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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260화 (260/296)

00258 절정 =========================

어둑어둑해진 밤의 야영지.

유니벨은 로드의 지휘관 천막으로 놀러가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도 가볍게 사뿐사뿐 가고 있던 중, 앞서 걷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틀림없이 같은 방향일 것이라고 유니벨은 직감했다. 그녀가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뭐야, 까맹이잖아.”

검은머리가 흔들리며 비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유니벨 님.”

그녀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

항상 고상한 몸가짐과 예절이 몸에 배어있는 비월은 기품 있는 동방의 규수 그 자체였다. 반면 언더하임의 뒷골목에서 거친 남자들과 부대끼며 장사를 배워왔던 유니벨은 비월의 그런 점이 생리적으로 편하지는 않았다.

“까맹이가 왜 지휘부에 있어? 서쪽 성문 주둔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폐하께 가는 길이옵니다. 오늘의 공성 성과를 말씀드리옵고 이후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옵니다.”

“흥, 그런 건 전령을 보내면 될 텐데.”

흘리듯 혼잣말을 한 유니벨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유니벨 님은 어떤 연유로 폐하께 가시는지요?”

“놀러!”

그녀가 내뱉듯 말했다.

유니벨이 불편해하는 것 같으니 비월도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조용히 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는 시간을 느끼며 나란히 걸었다.

“…야, 너!”

갑자기 생각난 듯 유니벨이 홱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군단장인가 뭔가 됐다고 나한테 뻐길 생각 하면 주욱어!”

“……예?”

고개를 갸웃하던 비월은 조금 뒤 유니벨의 말뜻을 깨닫고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이옵니다. 소녀는 언제나 유니벨 님을 선진의 예로 모실 것이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오니 앞으로도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사옵니다.”

“……흐, 흥.”

유니벨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되돌렸다. 심술을 부려봤는데 저런 식으로 나오면 언제나 무안해지는 건 그녀 본인이었다.

비월은 미소를 띠며 뒤따라 걸었다. 비월도 알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척, 차가운 척 하지만 본성은 여린 아이라는 것을. 유니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비월은 동료로서 그녀가 퍽 마음에 들었다.

‘…유니벨 님도 귀여우십니다.’

그리고 비월은 귀여운 것에 약했다.

잠시 후 그녀들은 지휘관 천막 앞에 도착했다. 주위를 지키던 암살단원들이 두 장군들에게 절도 있는 경례를 올렸다.

“팬더 안에 있지?”

유니벨이 천막 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예.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뭐?”

“먼저 온 손님이 계십니다. 잠시 기다리는 것이…….”

“뭐어? 또 어떤 요상한 년이 온 거야!”

암살단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간 유니벨이 천막을 확 걷었다.

천막 안에는 맨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 로드가 그녀를 감싸 안은 채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유니벨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로드에게 안겨있는 저 소녀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로드가 유니벨에게 눈치를 주며 ‘쉿’ 소리를 냈다. 그때 치엘로도 유니벨을 발견하고는 소매로 슥슥 눈물을 닦았다. 금세 진정된 그녀가 언제나와 같은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머, 유니벨 언니!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양심은 없군.’

로드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 참.”

유니벨이 삐딱한 자세로 팔짱을 꼈다. 로드에게 안겨 있을 땐 비운의 여주인공인 마냥 펑펑 울어대더니, 이제는 또 방긋 웃고 있는 모습이라니.

“너, 남의 진형에 와서 뭐하는 거야? 요즘 좀 안 보인다 했더니 이런 곳에서 꼬리치고 있었냐? 앙?”

“너무 그러지마, 유니벨.”

로드가 치엘로를 일으켜 침대에 앉히며 말했다. 유니벨이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편 들어주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오늘은…….”

로드의 부축을 받고 있던 치엘로가 휘청거리며 그의 가슴 위에 무너지듯 안겼다.

“로드 오빠아. 훌쩍! 유니벨 언니가 저 못살게 굴어요오.”

로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마치 순정만화의 여성 캐릭터가 ‘앗! 현기증이!’ 하면서 뒤로 쓰러지는 장면 비슷한 게 아닌가.

“…야아악! 너 뭐하는 거야? 떨어지라고!”

두 소녀가 잘 놀고 있는 사이, 비월도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문안드리옵니다.”

로드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넨 비월이 치엘로를 보았다.

“…그런데 이 분은?”

“몰라? 저 여자가 켈타인 여왕이잖아.”

유니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월이 눈을 번쩍 뜨더니 순식간에 검을 뽑았다. 슈콰아악! 대기를 찢으며 청색 검광이 날아갔다.

“그만!”

로드가 다급히 외쳤다. 처억! 비월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치엘로의 목젖에 닿았다. 치엘로가 움찔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목에서 나온 핏물이 검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바로 당신이었습니까? 치엘로 블랙노트. 주군의 원수!”

“…….”

목젖까지 닿은 검을 바라보던 치엘로의 시선이 다시 올라가 비월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명랑하게 미소 지었다.

