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1 문화시대 =========================
“아오오! 이 뇌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다 못해 점포임대로 통째로 넘긴 머저리 새끼들아! 부가가치세 수취는 잘 했냐?”
우지끈! 유니벨의 발길질 한 번에 나무수레가 박살이 났다. 주위의 상인들이 ‘히익!’하고 겁먹은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가 상인들에게 다가오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입구멍에 피어싱이라도 처박은 게 아니라면 말 좀 해보시지? 이번 분기 적자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오! 그리고 누가 허락도 없이 테라를 가져다 팔래? 앙? 잠깐 자리 비운 사이 아주 창의적으로 개판 쳐놨네! 돗자리를 팔라고 내줘도 시장 바닥에 깔고 앉아 야바위로 돈 벌 새끼들아! 내가 카사르에 가있는 동안 쥐어 팰 사람이 없어서 천국이었지? 그럼 이번엔 지옥 체험도 한 번 맛봐라!”
상인들의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그들을 골목의 벽으로 몰아놓은 그녀가 양 손을 허리에 툭 올리고는 눈을 부라렸다.
“너희가 마음대로 장사 허가한 상단주들! 지금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
“예, 옛! 재정관님!”
제일 먼저 대답한 뚱뚱한 상인이 다급히 뛰쳐나갔다.
“자, 자네!”
“나도 같이……!”
“나머진 동작 그마안!”
쿠우웅! 유니벨이 마력을 실어 발을 굴렀다. 도망치려던 상인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누가 전부 가도 좋다고 했어? 사람 부르는 역할은 한 명이면 충분하잖아.”
소름끼치는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유니벨이 뿌득 뿌득 손가락 관절을 풀었다. 절체절명의 상인들은 머릿속으로 유서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헛! 재정관 님!”
그때 한 상인이 놀란 눈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유니벨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무슨 개수작이야? 내가 돌아보면 도망치려고?”
“그, 그게 아니라! 재정관님 뒤에……! 뒤를 좀!”
“…아오.”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본 그녀의 얼굴이 이내 사과처럼 빨개졌다. 로드와 베아트리체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바빠 보이네. 나중에 다시 올까?”
로드가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앗! 아앗!”
당황한 유니벨이 마구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뒷짐을 쥐고 어색한 기침을 했다.
“너, 너희들은 이만 꺼…… 아니, 가도 좋아.”
“…넷?”
귀신도 때려잡는다는 재정관의 의외의 모습에 상인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때 그녀가 상인들을 돌아보며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빨. 리. 꺼. 지. 라. 고!’
그제야 상인들은 엄청난 속도로 산개하여 사라졌다. 시선을 되돌린 유니벨이 민망한 듯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둘 다 궁에만 콕 박혀 있더니, 상업 지구는 무슨 일로 왔어?”
“아, 하버트가 신작물을 개발했다고 난리를 쳐서 가보려고.”
유니벨이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게 예산을 몰아줬는데 이제야 발명했단 말인가.
“상업 쪽은 어때?”
로드의 물음에 유니벨이 팔짱을 꼈다.
“이상해.”
“응? 무슨 일 있어?”
“중립 상인들이 갑자기 언더하임에 우르르 몰려들어선 상단 허가를 내달라고 성화야. 평소엔 어비스는 신뢰성 제로라며 개무시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지 몰라.”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로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에 획득한 유나이티드의 국가 고유능력이 적용되고 있군.’
그 능력의 이름은 ‘황금궁전’. 나라에 ‘신뢰보정’이 붙고 대륙 각지에서 상인들이 몰려들게 하는 유나이티드의 핵심 국가고유능력이었다.
“……팬더. 또 뭘 그렇게 혼자 실실 쪼개?”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상인들은 계속 모일 테고 대형 계약도 많이 들어올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유니벨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점쟁이라도 만났어?”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잘난 척 하는 로드의 모습에 유니벨이 입술을 삐쭉이고 있는데 그녀의 시야에 로드와 베아트리체가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흥.”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네요.”
유니벨이 몸을 빙글 돌려 등을 보였다.
“방해꾼은 이만 갈 테니까.”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로드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시연 끝나면 저녁 먹으러 갈 건데, 너도 올래?”
“…….”
겨우 식사 제안 따위에 화가 사르르 녹는 것을 느끼며, 유니벨은 한숨을 쉬었다. 왜 저런 녀석 따윌 좋아하게 되서 이런 고생일까.
그리고 머릿속의 한 편에선 타국 상단주와의 저녁 약속이 떠올랐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가위표를 그어놓고는 뒤돌아보았다.
“가게는 내가 고를 줄 알아! 각오하라고!”
“……무슨 각오까지야.”
로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베아트리체가 손을 당기며 로드를 부르더니 뒤를 가리켰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성난 소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상인이었다.
