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8 문화시대 =========================
마차가 왕궁 앞에 도착했다. 로드는 베아트리체를 깨워서 함께 내렸다.
“폐하.”
비월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려온 로드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비월! 정말 대단해!”
로드가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워프게이트 소환 때문에 시선을 끌어달라고 한건데, 그대로 엠파이어까지 점령해버릴 줄은 몰랐어!”
“황송하옵니다. 폐하께옵서 내리신 임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하다보니 운이 따랐을 뿐이옵니다.”
‘…말도 참 예쁘게 잘해요.’
로드가 활짝 웃었다. 비월은 정말이지 굴러들어온 복덩이라 할 만했다.
다른 마차에서 내린 가신들도 비월에게 한마디 씩 칭찬을 건넸다.(흥, 이번 전투는 잘 했다고 쳐줄게!) 비월은 방긋 웃는 얼굴로 가신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치엘로 쪽으로는 의도해서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치엘로도 딱히 말을 건네진 않았고 딴청을 피웠다. 두 사람이 다시 대화를 시작하려면 수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로드는 생각했다.
“들어가시지요. 폐하.”
“그래.”
로드가 앞장서서 왕궁으로 걸어갔다. 비월이 옆으로 따라붙었고, 나머지 가신들과 호위병들이 뒤를 따랐다.
휘황찬란한 카사르 왕궁의 입구를 올려다보며 로드는 비로소 실감했다.
‘히야, 이제 정말 카사르가 내 것이구나!’
로드 일행이 실내에 들어서자 일렬로 쭉 서서 기다리고 있던 카사르 귀족들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해왔다.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 있는 모습을 보니 이들은 모두 어비스에 협력하겠다는 자들인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제일 열심히 허리를 굽신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소인은 카사르의 집정관이옵니다. 폐하.”
“…아, 당신이.”
로드는 스파이들로부터의 정보를 떠올렸다. 보호트가 신들이 인정한 왕이라고 세간에 공표한 엇나간 신관. 보호트가 플레이어가 아니란 사실을 로드는 빤히 알고 있었으니 경계가 되는 남자였다.
“엠파이어는 어비스 왕실의 통치를 환영합니다! 자, 이쪽으로…! 소인이 모두 정리해 두었습니다.”
“…정리라고?”
로드는 그를 따라 왕궁의 홀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수많은 기사들이 구속당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감히 어비스에 끝까지 대항하려고 하던 자들이옵니다.”
집정관이 영웅담을 늘어놓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들은 엠파이어의 성문이 뚫렸을 때에도 왕궁에 모여 무의미한 항전을 하려 했습니다. 소인과 귀족들이 뜻있는 힘을 합쳐 제압했지요.”
“……으음.”
로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왕위에 보호트를 올려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짓을 벌이다니, 여러의미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로드는 기사들을 슥 눈으로 훑어보았다. 어이쿠야, 적대감 어린 시선들이 쏟아졌다. 하긴 언데드들을 영지에 풀어놓은 장본인이니 달가워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귀족들도 이럴진대, 영지민들의 반응은 어떨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리고 포박당해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기사는 출세하여 마스터나이트가 되자마자 포로 신세가 된 아론다이트였다.
‘여기 붙잡혀 있었나.’
그녀는 튼튼한 밧줄로 온 몸이 칭칭 감겨있었는데, 잔뜩 상기된 얼굴로 뜨거운 숨결을 내뱉고 있었다. 로드가 다가가서 친히 물었다.
“……어디 몸이 불편한가?”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로드를 보고는 갑자기 눈을 치켜떴다.
“내게 따뜻한 척 굴지 마!”
상처 입은 개가 으르렁거리듯,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로드는 아차 싶었다. 아마 그녀는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받았으리라. 잠깐이지만 따르던 군주를 둘이나 잃은 격이니 그 고통은 헤아릴 수 없…….
“난 포로야! 당신들에게 붙잡혀서 꽁꽁 묶여있다고! 그러니 날 좀 더 매도하라구! 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어라아?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네? 칼 아줌마.”
유니벨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론다이트가 귀신아라도 본 듯 몸을 떨었다.
“…다, 당신은!”
“관문에서 잘도 내 일에 훼방을 놓았겠다아?”
유니벨이 그녀의 얼굴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아론다이트를 따르던 기사들이 불같이 화를 냈다.
“…감히 어느 분께 손찌검을!”
“네놈들에게도 실낱같은 명예가 남아있다면 포로를 농락하는 짓은 그만둬라!