“그 검은 머리와 제복, 당신이 비월이군요? 로드 오빠네 무장이 됐다는데 정말이네요. 반가워요.”

“……당신!”

비월이 이를 뿌득 갈았다.

그녀가 저렇게 분노하는 모습은 로드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유니벨조차 그 박력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비, 비월! 진정해.”

“어찌 진정할 수 있겠사옵니까? 제가 섬기던 주군을 살해한 자이옵니다!”

검을 쥔 비월의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치엘로가 상냥하게 웃으며 항복을 선언하듯 두 팔을 들어올렸다.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일단 그 무서운 건 내려놓고…….”

비월의 검이 더 가까이 움직였다.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많아졌다.

“지금 소녀를 능멸하는 것이 옵니까!”

하아. 하고 치엘로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던 그녀의 얼굴표정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정 저를 죽여야 분이 풀리겠다면 그렇게 해요.”

비월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목 앞에 칼이 들어온 상황에서도 치엘로는 미동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제 행동을 후회하지 않아요. 제 입장에선 당신의 왕 선광은 죽어 마땅할 쓰레기였으니까요.”

“……그게 무슨 망발이옵니까?!”

“선광은 내 동맹국인 어비스를 배신하고 적의 편에 붙었어요. 바로 당신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

비월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당신 하나 때문에 백제국 전체, 그리고 어비스와 알란드까지 세 개의 나라를 멸망 위기까지 몰아간 인간이에요. 여자에 홀려 자신의 본분을 등한시 한 일그러진 괴물. 당사자인 당신이야 선광을 잊지 못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쳐 죽일 쓰레기가 맞죠.”

“……그만!”

“알겠어요? 입장이 다를 뿐이에요. 누구에겐 좋은 주군이고, 누구에겐 희대의 망군. 그리고 저는 스물 두 명의 왕들 중 한 사람이에요. 후보를 제거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후회하지 않아요.”

“그만하십시오!”

“그러니까!”

치엘로도 목소리를 높였다.

“죽일 거면 이 자리에서 그냥 죽여요! 입장 차이란 그런 거니까. 그게 아니라면 괜한 화풀이는 말아 주실래요?”

“…….”

“비월.”

분위기가 지나치게 가열되자 로드가 끼어들었다.

“이런 건 너 답지 않아.”

“…….”

“그리고 치엘로 너도. 왜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화를 자초하는 거야?”

비월은 크게 숨을 내뱉으며 검 끝을 내렸다. 눈앞에 원수가 있다. 그러나 이 원수를 해치는 것은 은인에게 폐를 끼치는 짓이다. 혼란스러웠다.

“……소녀는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비월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부디 제 눈에 자주 띄지 않기를 바라옵니다. 다음번엔 소녀가 자제하지 못할지도 모르니.”

치엘로가 목을 문지르며 비월을 마주보았다.

“마음대로해요. 저도 다짜고짜 검부터 들이대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네요.”

비월은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긴장된 공기가 가라앉자 로드와 유니벨이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야, 너! 괜히 남의 나라에 와서 좋은 분위기 다 망쳐놓고!”

유니벨이 핀잔을 주자 치엘로는 다시 로드에게 달라붙었다.

“으아앙! 로드 오빠, 치엘로는 무서웠어요! 죽는 줄 알았다구요! 엉엉!”

“아, 진짜! 대체 네가 왜 여기에 온 거냐고오!”

잠시 로드와 치엘로는 시선을 마주쳤다. 이걸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로드는 유니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켈타인이 무너졌다고? 그리고 하데스가 온다고?”

유니벨이 눈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그래.”

“흥, 나라가 그렇게 된 건 안타깝지만, 왜 쟤네들 똥까지 우리가 치워야 하는데?”

“미안해요, 유니벨 언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풀죽은 표정을 한 치엘로가 급기야 히끅거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만 좀 해! 애도 아니고 툭하면 울어대!”

“애 맞아요.”

치엘로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왜 대륙의 왕들은 다 나사가 하나씩 빠진 거야?”

답이 돌아오지 않을 독백을 내뱉으며, 유니벨은 홧김에 애꿎은 땅만 팍팍 찼다.

“야, 팬더. 뭘 망설여?”

“응?”

“켈타인은 이제 망했다며? 쟤 죽여도 뒤끝 없으니까 깔끔하게 경쟁자 제거하고 가자고.”

유니벨이 붉은 탄환을 소환해 손에 쥐며 살기를 흘렸다.

“그만 좀 해.”

로드는 오늘 하루 진이 빠져 쓰러질 지경이었다. 우리 애들은 치엘로를 못 죽여 안달이라도 났단 말인가.

“잠깐만요, 언니.”

치엘로가 손바닥을 척 펼쳤다.

“뭐야? 유언이라면 지금 말해.”

“전 아직 쓸모가 있어요.”

유니벨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쓸모? 하, 그 워프게이트인가 뭔가 말하는 거겠지? 그런 거 없어도 우리는 지금껏 잘해왔…….”

