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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275화 (275/296)

00273 <외전> 야식전쟁 =========================

적적한 밤, 로드의 집무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서류의 산에 파묻힌 채 업무와 씨름하는 금발에 다크서클 짙은 왕의 모습. 이제는 집무실 풍경 안에 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없다면, 보는 사람이 어색함을 느낄 만큼 일주일 내내 똑같은 모습이었다.

서류에 도장을 쾅! 소리가 나게 찍은 로드가 ‘결재 완료된 서류 더미’위에 한 장을 올려놓은 뒤,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결재 필요한 서류’에서 한 장을 꺼내 자신의 시야 앞에 놓았다.

일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음 달 열릴 베틀린시티 연극의 미등록 악기 사용 허가? 아니, 그런 건 거기서 좀 알아서 하지! 이런 것까지 왕의 결재를 받으러 올려 보내면 어쩌란 거야? 만돌첼로? 이건 무슨 악기인지도 모르겠네!’

“로드 오빠아.”

처절한 업무의 전장 속에서, 갑자기 달콤한 여자애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지만 로드는 그리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치엘로가 소파위에서 뒹굴 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모자도 벗고 부츠도 벗고, 맨발로 소파에 올라가서 검정 스타킹으로 감싼 다리를 번갈아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아주 자기 집 거실이 따로 없다. 가끔 허공에 손짓을 하는 걸 보니 지휘관 창을 띄워놓고 있는 것 같았다.

로드가 힘 빠진 소리로 말했다.

“…날 놀리려 온 거냐? 치엘로. 네가 왜 여기 있는 건데?”

“심심해서 놀러왔죠.”

“난 바빠!”

로드가 그렇게 대꾸하자 치엘로가 ‘피.’하고 토라진 소리를 냈다.

집무실에선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와 치엘로가 몸부림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종종 들릴 뿐, 조용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흠, 생각보다 얌전히 잘 있네? 쟤 성격이라면 놀아달라고 때 쓸 줄 알았더니.’

로드가 곁눈질로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엎드린 자세가 불편해졌는지 몸을 뒤집으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짧은 스커트 자락이 팔랑거리며 은밀한 절대구역이 드러나려 했다. 로드가 얼굴을 붉히면서도 눈에 힘을 주려는 순간.

“로드 오빠아.”

“왜!”

아차, 실수했다. 깜짝 놀란 나머지 너무 빠른 타이밍에 대답해 버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훔쳐본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배고파요. 김치볶음밥 만들어줘요.”

“……뜬금없네. 그리고 에덴에 김치가 어디 있어?”

냉랭한 답변이 돌아오자 치엘로는 뺨을 불룩 부풀리며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치마안! 저는 한식 먹고 싶단 말이에요!”

가식과 어리광이 몸에 베여있는 그녀. 그것들이 꾸며낸 행동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정 떨어진다거나 재수 없다고 느끼기에 마련이지만, 이상하게도 치엘로는 예외였다. 마치 TV속 배우의 원래 성격이 그렇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 연기에 푹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치엘로는 어비스의 여자 가신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냈다. 실로 연구대상이라는 생각을 하며, 로드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졸라봐야 없다니까 그러네.”

“전엔 여기 언니들이랑 삼겹살 구워먹었다면서요? 와, 진짜! 저는 쏙 빼놓고!”

“그때 드러그팜에 있었던 네 잘못이지.”

로드가 문득 생각난 듯 치엘로를 바라보았다.

“너 혹시 김치 담글 줄 알아?”

“치엘로는 곱게 자라서 김장 같은 거 해본 적 없어요.”

“…자랑이다. 이것아.”

얘한테 뭘 기대하겠는가. 다시 깃펜을 끼적거리던 로드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아, 야밤에 먹을 거 이야기는 왜 해가지고……. 갑자기 족발이 먹고 싶어졌잖아!”

드디어 로드가 반응을 보이자 그녀가 고개를 쏙 들며 눈을 빛냈다.

“저는 치맥이요! 바삭바삭한 튀김옷과 시원한 맥주의 조합!”

“난 오징어 들어간 해물파전에 막걸리. 만들어 줘.”

“요리 못한다니까요.”

“…생활력 꽝이네. 저래서 누가 데려가려나.”

그 말에 발끈한 치엘로가 몸을 일으켜 로드를 곁눈질로 째려보았다.

“그러는 로드 오빠는 뭐 만들 줄 아시는데요!”

화가 난 모습도 귀엽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드가 대답했다.

“생활음식 전반.”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요?”

로드는 바로 머릿속에 떠오른 음식을 내뱉었다.

“……으, 음. 냉동만두?”

“그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걸 데우는 거잖아요! 조리는 전자레인지가 다 하고요!”

“…짜, 짜파게티?”

“물 끓이고 면 넣고 하는 걸 빼면 인간이 할 일이 뭐가 있는데요!”

“무, 물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데!”

“바보! 짜파게티는 면을 불렸다가 물은 버리는 거거든요!”

“…….”

로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불고기 덮밥.”

“어머, 진짜요?”

