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9 문화시대 =========================
“아, 그 새끼들 문제야! 문제!”
로드와 로즈안느가 어비스의 좋지 않은 여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질펀한 욕설과 함께 유니벨이 씩씩거리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뒤따라온 치엘로가 로드와 로즈안느에게 상냥한 눈인사를 건넸다.
유니벨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이해가 안 돼! 어차피 우리가 아니었으면 엠파이어에 사는 사람들 전부 다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됐을 거잖아! 감사는커녕 왜 자꾸 우리한테만 뭐라 하는 건데?”
“괘씸함의 문제죠.”
유니벨을 지나쳐 사뿐사뿐하게 걸어간 치엘로가 소파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결국 언데드들을 영지 안에 풀어놓은 건 우리니까, 모든 원망이 우리에게 쏠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로드 쪽을 보며 눈을 찡긋해 보인다.
“그쵸오? 로드 오빠.”
“그, 그래.”
애교 섞인 달콤한 목소리와 살랑거리는 몸짓. 치엘로는 본인의 귀여움을 무기로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무서운 점이었다.
“흥! 놈들이 그렇게 들고 일어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구!”
유니벨이 그렇게 말하며 로드 쪽을 홱 돌아보았다.
“팬더! 알브헤임 때처럼 실력행사로 싹 다 갈아엎자! 그 놈들 처지에 감히 우릴 비난해?”
“안돼요.”
치엘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지금부터는 이미지 싸움이에요. 카사르전의 승리로 로드 오빠는 사실상 황제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됐어요. 모든 대륙민들이 오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거라구요.”
“흥, 밖의 놈들이 우릴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이야?”
“중요해요. 대륙민들은 2위국인 아르곤과 우리를 저울위에 올려놓고 계속 비교할 거예요.”
그녀가 두 손바닥을 펼쳐 위 아래로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전 대륙민들의 지지와 영주들의 지원이 아르곤 쪽으로 가면 곤란하다구요.”
“…….”
유니벨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지만 반박하진 않았다. 치엘로가 다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드 오빤 시험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렇잖아도 선입견 때문에 어비스를 보는 대륙민들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잖아요?
“윽.”
로드와 유니벨이 동시에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로즈안느가 소리 죽여 쿡쿡 웃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지금 바로 잡아야 해요. 그러니가 영지민들을 억압한다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안 된다는 거랍니다.”
“으으, 짜증나아.”
답답해진 유니벨이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번엔 로드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진 알겠어. 하지만 영지민들이 이렇게 대놓고 적대적이고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통치 자체가 불가능해.”
“……흐응, 그러네요. 일단은 화를 달래는 게 급선무려나요?”
강압적인 수단을 제외한 채, 지금 끓어오른 영지민들의 분노를 한 풀 꺾어 놓아야 했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하고 있던 유니벨이 갑자기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잠깐! 여기 사람들이 우리가 워프게이트를 썼다는 거 알아? 모르잖아! 그러니까……!”
“논란을 만들자는 거군.”
로드가 눈을 빛냈다. 유니벨의 머리에서 나온 것 치고는 괜찮은 생각이었다. 지금 어비스가 받고 있는 일방적인 적대감이 문제라면, 그 적대감을 진실공방으로 돌려버리고, 동시에 카사르에 우호적인 정책들을 함께 실행하여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면…….
“어비스스럽다아.”
치엘로가 주전부리를 와작와작 씹으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폄훼되자 유니벨이 빽 소리 질렀다.
“아! 뭐! 그럼 사실대로 말해서 사람들의 화를 더 키울까? 앙? 걔들이 우리 입장을 이해해 줄 것 같아?”
“하, 하지만! 집정관 님!”
로즈안느가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카사르의 영지민들도 적대국인 어비스와 켈타인이 동맹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거예요! 갑자기 영지 내에 출현한 언데드들을 워프게이트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요.”
로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적어도 워프게이트가 발현됐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
“그럼 언니 오빠드을! 이런 건 어때요?”
