트가 고개를 돌려 부관들 중 한 사람을 불렀다.
“적 병력 수를 파악하라! 2만 모두 온 것인지, 그리고 달리 움직이는 병력이 있는지.”
잠시 후 부관이 대답했다.
“일일이 세어볼 수는 없지만 규모로 보아 2만 모두가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로 게릴라 병력들을 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음, 알겠다.”
보호트가 검을 휘둘러 사다리로 올라오는 적병 하나를 쓰러트린 후 말을 이었다.
“이럴 때 일수록 좌우 산맥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는 병사들이 방심해선 안 된다. 다시 한 번 전령을 보내 방어태세에 만전을 기울이라고 전하라!”
“예!”
공성은 일곱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진행되었다. 어비스 측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외침이 끊임없이 들렸지만 카사르 측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허약한 남부 놈들이다! 이런 추위에서 오래 싸우진 못할 것이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성전을 펼쳐지고 있는 그때, 전령 하나가 달려와 보호트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사령관!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쪽 산맥의 방어진이 뚫렸습니다!”
“…뭐라고?”
보호트가 재빨리 전령 쪽으로 몸을 돌렸다.
“로드 폴렌티아가 산맥 루트를 선택했단 말이더냐? 그 험난한 산세에 군대가 통과하는 게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구, 군대가 아니라 소규모 부대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추정 숫자는 약 200명입니다.”
보호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일었다. 200명이라면 유의미한 숫자는 아니었다. 2만 중에 고작 2백을 빼돌리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부관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전원이…… 어비스 어쌔신들이었습니다.”
“200명 전원이?”
보호트가 들은 바로는 어쌔신이라면 어비스 내에서도 왕실 직속인 최정예부대다. 재빠른 어쌔신 200명이라면 산맥을 기어 올라가 방어선을 뚫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냉기탑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나 되느냐?”
“400명이 냉기탑 주위에 울타리를 짓고 빈틈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애매하군. 이쪽의 이백을 추가로 보내라.”
그 말에 부관이 깜짝 놀라 반박했다.
“그러면 관문의 방비가 약해집니다!”
“어쩔 수 없네. 그리고 당장 아크에게 보낼 전서구를 준비하게.”
“뭐라고 보낼까요?”
“지원군을 요청하게. 적병이 산 너머로 들어왔으니 냉기탑을 지킬 병력을 더 보내달라고 하는 걸세. 일말의 방심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네.”
“예! 사령관!”
*
철컥. 거대한 단두대의 칼날이 올라갔다. 목이 떨어진 사람의 시체가 처형인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새로운 사람이 그 자리에 엎드렸다. 목을 고정시키는 나무판자가 내려오자 남자는 비로소 죽음이 다가옴을 실감했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이 목 위에서 서슬 퍼런 빛을 내고 있었다.
처형인이 물음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자네는 어비스의 첩자인가?”
죽음을 앞두고 남자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순간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온 장면은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몇 번이고 목격했다. 차라리 긍정하는 것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그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심정으로 도박을 하기로 했다.
“마, 맞습니다! 제가 어비스의 첩자입니다!”
주위의 죄인들이 웅성거렸다. 그때 목을 고정하고 있던 판자가 올라가며 병사 두 명이 남자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죄인을 단두대에 눕혔다.
‘사, 살았다!’
남자는 속으로 안도했다. 미친왕 아크는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역시 미치광이의 말에 부정하지 않고 YES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때 남자의 팔을 붙잡고 끌고 가던 병사가 혀를 찼다.
“자네 사실 첩자 같은 거 아니지?”
“……네?”
“한심하긴, 단두대 정도면 인도적인 죽음이야. 자넨 이제 폐하 앞에서 육체가 고깃덩이처럼 짓이겨지는 형벌을 받으며 죽게 될 걸세.”
“뭐, 뭐라고요?”
“이미 늦었어.”
병사가 간수들에게 남자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남자가 꽥꽥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병사는 무시하고 단두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모든 모습을 처형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지켜보는 아크가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와인을 들이켜고 있었다.
‘슬슬 계획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어. 이제 조금만 더 청소하면 혁명군은 엠파이어 내에 한 놈도 남지 않게된다.’
아크가 생각에 잠겨있는데 전령이 그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폐하! 폐하! 보호트 경의 급보입니다!”
“뭔데?”
아크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적의 별동대가 들어왔으니 냉기탑을 지킬 지원군을 이쪽에서 보내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래?”
아크는 귀찮아하는 눈치였지만 전략가로서의 머리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냉기탑을 노리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적당히 한 몇 백 잡고 보내버려.”