“편의점 3분짜리 도시락 한정.”

치엘로가 한심하다는 듯 ‘어휴’ 하는 한숨소리를 냈다.

“누가 게임폐인 아니랄까봐.”

로드가 불쾌한 얼굴로 눈썹을 모았다. 저런 말은 듣기 싫었다. 게임폐인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나름 커뮤니티에서는 유명한 게임폐인이었으니 자부심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임폐인이라고 놀리는 건 참을 수 없다!

“네가 그런 소릴 할 처지냐? 여자애가 파전도 못 부치면 좀 문제 있는 거 아냐?”

“어머머, 못할 수도 있죠! 그런 소릴 하시니까 로드 오빠가 여자 친구가 없는 거예요!”

“…윽! 아무리 그래도 인신공격은 하지 말지?”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요! 오빠가 먼저 절 이상한 여자로 만들었잖아욧!”

한바탕 싸운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며 무너지듯 책상과 소파에 기대었다.

“…입맛 확 당기는 매콤한 짬뽕 먹고 싶어요.”

“난 칼칼한 호박 된장찌개.”

“아삭아삭한 열무김치.”

“국물 자작한 오삼불고기.”

“호로록 라면.”

“……크윽.”

로드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라면 인정이다. 진심으로 라면 먹고 싶다.”

“히잉! 뭐하시는 거예요! 빨리 가서 라면 끓여오란 말이에요!”

“준비된 재료가 있으면 물조절은 잘 할 자신 있는데.”

“무슨 왕이란 사람이 이렇게 능력이 없어요!”

“…시끄럽다.”

두 사람이 라면 라면 거리고 있는 그때, 이브가 문 뒤에서 그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라면이 뭐지?’

*

다음날 이른 아침, 이브는 주방으로 가서 메이드들을 불러 모았다.

“…정말로 라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가요?”

메이드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음식은 생전 처음 들어봐요.”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 총무님.”

이브는 난처한 얼굴로 턱에 손을 올렸다. 야근 내내 라면 라면 노래를 불러대는 로드를 위해 한 그릇 대접해 주고 싶었는데, 레시피는 커녕 그 이름조차 들어본 사람이 없다니…….

“안녕! 이브!”

“문안드리옵니다. 신관님.”

방금 막 출근한 유니벨과 비월이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이브도 상냥한 미소로 맞이했다.

“두 사람 다 좋은 아침이에요.”

유니벨이 목을 쭉 빼서 메이드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브. 아침부터 웬 소란이야? 메이드 집합 걸었어? 저것들 또 리체 간식시간에 늦기라도 했나?”

“아하하, 그런 게 아니라…….”

이브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유니벨이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라…면? 뭐야, 그게.”

“소녀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옵니다.”

“…역시 두 분도 모르시는 건가요.”

“라면이라면, 면 요리의 일종인 것 같군.”

새로운 목소리에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찰랑이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티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옆엔 자칭 제자인 로즈안느가 티아의 팔에 팔짱을 낀 채 반대쪽 손을 반갑게 흔들고 있었다.

“아, 군사님. 로즈안느 님.”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서, 당신은 뭐 라면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유니벨이 티아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본녀라고 알 턱이 있겠느냐? 면 요리라는 것을 추정할 뿐이니라. 라면은 본녀가 산 동안 들어본 적도 없는 음식이니…….”

“흥, 나이 헛먹으셨네!”

“누, 누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이냐! 모욕이니라!”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하여간 자기가 더 성화라니까!”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사이, 로즈안느는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빠져나와 이브와 비월에게로 합류했다.

“다들 반가워요! 헤헤.”

“아, 로즈안느 님. 순회공연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사옵니다.”

“조금 바쁘지만 전 무척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아, 그런데 로드 님이 라면을 드시고 싶어 하신다고요?”

“그래요. 어제 야근하시면서 하루 종일…….”

그때 티아와 다투고 있던 유니벨이 홱 시선을 돌렸다.

“아, 라면이든 뭐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팬더가 애도 아니고 그냥 아무거나 주는 대로 처먹으라 그래!”

이브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쉽네요. 폐하께서 정말로 라면을 드시고 싶어 하셨는데.”

그 말에 유니벨이 움찔했다.

“야식으로 깜짝 라면을 가져다 드리면 폐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하아, 뭐 별 수 없죠.”

이번엔 다른 가신들 모두가 움찔했다.

*

그리고 저녁이 되어 날이 어두워질 무렵,

메이드들도 당직 근무자를 남기고 모두 퇴근한 한적한 왕궁에, 한 인형이 살금살금 복도를 통과하여 주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흐, 흥! 저얼—대 팬더 녀석이 기뻐할까봐 만들어 주는 건 아니니깐! 내가 먹고 싶어서 만드는 거니깐!”

빨간 머리의 소녀는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식량창고를 털어서 가져온 재료들을 테이블 위에 우르르 쏟아냈다.

그리고 주방의 불을 키려는 그때였다.

“……유, 유니벨 님?”

