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0 문화시대 =========================
로드가 엠파이어로 이브를 소환하려 했지만, 그녀는 중앙의 업무량 때문에 도저히 언더하임을 비울 수 없을 것 같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로드는 그녀의 생각을 존중했다. 이브가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니까.
전쟁 때문에 왕도를 너무 오래 비웠다. 다행히 엠파이어의 적대적인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았기에, 로드는 언더하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영지의 통치는 그나마 기사들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키리안에게 임시로 맡겼다.
로드가 언더하임에 도착한 날에는 역대 최고로 성대한 귀환식이 열렸다. 전 대륙민들의 무시와 손가락질을 받던 낙오자들의 나라가 천하의 카사르마저 무너뜨린 것이니, 국민들에게는 더 없이 감격스럽고 자부심이 생기는 일이었다. 본토뿐만 아니라 다른 점령지의 영지민들 또한 어비스의 통치를 받는 것을 수긍하는 계기가 되었다.
귀환식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승전 축제가 이어졌다. 이런 날에 취하지 않으면 언제 취하겠는가! 로드도 술친구 피닉스에 이끌려 축제에 가려고 했으나…….
“폐하, 그럼 아직 카사르 영지의 대영주는 못 정한 건가요?”
이브에게 붙잡혀 집무실에 남게 되었다.
“…응. 일단 키리안에게 임시로 맡겨놨는데.”
그녀가 눈을 감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주인이 사라진 영지는 빠른 시일 내에 통치자를 선정해서 힘을 실어주셔야 합니다. 방치하면 혼란이 커질 뿐이에요. 폐하께서는 언더하임에 들어오실 때가 아니셨어요.”
또박 또박 논리적인 이브의 꾸중에 로드는 급격히 의기소침해졌다.
“그래도…….”
“…?”
부끄러운 듯 운을 뗀 이브는, 그간 잘 보인 적 없던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돌아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폐하.”
“이, 이브……!”
로드는 감격에 목이 멨다. 어비스에서 처음 만난 영웅이자,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에덴인인 이브는 이세계 생활의 버팀목이자 일종의 정신적 지주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로드에게 이렇게 진심어린 꾸중을 할 수 있는 인물도 그녀밖엔 없으리라.
로드가 재회의 기쁨을 빌미로 이브에게 안겨보려고 마음먹는 순간, 갑자기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오셨군요! 폐에하아아아!”
애니록스가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와 로드에게 엉겨 붙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폐하! 그동안 저 혼자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맨날 방에 틀어 막혀서 정보 셔틀만……!”
“…그래,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애니.”
로드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를 품에서 떨어뜨렸다.
“내가 없는 동안 별 일 없었지?”
“언더하임이야 문제없죠.”
애니록스가 재회의 감격에서 벗어나 대답했다.
“클랜들도 말썽 안 피우고 있고, 마왕 리리스 쪽도 카사르에 다녀온 이후론 잠잠합니다.”
“그래, 다행이군.”
로드는 잠시 눈을 감고 평온을 만끽했다. 이 모래바람, 이 후덥지근한 날씨가 그리웠다. 역시 이래나 저래나 집이 최고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예요.”
이브가 말했다.
“기존 영지들도 아직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번에 또 영토가 확 늘어나 버렸으니까요.”
“…나한테 너무 그러지 알아줘, 이브. 먼저 쳐들어온 건 카사르 쪽이라고.”
로드가 농담을 던졌지만 이브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로드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 그래도 우리 방침은 운영하긴 편한 편이잖아? 어비스 중앙집권이지만 기본적으로 각 영지의 문화와 자치권을 인정하니까.”
“그렇기는 하죠.”
어비스가 채택하고 있는 ‘통합 영지 운영체계’에서는 왕이 파견한 대영주들이 지방 영지들을 다스리게 된다. 기존의 통치조직이었던 지방 왕실이 사라져도 그 나라 출신의 인사들이 대영주가 되어 그곳의 문화와 정책을 유지하게 되므로, 영지민들은 나라가 바뀌어도 큰 혼란 없이 안정적으로 생업에 치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각 영지에서는 특산품을 위주로 생산하도록 ‘할당량’을 지시해 두었기 때문에, 타영지간의 교류는 필수불가결 적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중앙이 조율하므로, 덩달아 지방에 미치는 중앙의 영향력 또한 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대영주가 없는 ‘빈 영지’들이에요.”
