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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256화 (256/296)

00254 절정 =========================

아크가 기네비어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엠파이어는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아크 측에서는 기네비어가 죄를 자백했고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했다고 밝혔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아크가 미쳤다는 소문과 자신의 손으로 약혼녀를 죽였다는 사실이 맞물려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갔다. 영지민들은 이제 아크를 미친왕이라고 불렀다.

엠파이어로 돌아온 보호트는 어떻게든 어수선한 분위기를 위기의식으로 쇄신시키려했다.

‘지금은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오! 이제 곧 어비스가 엠파이어를 포위할 것이오. 전 백성이 하나로 똘똘 뭉쳐 우리의 터전을 지켜내야만 하오!’

그러나 로드는 보호트의 의도대로 흘러가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엠파이어 포위대신 정치전으로 나왔다. 이런 정치적 공작이야말로 로드와 어비스라는 나라의 특기였다.

‘우리 어비스는 침략이 아닌 통치를 원한다. 엠파이어 공략을 서두를 생각이 없다.’

‘살아있는 전설인 가웨인의 성품을 생각해보라. 그녀와 같은 충직하고 곧은 성품의 인물이 무슨 이유로 아크에게서 빠져나왔겠는가?’

‘아크가 가신들에게 저지른 일은 실로 끔찍하다. 퍼시벌을 폐인으로 만들었고, 가웨인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며, 릴리와 베디베어는 비극으로 이끌었고, 기네비어는 잔혹하게 살해했다.’

‘그가 영지민에게 행한 처형은 첩자 수색을 빙자한 참혹한 집단 학살일 뿐이다! 당장 멈춰야 한다.’

로드가 직접 주장한 내용도 있었고, 영지에 퍼뜨린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게 안팎으로 엠파이어를 흔들면서 로드는 카사르에 새로운 제안을 했다. 예전 아로게쓰를 상대할 때 써먹었던 것과 비슷한 수법이었다.

‘우리 어비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의 왕실‘이다. 만약 폭군 아크를 내어준다면 엠파이어를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을 신들에게 맹세한다. 엠파이어에 영구적인 자치권을 부여하겠다.’

엠파이어로 가는 유일한 입출구인 관문을 틀어막은 후 아크를 내어 달라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요구였고, 항복 종용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제안이 성립될 가능성은 없었지만 로드는 영지민들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것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의 목적은 혼란의 가속. 침략자 어비스에게 똘똘 뭉쳐 대응하는 게 아닌 내부에서 곪아 터지게 하는 것이었다.

로드는 포위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유일한 출구인 관문에서 만만의 수도 공성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엠파이어는 점점 더 혼란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고 있었다.

*

보호트는 엠파이어 지하감옥에 와 있었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는 습하고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걷고 있는 보호트의 표정에는 짙은 고뇌와 갈등이 드러나 있었다.

보호트가 감옥의 최하층에 도착하니 경비들이 창을 세워 가로막았다.

“보, 보호트 경! 여기서 부터는 폐하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보호트가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 바쁜 전시에 왕궁으로 돌아가서 폐하의 허락을 받고 다시 자네들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

“하, 하오나……!”

“두말하지 않겠네, 비키게.”

아크가 이상해진 이후 카사르의 실세는 누가 뭐래도 보호트였다. 그의 박력에 경비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물러났다.

보호트는 최하층을 쭉 둘러보다가 어느 한 독방 앞에서 멈춰 섰다.

“단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물러나라.”

“예, 옛!”

그곳의 경비들까지 모두 몰아낸 보호트가 마침내 감옥 창살 사이의 어둠속으로 말을 던졌다.

“오랜만이오, 집정관.”

“…….”

어둠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사람이었다. 장발의 머리와 지저분하게 길게 난 수염, 몸에서는 씻지 못해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아, 간만의 손님이군요. 보호트 경이지요?”

장년 남성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소.”

“대접을 하지 못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이런 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고귀한 마스터 나이트여.”

보호트가 창살 가까이 다가왔다.

“대화를 하러 왔소.”

“……대화?”

“한 때 당신은 카사르 왕실에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던 가신이었지. 그런 당신이 갑자기 지하감옥의 깊은 곳에 수감되었고 왕명으로 접근이 금지되었소. 아크는 당신이 역모를 꾸몄다고 둘러댈 뿐 자세한 설명은 피해왔소.”

부스럭. 집정관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호트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크가 전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파격적인 정책을 실행함에도 마땅히 수긍할 수 있는 이유와 구실을 댔기 때문이오. 허나 지금의 아크는 그렇지 않소. 바로 최근에는 본인의 손으로 약혼자를 죽이기까지 했소.”