“재정관이 저기 있다!”
“유니벨 재정관! 부디 우리에게 상단 개설 허가를!”
“나, 몰라? 나! 브라반 상단주요! 흑익 시절부터 같이 뛰었잖소!”
“비용은 얼마든지 감수하겠으니 상담을…!”
로드는 어안이 벙벙했다. 유니벨이 말할 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저 정도였을 줄이야.
“귀찮아지기 전에 피해야겠어.”
유니벨이 윙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이따 저녁에 봐!”
그녀가 다리에 마력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상인들이 그 뒤를 우르르 따랐다. 로드와 베아트리체는 치이지 않기 위해 벽에 딱 붙어 있어야 했다.
“…유니벨도 고생이네. 우리도 얼른 가자. 베아야.”
“네, 주인님!”
상인들이 모두 사라지자 두 사람도 골목을 빠져나왔다.
*
과학.
혀와 입술을 움직여 이 단어를 발음해 보라.
감동적이지 않은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란 말인가! 소리 내어 발음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감격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정신을 가눌 수가 없다.
과학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도 완벽하지만, 여기서 동사를 붙여 문장으로 만들면 살아 꿈틀거리는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다. 과학과 어울리는 동사는 이 자연계에 단 하나뿐이다.
위대하다.
그렇다. 그리하여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과학은 위대하다아아아아아아!”
하버트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든 상관없었다. 그의 한 손에는 푸른빛을 띠는 옥수수가, 다른 한 손에는 씨앗이 든 봉투가 들려있었다.
드디어 해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결국엔 완성했다! 어비스의 지질에도 뿌리내릴 수 있으며 적은 물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개량 작물을! 어비스의 고질적인 식량난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파란 옥수수가 그간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하버트는 영광스럽게도 자신의 이름을 붙어 ‘하버트 옥수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신없이 달려가니 마침 상업지구 외곽지역의 약속장소에 다 왔다. 마침 그의 눈에 그의 눈에 로드와 베아트리체가 보였다.
“폐하! 폐하아아!”
로드에게 다가간 그는 저질체력인지라 잠시 숨을 헐떡일 시간을 가진 후에 말했다.
“……허억! 허억! 폐하! 제가 드디어 완성시켰습니다! 과학은 위대하다아아아아!”
격한 기쁨에 괴성을 질러대던 하버트가 무릎을 꿇고 양 팔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진정해, 하버트.”
“완성시켰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될 역사적인 작물! ‘하버트 옥수수’를!”
“……꼭 그런 작명이여야 하니?”
하버트가 파란색 옥수수를 척 뻗었다.
“이제 언더하임도 식량 걱정은 끝인 겁니다!”
“…….”
그런데 상관의 반응은 당초 하버트가 예상한 것과는 달리 무덤덤했다. 로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옆을 가리켰다. 하버트의 얼굴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앞에 보이는 광경은 언더하임에서 보기 힘든 울창한 초록색의 향연이었다. 이곳은 상업지구 뒤편에 있는 텃밭이었는데 평소엔 황무지처럼 버려진 땅이었다.
“허허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중년의 농부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옥수수를 심으면 수확량이 1/4만 나와도 다행인데 올해는 풍년입니다! 대풍년!”
농부가 소쿠리에 담긴 윤기가 좌르르 도는 옥수수를 그들에게 건넸다. 베아트리체는 옥수수를 받자마자 덥석 물었다.
“……!”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뺨을 오물거렸다.
“어때? 베아야? 맛있어?”
“어, 어떻습니까! 단장!”
로드와 농부가 긴장한 눈으로 베아트리체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입에 든 내용물을 오물거리면서 방긋 웃어보였다.
“마싰어요!”
“오오오오오오!”
농부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잘 됐네요. 어비스에 풍년이라니.”
“하하하! 언더하임에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이! 이게 모두 폐하의 은덕입니다!”
베아트리체가 두 손을 내밀었다.
“옥수수 더 주세요!”
“얼마든지요! 단장! 하하하하!”
그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때.
“…….”
그 옆으로는 완벽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하버트가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기껏 첨단 옥수수를 개발해왔다니 갑자기 언더하임에 옥수수가 난다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 하지만! 저의 역작인 ‘하버트 옥수수’도 맛으로는 지지 않습니다!”
하버트가 번쩍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에 쥔 시퍼런 옥수수를 베아트리에게 척 내밀었다.
“드셔보시지요! 단장! 특제 ‘하버트 옥수수’를!”
“…….”
베아트리체가 거부감이 생기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시퍼런 옥수수는 보는 것 맛으로도 식욕이 감퇴하는 것 같았다. 곡물인데 비린내 비슷한 냄새도 났다.
“……하버트. 이거 정말 먹을 수 있는 거 맞아?”