“꺄아아아아아악!”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유니벨은 그만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엉덩이를 매만졌다.

“…유니벨 님 맞으시죠?”

“우으으. 누, 누구야?”

화덕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로즈안느가 주춤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랐잖아! 네가 왜 주방에 숨어있어?”

“사실은…….”

로즈안느가 부끄러운 듯 다리를 비비꼬았다.

“사실은 저도 로드 님께 라면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

============================ 작품 후기 ============================

큰 전쟁인 카사르 파트가 끝나서 잠시 쉬어가는 일상 외전입니다.

외전인지라 연참!으로 오늘 한편 더 올릴예정이오니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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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세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테니아 / ㅋㅋㅋㅋ 히익! ...비월이 거기서 왜 나와?

Tntn12 / 기승전 급식! 오오, 그렇군요; 장르만 맞춘다면 의외로 달동네에서 먹히려나요

아프게했어 / 전 그래서 오늘 바베큐 먹으러 갑니다 헤헿

강아지사료 / 정주행 고생많으셨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

헐랭헐르헐 / 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어비스에게도 축하를!

사탕수수158 / 오늘 합니닷!

로리콤MK / 그분은 마왕이라 업그레이드가 안됩니다! 이미 최강자에요! + 이번에도 장문의 코멘트 감사합니다!

쿨레라군 / ...언제나 쿨레라군님께는 같은 부분을 계속 지적받는군요. 쿨레라군님이 강조하시는 것이 어떤건지는 잘 알겠습니다. 전황을 넓게보는 캐릭터, 정보력 활용, 어비스 특색 얕음, 암살자의 활용, 게릴라전, 넓은 시야, 계속해서 비슷한 말씀을 해주시는데 결국 정보력의 더 강력한 활용을 요구하시는군요. 이미 많은 분들이 그부분을 지적해 주셔서 저도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있습니다만, 쿨레라군님께는 아직 만족스럽지 않아하시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드라는 캐릭터는 사람의 감정에 집중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도록 노력하는 '모략가'입니다. 어비스의 정보력을 사용하는 것 또한 상대방 영웅과 성향에 대한 정보를 얻는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죠. 여러번 작중에도 나왔다시피, 로드는 탁월한 지략가가 아니고, 특히 전술부분은 초보에 가까운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제갈공명과 같은 대단한, 쿨레라군 님이 말씀하신것처럼 '철저히 적의 정보를 분석, 분해해서 적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압살' 이런 스타일이 가능한 주인공은 아니란 겁니다.

어떤 그림을 원하시는진 알겠습니다. 어떤 어비스를 원하시는지 알겠습니다. 그냥 정보로 적의 모든것들을 다 내려다보고 마음대로 조작해서 전쟁이 일어날 필요도 없이 압살하는 그림. 하지만 지금 로드가 다루는 어비스와 쿨레라군님이 원하는 어비스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로드는 모략가고, 본국인 정보력 뿐만 아니라 멸망보너스로 얻은 다른나라의 특성들도 살리려고 노력하고, 부하들의 개성을 밀어주고, 전력을 갖추고있으면 맞부딪칠줄도 아는 스타일입니다. '정보력'의 활용만이 어비스의 개성이 아닙니다. 암살도 어비스의 힘이고, 괴기한 과학기술로 악마의 힘을 빌리는 것도 어비스의 힘입니다. 심지어 지금의 문화시대에 들어선 어비스, 수많은 나라들의 멸망보너스를 획득하여 기사, 상인, 궁수, 마법사 까지 갖춘 지금의 어비스에게 정보력은 올인해야 할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의 파트일 뿐입니다. 시간이 나시면 로리콤mk님의 코멘트도 한 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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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sdlfh / 여기 유니벨파도 계시군요! 코멘에 비월파 뿐인줄 알았는데 ㅠㅠ

@Karla / 저도 동감입니다. 모든 특화병종이 말씀하신 협잡질(?)에 집중할 필요는 없죠. 정보 특화 병종은 있고, 데몬은 데몬이니까요.

@니알라토텝 / 후반부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1)... / 헉! 멋져! +_+ 가, 가, 강사라니! 상당한 두뇌파셨군요!

@MoriyaSuwako / 거꾸로해도 귀엽귀!

@벌레 / ㅋㅋㅋㅋㅋㅋ 걸그룹 빠돌이들이 성행하는 어비스야 말로 아이돌 그룹 형성에 최적소죠

@거친장미 / 넵! 갱신할 기회가 있다면 본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아니면 설정란을 따로 만들어서 해도 좋겠네요.

@박성빈 / 시대의 발전은 4단계가 있습니다. 만! 원작 카오스월드는 거의 3단계인 문화시대에서 종결되었습니다. 4단계는 국가별 고유시대로 나라마다 이름이 달라요. 알란드는 무서운 점이... 음... 네, 말씀하신 인공운석투척 비스므리한 기술도 익힐 수 있습니다. 다만 '현대'와 같은 기술로 가는건 과학이 컨셉인 알란드 뿐이구요, 나머지 나라는 각자의 기술과 개성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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