“아뇨, 그거 말고.”

치엘로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로드에게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살려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거랍니다. 그쵸, 로드 오빠?”

“……야. 야.”

로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그리고 그보다 더 시뻘겋게 달아오른 유니벨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 그, 그 그런 쓸모는 네가 아니라도 할 수 있거든!”

작게 눈물까지 맺힌 채 빼액 소리 지르는 유니벨이었다.

“……핫!”

유니벨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마침 로드와 눈이 마주쳐서 어색하게 주춤거리고 있는데 치엘로가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 저는 살아남은 마녀들의 대공지원을 말한 거였는데 어비스에 대공 지원이 있었던가요?”

“―――!”

농락당한 것을 안 유니벨이 괴성을 지르며 천막 밖으로 도망쳤다.

“후훗, 귀여워라. 어비스 진형은 지루할 틈이 없네요.”

“너 말이야.”

로드가 꾸중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검지로 로드의 입술을 착 막으며 귀엽게 눈을 찡긋했다.

“아까 이야기, 그냥 빈말은 아니라구요?”

“…….”

로드는 급격히 코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마음 한 켠 에서는 자괴감도 들었다. 왜 이렇게 로리들만 꼬이는 거냐고!

============================ 작품 후기 ============================

R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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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테 / 지적 감사드립니다. 보고 바로 수정했습니다.

책읽는고래 / ㅠㅠ...

벌레 / 사실 걸그룹이 아니라 세계정복팀이죠? 그렇죠?

ROK1198 / 응? ...왜 치나요?

Nearthals / 이런 음란마귀!

Lizad / ㅠㅠ 불쌍한 비월이

Tntn12 / 이럴수가, 멸망보너스대신 귀여운 합법로리라니 실로 개이득이군요

llSongOfBladell / 정보력을 무슨 전대륙 맵핵 수준을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맵핵이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여러번 언급했지만 특화병종인 스파이의 숫자, 정보수집 범위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현대 시대처럼 컴퓨터 해킹해서 설치된 몰래카메라 보고 이런거 안됩니다. 사람이 일일이 해당 장소에 가서 두 눈으로 보고 소문을 귀로 듣고 확인해야 하는 겁니다. 지금은 카사르에 집중하고 있어서 초반부 아크에 의해 스파이 억제당했을때를 제외하면 카사르군의 일거수투족을 모두 보고받고 있죠. 정보부에서 로드에게 툭툭 던져주는 정보들이 별거 아닌것 같지만 다른 국가에서는 아주 귀한 1급 정보들입니다. 그리고 저 대륙 맞은편에 있는 아르곤이 몰래 비행병종을 보내 켈타인을 공격한것 까지 대체 스파이가 어떻게 캐치해야한단 말이죠? 정보력이 타국에 비해 특화병종 보정을 받아 우수한것 뿐이지 대륙의 모든걸 알 수는 없습니다.

T스톤 / 그러게요; 저걸 어떻게 잡징

알테니아 / 음음이시다!

아프게했어 / 로리조아!

왜이리들다재밌지 / 그렇죠. 만약 옆동네 다이달로스가 초반 병력 준비에서 섬에 쳐들어 왔으면 백방 깨졌을 겁니다.

spadel / 저도 왜 목욕씬이 검열에 통과됐는지 의아합니다 ㅋㅋ 요즘 일 안하나(?) 아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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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레라군 / 외교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이 주신전에서 외교란 것은 사실랑 플레이어들이 전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외교관이 오고 가고 선물 주고 받고 하는게 아니라 플레이어들간의 관계에 의해 정해지고, 플레이어들이 이야기하고 협력하고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지는게 외교입니다. 국가간 외교관들이란 존재는 무색합니다.

뭐, 로드가 외교에 대해 신경을 잘 안쓰는 건 사실입니다. 연회때도 남들 인사하러 돌아다닐때 로드는 그냥 혼자의 시간을 즐기죠.

그런데 방대한 정보를 이용한 타국의 외교조직? 이건 사실상 불가능 합니다. '채팅창'이라는 전 플레이어들이 공유되는 시스템도 있고 '1:1'대화도 언제든지 가능하죠. 헛소문을 퍼뜨린대봐야 플레이어들끼리 직접 대화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면 끝입니다.

니알라토텝 / 고등학생이 이세계만 넘어오면 천재에 최강캐가 되는 신비로움! 그 이름하여 주인공 버프!

@빛과하늘 / 감사합니다. 연참은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로 언제나 노력하고 있어요. ㅠㅠㅠ 그런데 하루살이 작가라는게 함정

@ ...(-1)... / 아무도 민트를 기억해 주지 않는데 유일하게 기억해주시는 분 ㅠㅠ

@노레롱 / 오타 맞습니다 ㅠㅠ 감사합니다!

@火炎無 / 엉앙 ;ㅅ;

@사탕수수158 / 우와아! 특식이라니! 정말 욕구가 셈솟는군요! (도망갈 비행기 티켓을 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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