로드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묻자 하버트가 흥분하며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폐하! 저 하버트입니다! 키메라를 만든 게 누굽니까! 하버트 시약을 만든 게 누굽니까아아아!”
“…알았어, 알았어.”
로드가 베아트리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퍼런 옥수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입 베어 물었다.
“…….”
긴장감이 흘렀다.
“후후! 맛없을 수가 없지요! 노력이 다릅니다! 그냥 땅에 심고 물 줘서 자라는 곡물과는 차원이 다른 노력이 가미되었단 말입니다!”
하버트는 가장 긴장한 표정으로 열심히 떠들었다. 그때 베아트리체가 툭 옥수수를 떨어드렸다.
‘……!’
로드는 경악했다. 베아가 먹을 것을 손에서 떨어뜨리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팔굽혀펴기를 하던 유니벨이 굽히는 거리가 짧아졌다고 말하는 것과 동급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으아앙! 주인니임!”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로드에게 달라붙었다. 괜찮다며 등을 두드려준 로드가 하버트를 찌릿 노려보았다.
“…애한테 뭘 먹인 거야?”
“이, 이럴 수가…! 내 옥수수가 맛……없다니?”
하버트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과학자가 농부에게 지다니. 고작 농부 따위에게…….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농부가 하버트의 눈치를 보더니 옥수수밭으로 도망쳤다. 의기소침한 얼굴의 하버트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왜?”
“그냥 일시적인 현상이겠지요? 갑자기 언더하임에 옥수수가 난다니, 풍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내년되면 다시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겠지요?”
로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지금의 어비스는 카르프리의 국가고유능력인 ‘데메테르의 가호’ 효과를 받고 있다.
“꼭 그렇지는 않을 걸.”
“으아아아! 어째서어어어!”
하버트는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로드는 졸지에 울고 있는 소녀와 아저씨를 한꺼번에 달래야하는 상황이 됐다.
“베아야! 돌아가면 네가 좋아하는 바비큐 먹으러가자! 응? 바비큐! 하버트! 네 작물은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야! 아무리 그대로 어비스에서는 네 작물의 수확량이 압도적일 테니까! 정 안되면 가축들 사료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료? 지금 사료라고 하셨습니까!”
하버트가 시뻘게진 눈으로 소리쳤다.
“이 ‘하버트 옥수수’는 인류를 구원할 최후의 보루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고작 가축의 사료로 쓰라구요? 그럴 바엔 차라리 제가 다 먹어버리겠습니다!”
하버트가 떨어진 퍼런 옥수수를 주워들어 한입 크게 베어 먹었다.
“꾸에엑!”
“너도 맛없는 거냐!”
수년간 개발해온 대체 작물 연구는 이렇게 훈훈하게 종결되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승리로 얻은 멸망보너스로 내정이 훨씬 쾌적해졌네요.
그보다 농업관련 패시브를 가지는 순간 대체 작물 개발 완료.. 하버트 당신은 대체...
--------------------
책읽는고래 / 책읽는고래님 화이팅!!!
알테니아 / 히이이이익 ㅋㅋㅋㅋ 알파벳 다음은 달력ㅋㅋㅋㅋㅋㅋㅋ 참신하신거 봐
로리콤MK / 우선 내정부터!
아프게했어 / ㅠㅠ.. 대영주 자리는 금방 채워요!
약이라도한잔 / 십삼월
벌레 / 기사돌 ㅋㅋㅋㅋㅋ
Tntn12 / 자신의 길을 가는 그 우직한 모습! 멋집니다. 베아는 사랑입니다.
할레데임 / 아니, 멸종된줄 알았던 티사모가 여기 계셨군요!
쿨레라군 / 마..틴...? 이런 죽었군요
니알라토텝 / 히익! 지금 히로인들도 전부 출현시키면서 관리하기 넘나 힘든것인데!
-----
@ ...(-1)... / 비월도 원하면 당연히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죠! 그리고 군단장이면 대영주에 꿀리지 않습니다!
@JangSEE / 1.적도 당연히 정보전에 대한 대비를 했습니다. 2. 전쟁전부터 모략으로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균열의 징조는 있었지만 처음에 카사르의 영웅진은 탄탄하고 사이좋은 모습이었죠. 전쟁이 진행되면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고 로드는 자연스럽게 그 부분들을 부각시키고 사람들을 흔든겁니다. 릴리가 아크를 의심하게 된 계기가 뭐였죠? 퍼시벌은 처음부터 미치광이였나요? 가웨인이 아크의 등을 돌리게 한 결정적인 이유? 아크가 비관의 늪에 빠지게 된 까닭? 전부 어비스와의 전쟁이 계기였습니다.
@overlord123 / 본래는 노블만 연재할 생각이었으니 컨텐츠 연재 제안이 중간에 들어와서 씬은 넣지 못하게 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