“……아아, 기네비어 님이 결국은…….”

그가 씁쓸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나는 오랜 시간 고민했소.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해오던 아크가 언제부터 이렇게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되었는지. 처음엔 로드 폴렌티아에게 패퇴하여 엠파이어로 돌아왔을 때부터 그랬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보다 더 이전이 있더군. 바로 집정관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은 때요.”

“…….”

“말해주시오, 집정관. 그대는 무슨 죄 때문에 여기에 갇혀 있는 것이오? 정말로 역모를 꾸민 것이오?”

어둠속의 남자는 가만히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보호트 경 같은 분께서 이런 시국에 늙은이의 죄를 가리려고 오셨겠습니까? 경의 생각을 말해보시지요.”

“좋소, 이것은 내 추측일 뿐이지만…….”

보호트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당신이 바로 우리 카사르국의 신관이지 않소?”

“……!”

어둠속의 남자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소. 어떤 왕실이든 신관이라는 자들이 한명씩 있소. 신들의 뜻을 받들어 자신이 섬기는 왕을 대륙의 유일한 ‘황제’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 수백 년 전 대륙의 유일한 황제가 나타난 그 때에도 신관들은 있었소. 신관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가 왕을 칭하는 것은 그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할 정도였지.”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이번 난세도 마찬가지로 계시를 받은 신관들은 왕의 총애를 받으며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소. 알란드의 비앙카가 그렇고, 어비스의 이브가 그러하오. 그러한데…….”

보호트의 시선이 어둠속 남자에게 꽂혔다.

“어째서 우리 카사르만은 신관이 없는 것이오?”

“하하하!”

집정관이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다 알고 오신 것 같으니 무얼 숨기겠습니까? 예, 소인이 바로 카사르의 신관입니다.”

“……그렇다면 말해주시오. 왕의 총애를 등에 업어야 할 신관이 왜 이런 곳에 갇혀있단 말이오?”

“…음.”

집정관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소인이 엇나갔기 때문이겠지요.”

“그게 무슨 말이오?”

“소인이 아직 집정관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군요. 그때의 저는 모셔야 할 왕이 썩 미덥지가 않았습니다. 왕으로서 위엄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천방지축에 장난꾸러기이자, 여자를 밝히고 문란한 사생활을 즐겼죠. 제가 생각하던 왕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보호트는 아크의 행실을 떠올리고는 백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은 폐하께서 왕으로서 덕목을 갖추길 바랐고 사사건건 따라다니며 쓴 말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묘하게 서먹한 관계가 되었죠.”

“음, 하지만 아크가 고작 잔소리 좀 했다는 것으로 중신을 감옥에 가둘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집정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결정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부디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난해하고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부디 질문은 삼가고 들어만 주시길. 소인은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겠소.”

보호트는 순순히 동의했다.

“우리 신관들은 신에게 부여받은 어떤 ‘도구’을 쓸 수가 있습니다.”

시작부터 난해한 이야기에 보호트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일반인에겐 발설할 수가 없으니 양해를. 폐하께서는 소인이 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신관이라는 사실도 숨기라고 하셨지요. 그 당시의 소인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신관의 힘은 오롯이 왕을 서포트 하기 위한 것인데 그것을 금하시다니… 납득할만한 설명도 해주시지 않으셨지요.”

집정관은 눈을 감으며 점점 더 깊게 회상에 빠져들었다.

“……소인이 느끼기로는 폐하께선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시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소인은 이 힘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도구를 써서 사소한 일처리를 하나 했습니다.”

난해한 이야기의 연속이었지만 보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폐하께서 소인이 도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는 저를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잠시 말이 끊겼다.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집정관의 얼굴에 담긴 감정은 공포였다.

“…그날 보았던 폐하의 눈빛을 소인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아, 언제나 장난기 넘치던 폐하께서 증오와 한으로 버무려진 눈빛으로 소인을 보고 계셨습니다. 아직 나이도 어리신 분께서 그러한 눈을 할 수 있다니……. 그리고 그날 이후 소인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었다. 보호트는 잠시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되새겨 보았다.

“……음,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으나 납득은 되오. 아크는 부하가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오. 아마도 집정관은 아크가 정해놓은 ‘선’을 넘은 것이겠지. 그래도 지시를 어겼다고 이렇게 평생 그대를 감금하는 것은 심한 처사로군.”

