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2 혹한의 전투 =========================
서쪽 성벽에서도 박빙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어비스 병사들이 곧장 주위를 장악해야 했지만 단 한사람의 존재에 의해 진도가 더뎌지고 있었다. 바로 퍼시벌이었다.
“헤헤. 헤. 헤헤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웃으며 파동검을 사방으로 날려대는 퍼시벌 때문에 어비스 병사들은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주춤거리며 검을 들어 올리고 있던 병사 옆으로 배틀액스를 짊어진 키리안이 나타났다.
“……상황은?”
“키리안 장군!”
그의 등장에 병사들의 표정이 한 층 밝아졌다.
“저 꼬맹이 때문에 가까이 갈수가 없습니다!”
“그렇군, 그럼 내가…….”
“찾았다!
멀리서 원거리 파동기만을 날려대던 퍼시벌이 냅다 달려들어 키리안에게 검을 부딪쳐왔다. 쾅! 키리안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받아냈다.
“저번엔 못 죽였지?”
교차된 무기 사이로 퍼시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죽일 거야! 폐하의 명령을 방해하는 놈들은 전부 죽일 거야!”
카가가각! 퍼시벌의 검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살해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무기를 타고 전해졌다.
‘……곤란한데, 이래선 집중할 시간이 없어.’
키리안은 신기술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 폭주 상태를 스위치처럼 마음대로 켜고 끌 수가 없었다. 느긋하게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키리안이 이를 악물며 맞댄 검을 뿌리친 다음 뒤로 물러났다.
“어?”
등 뒤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키리안이 돌아보자 음표가 펑 터지며 로즈안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리안! 잠깐 뒤로 와 봐요!”
“와악! 깜짝이야!”
그녀의 고유능력인 ‘선율의 아이’효과였다. 키리안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요새 낭떠러지 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퍼시벌의 돌진을 다른 병사들이 막아내고 있는 사이, 붉은 빛의 음표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이거다!’
키리안이 음표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등을 펴고 두 팔을 벌렸다. 뾰롱! 독특한 효과음과 함께 붉은 기운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정신이 고양되고 몸에 힘이 넘쳤다.
“죽어어어어!”
퍼시벌이 막아선 병사들을 뚫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검을 내리쳤다.
‘……좋아.’
몸에 흐르는 마력을 만끽하던 키리안이 번쩍 눈을 떴다.
콰앙! 검과 도끼가 허공에서 격돌하며 불똥을 퍼뜨렸다. 그리고 그 결과, 달려들었던 퍼시벌이 역으로 나가떨어지며 벽에 처박혔다.
콱! 순식간에 상대를 쫓아온 배틀액스가 벽을 찍었다. 고개를 꺾어 피해낸 퍼시벌이 몸을 돌려 키리안의 턱을 걷어찼다.
빠악!
일반병은 그대로 혼절해버릴 충격일 것이나, 폭주한 광전사에게는 잠깐 덜컥거리게 하는 정도에 그쳤다. 파괴적인 붉은 빛을 뿌리는 배틀액스가 방향을 바꾸어 퍼시벌의 머리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꾸우우웅! 퍼시벌은 몸을 던져 피했고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도끼 자국이 남았다.
- 파동검. 무형극(無形極).
거리를 벌린 퍼시벌이 자세를 잡았다. 검신에 휘감긴 마력의 기류가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며 내뻗어진 검신과 함께 은빛 창의 형태로 쏘아져나갔다.
한때 키리안을 무릎 꿇린 적이 있는 비장의 파동기였다. 그러나 키리안은 도끼를 앞세우며 파동기 속으로 제 발로 뛰어들었다. 쇄도해온 은빛 창이 붉은 도끼에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뭔……!”
“크오오오오오오오!”
키리안이 야수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쩌엉! 무형극을 완전히 깨트린 배틀액스가 그대로 퍼시벌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다만 무형극을 떨쳐내느라 힘이 떨어져 있어 완전히 어깨를 부수지는 못했다.
퍼시벌은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참으며 배틀액스의 자루를 들어 쳐냄과 동시에 몸을 비틀어 키리안의 머리에 돌려차기를 가했다.
“큭!”
“흐읍!”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한 발짝씩 뒤로 빠졌다. 하지만 소강상태는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콰드드드드득! 곧바로 붉은 광격이 벽에 흉터를 그리며 지나갔다. 이번에도 몸을 낮춰 피해낸 퍼시벌이 두 팔로 벽을 짚고 힘이 실린 발차기를 날렸다.
빡! 정확히 키리안의 손을 타격해 배틀액스를 놓치게 했으나, 광전사는 상관없다는 듯 냅다 맨주먹으로 퍼시벌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뻐어어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소년이 바닥을 굴렀다. 짐승처럼 달려든 광전사가 이번엔 그의 안면을 맨 손으로 붙잡고 벽에 처박았다.
쿠웅!
“커허헉!”
벽에 얼굴이 부딪치며 코와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이대로 얼굴을 벽에 짓이겨버릴 기세로 뒤통수에 힘이 가해지고 있었다.
“끄으으으……!”
퍼시벌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엄지손가락을 세우고는 그대로 상대의 복부 쪽 검상을 향해 찔러 넣었다. 그리곤 상처 안으로 파동의 힘을 방출시켰다.
“크르르르아아아아아!”
아무리 폭주한 광전사라도 이런 통증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키리안이 괴로워하며 물러나자 악에 받힌 퍼시벌이 도약하여 상대의 안면에 날아차기를 먹였다. 쿠쿠쿵! 광전사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사이 퍼시벌은 숨을 헐떡거리며 떨어진 검을 붙잡았다.