치엘로가 검지를 척 펼치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녀가 손가락을 돌려 자신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우리에게 덮어씌우는 거예요.”
“……뭐어?”
“간단해요. 워프게이트가 켈타인의 단독 행동이었다는 이야기를 퍼뜨리는 거예요. 마녀들은 나라를 무너뜨린 하데스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언데드가 된 동료 마녀들을 보고 격분한 고위 마녀가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초대형 워프게이트를 하데스군에 발현시켰다. 뭐, 이런 이야기?”
“…전투 중 돌발 상황의 연출, 그리고 어비스의 책임회피라는 거구나. 하지만 그럼 너희들은…….”
“제 1위국이란 건 이미지가 생명이라구요? 어느 한 쪽이 덤터기 쓰는 편이 낫죠. 그 대신……!”
치엘로가 수줍게 웃는 얼굴로 손가락 하나를 뻗었다.
“영지 하나만 떼어줘요.”
“…응?”
로드가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 곳이나?”
“네! 저도 책임지고 데리고 다니는 무리가 있는데 노숙시킬 수는 없잖아요. 남의 집에 눌러앉아 있는 것도 소문 나쁜 마녀들이라 피차 불편할거고…….”
“흥, 웃기지 마!”
유니벨이 벌떡 일어나 눈을 날카롭게 떴다.
“영지를 떼어주면, 너네 또 우리 몰래 이상한 수작 부리려는 거 아냐?”
“에에이, 너무해요! 유니벨 언니! 저희가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보셨잖아요.”
그녀가 서운한 기색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는 결정권자인 로드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여기 있는 로즈안느 언니도 대영주인데, 저도 여왕이니까 영지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요!”
“가신인 얘랑 타국 여왕인 너랑 같냐!”
“자, 그만.”
로드가 유니벨을 멈추게 했다.
“드러그팜에서 지내게 해줄게.”
카사르의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그녀에게 영지 하나 주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르곤을 상대하기 위한 핵심전력이었다. 대접에 소홀할 수는 없다.
치엘로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
“어머! 드러그팜이라면 언더하임 옆이죠? 가까워서 좋네요!”
“…뭐가 좋은데?”
유니벨이 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야 로드 오빠를 자주 보러갈 수 있으니까요.”
“귀찮게 찾아 올 때마다 그쪽으로 보낼 식량 팍팍 줄일 줄 알아!”
“헤헤, 언니이!”
“야! 껴안지 마!”
그녀들이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로드는 통신 수정구를 켜서 혁명단에 연결했다. 소문을 퍼뜨리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은 그들의 주특기였다.
이번에 복귀한 혁명단장 벤이 직접 연락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켈타인 측과는 이야기 된 사항입니까?”
“응.”
“그럼 바로 엠파이어에 잠복하고 있는 단원들에게 일러 작업에 착수토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
다음날, 영지 내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워프게이트를 열었던 것은 언데드들에게 동료를 잃어 분노한 켈타인 마녀들의 독단이었다는 것.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정황과 이름들이 소문에 오르내렸다.
물론 거짓말로 치부하는 자들이 대다수였기에, 상황이 크게 완화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방적으로 어비스가 욕을 먹고 있는 상황에서 논란이 생겨나며 의도한대로 진실공방이 가중되었다.
이 틈을 타 로드는 국고를 열어 대대적인 구휼정책을 시행하였고, 병사들을 풀어 무너진 도시를 재건했으며 죽은 전사자들을 모아 대규모 장례를 지냈다. 죽은 병사들에게는 기사 직위를 부여하는 등 카사르 사람들이 중요히 생각하는 ‘명예’라는 개념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으로 로드는 영지민들의 분노를 하데스에게 돌리려는 시도를 했다. 군사인 티아가 직접 왕궁 밖으로 나가 영지민들을 상대로 연설했다.