이브가 몸을 일으켜 지도가 붙은 보드판에 글자를 휘갈겨 썼다.
아로게쓰의 대영주 - 키리안.
알브헤임의 대영주 - 티아 그란디네.
게노세르크의 대영주 - 케이론
베틀린의 대영주 - 로즈안느 페터 베틀린.
오펙투스의 대영주 - ?
카사르의 대영주 - ?
카르프리의 대영주 - ?
글레이시온의 대영주 - ?
“…정말이네. 이번에 세 개국이 추가되면서 대영주 자리가 절반이나 비게 됐구나.”
진지하게 지도를 보고 있던 로드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오펙투스는 아직도 대영주가 없어?”
“네.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전에, 카사르의 침공을 받아 신경 못쓰게 되어버렸으니까요. 오펙투스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지 너무 오래 됐어요. 더 시간을 끌면 오펙투스의 토착세력이 일어나서 까다로운 내부의 적이 탄생할지도 몰라요.”
“…그런 건 곤란하지.”
로드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피닉스를 보내. 먼저 군사력으로 오펙투스의 핵심 도시인 ‘오즈’를 점령하게 하고, 오펙투스측에 연락해서 대영주 후보를 언더하임으로 올려 보내도록 해. 내가 직접 대면해서 판단하겠어.”
“알겠습니다. 폐하.”
“…그런데 그 오펙투스의 마도사는 어떻게 됐으려나?”
로드의 중얼거림에 애니록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마도사 ‘멜로디 스펠위버’는 행방불명입니다. 오펙투스에도 스파이를 보내보았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만은 전무합니다. 영지 내에선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갑작스런 인기척에 로드와 이브가 잠시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또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다들 그러지 마세요! 상처 받는다구요!”
애니록스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미, 미안해요. 애니.”
이브가 무안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멜로디라, 알브헤임의 여왕 플로라를 단독으로 암살했을 정도니까 실력은 확실한 녀석인데… 대영주 제안을 하면 맡아줄 의향이 있을까?”
“절대로 없을 걸요.”
애니록스가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어비스군에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스승과 주군, 모두를 빼앗아간 것이 우리니까요.”
“……그랬지.”
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머리 아프단 말이야. 원래는 ‘왕실’을 잃은 영지민들은 결과에 깔끔히 승복하고 새로운 왕실을 따르는 게 대륙의 암묵적인 룰 아니던가? 그래야 그 사람들도 하루 빨리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고 말이야.”
“…사람의 마음이란 건 그리 간단하지 않으니까요.”
이브가 말했다.
“아무튼, 그만한 실력자가 어비스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면 곤란해. 정보부는 서둘러 그녀의 행방을 찾아낼 것. 필요하다면 수배를 해도 괜찮아.”
“예, 폐하.”
그때 문 밖에서 “똑. 똑.” 정중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로드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벤.”
단정한 연갈색 머리카락에 뿔테 안경을 쓰고, 세련된 파란색 넥타이와 다리까지 내려오는 하얀색 제복을 걸친 그는 TV에서 막 튀어나온 유명 배우처럼 말끔한 모습이었다.
“모두 여기 계셨군요.”
벤은 모두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 뒤에 자리에 앉았다.
“이걸로 내정파들이 모두 모였네. 혁명단 쪽은 어때?”
“폐하께서 일을 벌이신 덕분에 턱없는 인력난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하.”
이브든 벤이든 필터링 없이 즉각 튀어나오는 원망들. 어째 내정파들은 영토가 늘어나면 싫어하는 듯한 눈치였다.
‘하기야 혁명단들은 지금이 가장 바쁠 때니까.’
그들은 지금 나라의 ‘안정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적국 영지에 숨어 들어가 논란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는 반대로, 점령지의 관중들을 대상으로 어비스에 대한 좋은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들이 가장 많이 신경 쓰는 것이 ‘신분제 철폐’에 대한 것이었다.
어비스는 다문화의 나라이고, 평등의 나라이다. 신분제가 없는 것은 어비스라는 나라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로드는 타국의 문화와 자치권을 존중하지만, 어비스의 이름으로 통합된 이상 ‘체제’는 예외 없이 모든 영지가 따라야 한다는 주의였다.
신분제를 완전 철폐하는 것에 대해, 로드와 벤은 이해관계를 같이했다.