“……으으윽!”
키리안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붉은 광기로 가득 찬 눈동자가 원래의 빛으로 돌아와 있는 것을 확인한 퍼시벌은 미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폭주상태가 풀린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죽인다아아아아!”
퍼시벌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폭주가 풀려버렸지만 아직 키리안의 얼굴엔 여유가 있었다. 그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댔다.
- 충전검 아인하르트 ‘참격’.
허리춤의 검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세 갈래의 참격을 뽑아냈다. 퍼시벌이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피하기엔 늦었다.
콰콰콰콰콰콰! 푸른 발톱이 퍼시벌을 뒤덮고, 주위의 병사들까지 집어삼킨 채 정면으로 뻗어나가 요새 벽을 부수고 폭발을 일으켰다.
‘……후우우, 아슬아슬했다.’
철컥. 키리안이 충전검을 집어넣으며 안도했다.
‘하지만 아직 쓰러트린 건 아닌가.’
바닥에 남겨진 푸른 흉터위로 검을 들어 올린 채 헐떡거리는 키리안이 보였다. 검격이 닿기 전에 자신도 파동검을 일으켜 피해를 상쇄시킨 것이다.
“후욱. 후욱.”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퍼시벌의 눈동자에 지독한 살의가 깃들었다.
“……잘근 잘근 씹어 죽여주마!”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참격이 사라지고 카사르군 병사들 또한 뒤를 따랐다. 위기에 몰렸지만 키리안은 이번엔 등 뒤에 매고 있던 장총을 꺼냈다.
“그딴 거엔 안 맞아!”
퍼시벌이 인상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맞을걸.”
타앙! 키리안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날아가는 탄환을 보며 퍼시벌이 고개를 꺾어 피하려는데 탄환은 어느새 가루처럼 분해되어 마력자국을 허공에 남기고 사라졌다.
“……?”
“지원 폭격 요청이야.”
중얼거리는 키리안의 뒤로 새까만 공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기겁해서 외쳤다.
“키, 키메라의 공격이다!”
“피해애애애!”
콰콰콰콰콰콰콰콰쾅!
키메라의 검은 마력이 밀집된 병사들에게 부딪치며 새까만 폭발을 연이어 일으켰다. 요새의 층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초토화됐다. 천장이 내려앉고 바닥이 통째로 무너지는 곳도 있었다.
퍼시벌은 재빨리 몸을 던졌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몸의 한쪽이 검은 마력에 물들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후아아아아아아압!”
혼란스러운 틈을 타, 폭발 연기를 뚫고 득달같이 달려든 키리안이 배틀액스를 휘둘렀다.
쩌억!
퍼시벌의 팔 한 짝이 날아갔다.
“아아아아아악!”
그가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키리안이 뒤쫓으려했지만 복부의 상처가 벌어져 더 움직이지는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깝다! 확실히 목을 쳤어야 했는데……!’
어비스군 병사들이 몰려들어 부상을 입은 키리안을 보호했다.
*
후방에서 전황을 조율하던 티아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방어진이 뚫렸다. 우리 병사들이 요새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느니라. 주공.”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역시 지금의 우리 전력을 정상이 아닌 카사르가 막을 수 있을 리 없죠. 혹한이 멈췄으니 두려울 건 없습니다.”
“적장 보호트도 애썼지만 전력 차가 너무 크구나.”
“전쟁이란 건 공평하지 않으니까요. 무엇보다 아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무 많은 영웅들을 잃었습니다. 차이가 벌어지지 않는 게 이상해요.”
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요새 안으로 들어오며 난전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수가 더 많은 어비스군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웅들의 전투에서도 열세가 이어졌다. 퍼시벌은 키리안에게 한 팔을 잃은 채 패퇴했고, 아론다이트나 보호트도 비월과 그녀의 부관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 때문에 최고 전력인 유니벨이 마력폭발을 일으키며 날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고유능력의 상성이 좋은 베디베어가 살아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카사르 진영으로선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여기에 이번 전투의 1등 공신이 된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병력들까지 후방에서 합류하니, 전세는 확 기울고 말았다.
결국 보호트는 성을 포기하기로 했다. 날이 어두워지며 공세가 느슨해진 틈을 타 보호트는 병력들을 이끌고 퇴로를 뚫어내며 엠파이어로 후퇴했다. 다시 한 번 관문에 어비스의 깃발이 걸렸고 병사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어깨동무를 하며 포효했다.
이것으로 카사르의 본토는 엠파이어 하나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키리안의 전투 스타일 : 남의 버프 + 남의 무기 + 남의 포격
여러분은 제대로 어비스 물이 든 아로게쓰의 명예로운 전사를 보고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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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고래 / 코멘남겨 주신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아프게했어 / 망고 톡톡 톡! 트로피카놔아!
알테니아 / 글 대신 써주는 기계요?;
할레데임 / 릴리 vs 비월의 퍼들스퀘어 공성전 기억나시나요? 그때 비월을 도와 릴리군을 물리치고 새롭게 그녀의 밑으로 들어온 세 명의 영웅들 중 한사람입니다! 용병단장 출신이고, 정신계 고유능력을 가지고 있죠!
왜이리들다재밌지 / 감사합니다! 다들 트로피까나 홀릭이군요!
니알라토텝 / 아아아! 왕의 호위가 기사인지 암살자인지 라이벌 구도가 될수 있군요! 오옹.
火炎無 / (자살)
사탕수수158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아아! 군만두단에게 사로잡힐바에는 명예로운 죽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