“저급한 어비스의 여자 같으니! 그 분은 대 카사르의 마스터나이트인 아론다이트경이시다!”
유니벨은 콧방귀를 뀌었다. 묶여있는 자들이 뭐라 한들 멈출 그녀가 아니었다. 그리고 정작 그런 굴욕을 받고 있는 ‘대 카사르의 마스터나이트’분께서는 더더욱 흥분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로드는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옥에 가둬라.”
당장 대화를 나누어 봐야 분노의 목소리 외에는 듣지 못할 것 같았다. 피차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병사들이 포로들을 일으켜 왕궁 밖으로 데려갔다.
“…저기, 집정관이라고 하셨사옵니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비월이 입을 열었다. 집정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무슨 일이신지요?”
“릴리라는 자는, 어디에 있사옵니까?”
그렇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작은 분노가 느껴졌다.
릴리는 퍼들스퀘어 전투에서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비월을 끌어내려고 했고, 그 일로 그쪽 영지민들과는 원한관계가 되었다.
“…그게, 사실은…….”
집정관이 슬그머니 말꼬리를 흘리더니, 이내 대답했다.
“이미 죽었습니다.”
로드와 가신들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릴리는 선대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하옵니까.”
로드가 힐긋 비월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이고는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뭐, 성격이 좀 비틀어져있긴 해도, 릴리 정도면 인재는 인재였는데 말이지.’
적어도 B급 지략형 영웅 급의 군사였을 터였다. 아깝긴 했지만 어차피 살아있다고 해도 어비스에서 써먹을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너무 원한관계가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로드는 미련을 털고는 고개를 돌려 가신들과 병사들을 보았다.
“지금 이 시간부로 선언한다. 이곳 엠파이어를 비롯하여 카사르국이 가졌던 모든 영토들은 나 로드 폴렌티아가 통치할 것이다. 이곳은 엄연히 나의 통치지이므로, 약탈, 살인, 강간 등의 범죄행위를 일절 금한다. 당분간은 음주 또한 삼가도록 하라. 우리가 승리한 것은 기쁜 일이나, 피차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일주일간은 영지의 정상화에만 힘쓰도록.”
“예, 폐하!”
로드가 정식으로 통치를 선언한 후에 티아는 직접 병사들을 통솔하여 영지 곳곳으로 보내도록 했다.
“주공, 전 카르프리와 글레이시온 영지측에도 연락하여 대표자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으겠다.”
“예, 통합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로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군사라는 직책은 참 바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 전, 전쟁 중, 전쟁 후 까지 할일이 산더미였으니까. 로드는 이제 나라의 규모도 커졌으니 군사진도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긴 전쟁이 끝났으니, 당분간은 내정의 연속이겠군. 아르곤, 하데스와 싸우기 위해선 확실하게 대국의 기틀을 다져놓아야 해.’
“야, 팬더.”
유니벨이 다가왔다. 그녀는 벌써 손에 서류판을 들고 재정관 모드로 돌아와 있었다.
“아까 쭉 돌아보고 오니까 문제가 많아. 특히 엠파이어의 영지민들은 우리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어. 어떻게 할 거야?”
“후후, 그거야 간단하지.”
로드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비책이 있는 거군요!”
로즈안느가 눈을 빛냈다.
“그래.”
“뭔데요?”
“이브를 부르는 거다.”
“…….”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니 이브 헬프 찬스를 쓸 때가 왔다. 일만 잔뜩 벌려놓고, 툭하면 불러서 고생시키는 것 같지만, 지금은 내정형 영웅들이 거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숙제 같이 좀 하자. 이브.’
*
상황이 일단락되고, 카사르 왕궁의 집무실에 들어온 로드는, 그동안 밀려있던 여러 가지 머리 아픈 이야기들을 보고받게 되었다. 특히 첫 번째로 들어온 보고가 충격적이었다.
“……정말이야?”
“오홍홍홍! 예, 폐하!”
통신 수정구의 스카파치노가 잔뜩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우리 마피아들이 큰 건 하나 했지용! 오홍홍홍!”
경과는 이렇다.
아직 보호트에게 살해당하기 전, 아크가 올리버의 목숨으로 실버시타델에 있던 비앙카를 협박해 어비스를 치도록 한 모양이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녀는 병사들을 긁어모아 1500의 병력을 이끌고 로드의 뒤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병력이 관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스파이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카파치노의 별동대가 움직여 급습했고 비앙카의 병력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미치겠군.’