“카르프리, 글레이시온 쪽은 수월합니다. 그쪽도 귀족이란 존재가 있지만 왕실의 몰락과 함께 큰 영향력을 상실한 상태고, 일반 백성들도 신분제 철폐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사료됩니다.”
“그거 다행이네.”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사르는 조금 골치 아플 것 같습니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안경을 고쳐 쓰는 벤의 모습에서 유명 배우의 화보 촬영 느낌이 물씬 풍겨 나왔다.
“뿌리부터가 신분제 국가이고, 무엇보다 제 살만 찌우는 무능한 대륙 귀족들과는 달리 카사르의 귀족들은 최전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실력자들이니까요.”
“그래, ‘기사’가 곧 ‘귀족’이니까.”
“그곳은 평민들마저도 기사가 되어 출세하는 로망을 가진 듯 합니다. 귀족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선망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영지민들은 신분제 철폐는 곧 기사의 몰락이라며 극구 반대하고 있습니다.”
나왔다. 문화의 차이. 통합에 있어 가장 어려운 장벽이었다.
”…기사라는 직위는 유지시켜줄 수 있는데, 그런 걸로는 부족하려나?”
“그 정도로 합의가 가능하다면 벌써 저희 혁명단들이 군중들을 설득시켰을 겁니다.”
로드가 팔짱을 끼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흠, 그렇다고 카사르 영지만 신분제를 인정할 수도 없고.”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벤이 딱딱하게 말했다. 물론 신분제와 귀족을 극도로 싫어하는 벤의 말이 아니더라도, 로드도 이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양보할 수 있는 게 있고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
이미 모든 영지가 어비스로 편입되며 신분제를 버렸다. 카사르만 예외를 둘 수는 없었다. 문화 교류 측면에서도, 카사르만 귀족이라는 예외 신분이 있으면 혼란이 생길 뿐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로드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이브, 벤, 애니록스 모두 눈을 빛내며 로드를 바라보았다.
“카사르의 전설인 가웨인이 ‘평민’으로서 카사르의 대영주 자리에 앉는 거야.”
“……아!”
“전설적인 기사인 그녀가 신분제 폐지를 옹호한다면, 다른 기사들의 적대감도 줄어들 수 있어. 그리고 우리가 계속 고민했던 대영주 문제도 해결되는 거지.”
“확실히 카사르의 통치자에는 그녀만한 적임자는 없겠네요.”
이브가 동의했다.
“폐하. 우릴 도왔다는 그 카사르의 신관이란 자는 어떤가요?”
애니록스가 물었다.
“아, 그 집정관? 너무 속물적인 인간이라 믿을 수 없어.”
“신의 뜻을 왜곡하여 민중에게 공표하다니! 그는 신관으로서 선을 넘었어요.”
같은 신관인 이브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화를 냈다. 로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카사르의 대영주 후보는 가웨인으로 다들 동의하는 거지? 그녀에게 사람을 보내보자고.”
============================ 작품 후기 ============================
알테니아 / 점점 참신해지고 있군요; 읍읍이에 이어서 이번엔 알파벳..
책읽는고래 / ㅠㅠㅠ 얼마 안남았습니다! 힘내시길!
T스톤 / 가웨인도 곧 보실수 있을듯!
Tntn12 / 헉; 벌써 뒤통수 걱정 ㅠㅠ
벌레 / 매니저까지 영입했군요; 완전체로 달려가는 그룹
overlord123 / 감사합니다!
박성빈 / 말씀하신대로 정리중입니다! 정리 이후 바로 문화시대!
쿨레라군 / 대륙스케일로 파악하는 인물은 너무 많은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하니 과로사 하고도 남을것 같네요
Muspel / 행방불명!
니알라토텝 / ㅋㅋㅋㅋ 천재를 범재로 만들고, 그 범재를 갈구고 또 갈궈서 만든 사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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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콤MK / ㅠㅠ 그러네요; 안보신듯...
@...(-1)... / 어째 켈타인의 마녀들보다 더 지원으로 오는 마녀들이 더 센것같은건 제 착각이려나요 ㅋㅋㅋ
@빛과하늘 / 내일부터 비올것 같네요. 연참은 진도 빼놓고 외전 올릴때 연참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당!
@아프게했어 / 황제가 로리콘이라니! 실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