“예, 폐하!”
아크의 명에 따라 냉기탑으로 보낼 엠파이어의 지원군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
“적의 별동대가 영지 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단단히 대비하라!”
한편 냉기탑에서는 카사르군의 부장이 직접 돌아다니며 방어체계를 점검하고 있었다.
중요시설인 만큼 방비는 삼엄했다. 단순한 울타리가 아니라 철근을 세워 벽을 만들고, 그 방어선이 3중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곳곳에는 높다란 망루까지 설치되어 있으니 실로 작은 요새라 할 만했다.
“장군, 보고입니다! 엠파이어에서 추가 지원군이 온다고 합니다.”
“음, 다행이군! 조금만 버티면 되겠구나.”
부장이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는데 망루에서 주위를 살피던 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장군! 한 무리의 군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당황한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부관들은 바삐 움직이며 소리쳤다.
“자리로 돌아가라!”
“착검하라!”
병사들이 요새에 자리를 잡는 사이 부장이 고개를 들어 망루병에게 물었다.
“어느 쪽인지 말하라! 어비스의 별동대냐? 아니면 엠파이어의 지원군이냐?”
“죄송합니다! 눈발이 심해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부장과 병사들 모두 긴장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흩날리는 눈 사이로 깃발 같은 것이 보였다.
“……저, 저들은!”
“지원군이 먼저다!”
“와아아아아아아!”
두 개의 검이 교차되어 있는 카사르군의 깃발이 보였다. 그리고 깃발 아래에는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들을 비롯하여 도합 500명 가까이 되는 병력들이 있었다. 부장이 직접 앞으로 나왔다.
“신분을 밝혀라!”
“엠파이어의 기사 길포드라고 하오. 보호트 경께서 지원군을 요청하여 왔소.”
부장은 길포드의 병사들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라.”
문이 열리고 길포드와 그의 병사들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길포드는 한쪽 팔이 불편한 듯 다른 한 팔로 감싸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소?”
“……제길, 밖에서 어비스군을 만났소.”
그 말에 부장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영지 안으로 들어온 별동대일 것이오!”
“엠파이어 쪽으로 향했소. 놈들의 속도가 워낙 빨리 우리 군으로는 뒤쫓지 못했소이다.”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엠파이어의 방비는 철저하니 걱정마시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합시다.”
“……우리의 일이라, 좋소.”
길포드가 움츠리고 있던 팔을 확 뻗었다. 푸욱! 뭔가를 해볼 틈도 없이 단검의 끝이 정확히 부장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 커헉!”
“지금부터는 우리의 일을 하도록 하지.”
부장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병사들의 비명이 난무했다. 갑자기 길포드군이 돌변하여 주위의 카사르군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검에 맞아 바닥에 쓰러진 부장은 눈앞의 상황에 절망했다.
‘말도 안 돼! 설마 저들이 어비스군이었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카사르군의 깃발을 들고, 카사르군의 갑옷을 입었으며, 보고된 숫자도 200명 보다 배 이상으로 많은 수였다. 대체 무슨 마술을 부렸기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편히 보내드리지.”
길포드라 주장한 자가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선혈이 튀어 오르는 것과 함께 부장의 목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장군이 당했다!”
“큭! 이 비열한 자식들이……! 탑을 지켜라!”
대장은 죽고 진형 깊숙한 곳까지 적이 침투한 상황이었지만, 카사르군은 악전고투했다. 어비스 측에 어쌔신들이 있다면 카사르 측에도 기사들이 다수 있었다. 예상외로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백병전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는 그때, 냉기탑 꼭대기가 파도처럼 출렁거리더니, 탑의 외벽을 유령처럼 통과한 은발의 소녀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콰앙! 뒤이어 폭발음이 들렸다. 냉기탑의 끝부분에 달려있던 커다란 수정구가 산산 조각났다.
“단장이 해냈다!”
“오오오!”
어비스군 병사들이 격한 환호를 질러댔다. 용맹하게 싸우던 기사들은 허망한 눈으로 깨진 냉기탑을 올려다보았다.
눈발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돌아왔습니다!
다들 추석연휴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네요. 와아, 그건 그렇고 정신 붙들고 다시 글 쓰려고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ㅠㅠ 연참분량 마련에, E북준비에; 그래도 연재분 올리려니 기분은 좋아지네요!
아, 그리고 연참편은 오늘 오후에 올라갈것 같습니다. 다시 열심히 힘내서 완결까지 달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