여기까진 좋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적장인 비앙카가 사망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 오홍홍……. 폐, 폐하?”
공을 세워 들떠있던 스카파치노도 로드의 안색을 보고는 뒤늦게 표정이 굳었다. 로드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스카파치노를 탓할 수는 없겠지. 제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비앙카는 적대국에게 붙어 동맹국을 공격하려는 배신행위를 저질렀으니, 이쪽에서 어떤 보복을 가하든 정당방위다. 스카파치노의 입장에서는 본군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여 적을 사전에 처리해준 것이다. 하필 비앙카가 그 전투에서 죽어버려서 상황이 복잡하게 될 여지가 있었지만.
‘……올리버가 많이 화내려나.’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라고 들었다. 그가 국가 간에 일어난 상황임을 이해해줄지, 아니면 감정적으로 받아들여 분노할지, 아직까지는 그 반응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의 알란드는 힘이 없다. 비앙카의 죽음으로 어비스와의 결별을 선언한다면 로드는 아르곤과 싸우기 전에 그를 짓밟아둘 수밖에 없다. 사실 그쪽이 일처리 상으로는 편하긴 했다. 이제 어비스와 알란드와 사이에는 따라잡기 힘든 거대한 격차가 있으니까.
로드는 스카파치노에게 잘했다고 말해두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곤 정보부에게 연락하여 올리버에 대해 물었다. 그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 정보부에게 걸리지 않을 정도라면 아크가 철저하게 숨겨놓은 모양이었다. 한때 로드가 스파이들의 힘으로 게노세르크의 포로였던 비월을 구출해 빼돌리는 것으로 말렉을 크게 낭패에 빠트린 적이 있었던 만큼, 더욱 신경 썼을 것이다.
“…카사르 말고도 다른 영지까지 수색 범위를 넓혀.”
“예, 폐하!”
로드는 통신을 종료했다. 부하가 사고 친 걸 어떻게 무마할까 고심하고 있는데, 로즈안느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로—드니임!”
그녀가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인사를 해왔다. 로드도 비슷하게 팔을 들어 인사했다.
“왔어? 로즈안느.”
“헤헤.”
“이번 전투도 수고했어. 먼 타지까지 와서 고생이 많네.”
그녀의 본래 직책은 베틀린 특구의 대영주였다. 이렇게 일일이 전투에 참여할 위치는 아니었다.
“아녜요! 로드님의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아요!”
‘…역시 긍정적이군.’
차를 홀짝거리던 로드는 문득 로즈안느에게 시킨 일이 생각나서 말했다.
“도시 시찰나간 거 보고하러 왔지? 어땠어?”
“……아, 으음.”
그녀의 넘치던 에너지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쭈글해졌다.
“…좋지 않아요. 다들 어비스에 대해 극명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어요. 금방이라도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요.”
“끙, 역시 그런가.”
로드가 앓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이유는?”
“…역시 언데드들을 끌어들인 것 때문이겠죠.”
============================ 작품 후기 ============================
돌아왔습니다!
독한 감기 때문에 열이 심하게 나서 응급실까지 갔다왔지만.. 일주일 푹 쉬니 괜찮아졌네요 ㅠㅠ 지금은 컨디션 되찾았습니다!
쉰 만큼 이제 남은 편들 최선을 다해 작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완결까지 달려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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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프레어 / 그렇죠 ㅋㅋ 멸망보너스가 군무&농업&상업! 삼위일체
쿠죠죠타로 / 존재감 제로의 뒤통수? ㅋㅋㅋ
이즈니임 / 옳습니다! 베아는 행복입니다!
책읽는고래 / 수능 이제 정말 얼마 안남으셨군요! 열심히 하셔서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헬크랩 / 일교차가 진짜 사람 잡네요 ㅠㅠ
최카츄 / 감사합니다!! ^^
은아준 / ㅋㅋㅋㅋ 그러네요. 뭐 기사도 옵션이 추가되어도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하겠죠 (지못미 어비스..)
알테니아 / 여기있사옵니다!
쿨레라군 / 그러네요. 앞으로 두 사람은 계속 냉전관계일듯해요 ㅠㅠ
왜이리들다재밌지 / 문화시대는 이제 바로 코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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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콤MK /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니알라토텝 / 아르곤도 점령한 국가들 내정의 기간이 필요하니까요. 서로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싸워도 어비스의 군사력이 그리 쉽게 밀리지는 않아요!
@...(-1)... / 둘리라니; 그런 치명적인 자객을 보내시니 제 몸이 남아나질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