“카사르와 하데스가 동맹을 맺은 것은 알고 있다! 허나 하데스가 온 것은 동맹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크 더 라운드가 죽고 약해진 그대들을 집어삼키기 위함이었노라. 영지에 들어온 망자들이 문답무용으로 죄 없는 영지민들을 학살한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존재 자체가 모든 대륙민들의 위협이다.”
연설 다음은 언데드들의 처형식이 이어졌다. 전쟁 중에 병사들이 붙잡아 둔 언데드들을 처형하는 행사였다. 팔과 다리가 포박당했지만 격한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주위의 인간들을 죽이려 날뛰는 언데드들을 모습은, 영지민들의 원초적인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언데드들을 보란 듯이 화형시키자 영지민들은 환호했다.
언데드들을 불태우면서 티아가 외쳤다.
“하데스의 언데드들은 인류의 적이다! 어비스는 인류를 위해, 하데스를 완전히 멸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노라!”
사태 수습에 노력하는 로드와 가신들의 모습이 효과가 있었는지, 엠파이어 영지민들의 분노는 점차적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와아, 로드 오빠의 부하들도 제법인데요?”
창문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치엘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벤이라고 했나요? 그 혁명단장의 일처리도 좋았고, 분노의 방향을 언데드들로 돌리면서 인류의 이름으로 소속감을 형성한 티아 언니의 연설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럼, 그럼, 누가 키운 아이들인데.”
로드가 뒷머리를 받치며 킬킬거렸다.
“헤헤, 제 눈엔 영웅들이 플레이어를 키우면서 끌고 가는 것 같은데요?”
“시끄러워.”
로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카사르 영지민들이 우리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건 무리겠지?”
“어림없는 소리죠. 무조건 적대적인 마인드에서 조금 분산된 정도?”
“…그래. 그게 1차적인 목표였으니까 만족해.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차근차근 노력해나가야겠지.”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지휘관 창을 끄적거렸다. 치엘로가 입을 열었다.
“엠파이어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슬슬 돌아갈 생각이야. 너무 오래 수도를 비우는 건 좋지 않으니까.”
로드가 깍지 낀 팔을 뒤집어서 쭉 펼치며 말했다.
“돌아가서 문화시대 맞을 준비를 해야지.”
“아앗! 문화시대 부러워!”
============================ 작품 후기 ============================
저번주에 인생급 지독한 감기몸살 걸려서 고생한 이후로 패딩을 입고다닙니다. 그런데 또 사람 놀려먹듯 햇빛 쨍쨍... ㅠㅠ 일교차가 15도 가까이 오르락 내리락하네요; 으와아..
--------------
로리콤MK / 오옷! 복귀하자마자 쿠폰 줍줍! 그리고 위에 남겨주신 코멘! 무척 감동적이네요 ;ㅅ; 힘이납니다! 힘내겠습니닷!
Tntn12 / 함께 달려요!
아스칼 / 언데드를 도시에 푼게 이렇게 문제가 되네요
책읽는고래 / 아앗! 수능 공부하러 가셔야죠! ㅋㅋㅋ 그래도 가끔 머리 식히시는 것도 좋아요. 수능은 컨디션 싸움!
알테니아 / 일주일간 그리웠습니다. 비월을 찾는 저 외침을;
EMVER / ㅋㅋㅋㅋㅋㅋ 3S정책 말씀하시는거죠? 스크린! 스포츠! 그리고... 음... 어린이들은 잡시다. 어린이들은...
헬크랩 / 나중에 가웨인에 대해서도 나올겁니다!
쿨레라군 / 대국적으로 큰 시야를 보는 인물의 필요성이군요
벌레 / 벌써 2팀까지 준비를 ㅋㅋㅋㅋㅋㅋㅋ
니알라토텝 / 어비스의 대한민국화;;
...(-1).../ 간추리자면 로드 삽질 -> 주변인 극복 -> 로드 헤벌레 로군요. ㅠㅠ 아이고 주인공아
박성빈 / 날카롭군요. 알란드에 대한 이야기도 찬찬히 풀어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