“…그것은 아마 제가 신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정관이 말한 그 ‘도구’를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크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오?”

집정관은 이번엔 말이 없었다. 그렇군, 질문을 해서는 아니 되었다. 보호트는 수긍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잘 들었소. 그럼 이제 그 이야기와는 별개로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할까하오.”

“……흥미롭군요. 아직 본론을 시작하지도 않으신 겁니까?”

“부디 대답해 주시길 바라오.”

보호트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소꿉친구 시절부터 아크를 봐와서 알고 있소. 아크는 지금까지 성격이 세 번 바뀌었소. 첫 번째는 어린 시절 순수하고 다혈질이었던 아크. 두 번째는 엉뚱하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함을 갖춘 무결점의 아크.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지금, 의심과 폭정을 일삼는 아크요.”

보호트 또한 난해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집정관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경청했다.

“수많은 시간을 고민한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오. 나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크와, 지금의 아크는 모습만 같을 뿐이지 완전히 다른 성격과 사상, 생각을 가지고 있었소. 심지어 아크는 어린 시절의 일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군.”

“…보호트 경. 그 의문은…….”

“부디 대답해 주시길 바라오. 집정관, 아니 신관.”

보호트가 말을 자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계시를 받은 그대라면 알고 있을 터. 지금의 아크와 왕위 이전의 아크는 정말로 같은 사람인 것이오?”

“…….”

깊은 정적이 일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침묵이 이어진 뒤에, 보호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소. 지금의 아크와 예전의 아크는 서로 같은 사람인 것이오?”

이번에도 집정관의 대답은 없었다. 두 사람 간에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다시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보호트는 등을 돌렸다.

“잘 알겠소.”

보호트는 지하감옥을 나왔다.

============================ 작품 후기 ============================

신관하니까 아로게쓰의 그 신관님이 떠오르네요 ;ㅅ; 그는 좋은 충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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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고래 / 죄송해요 어젠 연참없었어요 ㅠㅠ 쪼개려다가 17키바 짜리 통으로 올렸네요

Muspel / 아직 몸도 안풀었... 읍읍!

새디득구 / 삼빠 순위권 축축!

민트레인 / 정답 ;ㅅ;

알테니아 / 예에! 오브코우스!

은아준 / 히익!

에프론 / 호곡곡

왜이리들다재밌지 / ㅠㅠㅠ 안타까운 캐릭터죠.

헬크랩 / 넵. 언젠가 멜로디도 출현 예정이에요.

spadel / 넵, 아르곤은 쉽지 않은 전투가 되겠죠. 비월과 술이라, 흠. 음. 아이디어가 좋네요! 소재가 막 떠오른다!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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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데임 / 카사르 라는 나라와 영웅들에 대해선 악감정이 없지만 ㅠㅠ 스토리상 이런 비극적인형태로 망가져가는 나라를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기네비어는 여러모로 개인사정도 많고 포텐도 많은 캐릭터였지만, 하아.

@쿨레라군 / 말씀대로! 전선이 넓어질수록 지략형 영웅의 활용도는 점점 더 커지죠. 이번 에피소드에서 티아가 퍼시벌을 떡바른것처럼 판을 짤줄 아는 캐릭터의 효용을 늘어나죠. 벤이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전문 군사에 비해 살짝 부족한 느낌이긴 하네요. 그리고 어비스는 역시 전쟁국가가 아닌지라... 순수 전력은 다른 나라에 밀릴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다른 나라의 특화병종들과 영웅들까지 조합해서 어떻게든 보완하고 있지만 화력 부족은 어쩔수 없는 어비스의 단점으로 남을것 같네요.

@니알라토텝 / ㅠㅠ 응앙 기네비어..

@llSongOfBladell / 테크 쪽은 스타보다는 문명의 시스템을 채택했습니다. 시대 발전에 중요한 것이 문화력이라는 요소인데 단순히 자원이 많다고 팍팍 오르는 것은 아니라 여러 변수가 많아서요. 정복을 할수록 다른 나라의 문화가 유입되고 섞이고 하는 과정에서 문화력 증가치의 가속도가 느려집니다. 시대발전에만 집중할거면 딱 자기나라의 문화와 기술 발전에만 집중하는 편이 빠르죠.

@...(-1)... / 문짝이는 언더하임을 잘 지키고 있답니다! 요즘 외부전이라 문짝이가 나올 각이 잘 안보이네용

@박성빈 / 오오, 이 코멘트를 읽고 바로 수긍해버렸습니다; 퍼시벌은 비노쉬가 완벽한 카운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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