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6 가웨인 =========================
전 백제의 수도, 위례.
콰지직! 쿠쿵!
연이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성문이 박살났다. 무너진 성문이 열어젖혀지고, 병사들이 가열찬 함성을 내지르며 영지 안으로 들이닥쳤다.
용의 머리가 그려진 깃발이 병사들의 머리 위로 나부끼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대륙의 신흥강자이자 어비스의 대척점으로 손꼽히는 아르곤군이었다.
“쳐라!”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베라!”
지상에서는 퇴화되어 날지 못하는 이족보행의 ‘드레이크’를 탄 용기사들이 거리 곳곳으로 산개하여 적병들을 짓밟았으며, 하늘에서는 ‘와이번’들이 각양각색의 빛깔을 띠는 날개를 펄럭이며 전장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시뻘건 화염들이 지상이 내리꽂히며 백제의 망루와 목조건물들이 간단히 무너져 내렸다.
“크아아악!”
“자, 잠깐! 커흑!”
전황은 일방적이고 압도적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성벽 위에서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창을 어깨에 삐딱하게 기댄 채 혀를 찼다.
“어차피 상대도 안 되는 거 진작 좀 항복하면 좀 좋아? 하여간 매를 벌어요, 멍청한 새끼들.”
그는 ‘미친개’라는 악명으로 대륙에 널리 알려진 아르곤의 영웅, 제로스였다. 제로스가 옆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는 백발 홍안의 여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이, 여자. 그런데 여긴 켈타인의 영역이잖아. 하데스 놈들이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가는 지불했어.”
“아아, 그래. 그런 일은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
제로스가 창을 반대쪽 어깨에 갖다 대며 안마하듯 툭툭 두들겼다. 이번엔 그녀가 눈동자를 굴려 제로스를 보았다.
“…전쟁, 좋아하잖아. 싸우러 안 가?”
“헹, 저게 무슨 전쟁이냐?”
제로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전쟁은 좋아해도 약한 것들 괴롭히는 데엔 흥미 없어.”
그녀는 납득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전장을 바라보았다. 아르곤군의 용기사 부대가 적장을 잡았는지 환호하고 있었다.
“…시시함뿐이구나.”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읊조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제로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의왼데?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
“난 또 네가 시시한 싸움만 좋아하는 줄 알았지. 네년은 뒤꽁무니로 수작질을 부린 뒤에 확실하게 유리한 싸움, 이기는 싸움만 하잖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흐흐! 시시한 게 싫다면 말이야.”
제로스가 그녀의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터치였지만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차분히 눈꺼풀을 내리깔 뿐이었다.
“레온이나 이리아 같은 놈들 기다릴 것도 없이 너랑 나, 그리고 우리 군만으로 지금 당장 어비스를 치는 거야. 어때?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어비스라고.”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한심하다는 눈이었다.
“비효율적이다.”
“아, 나왔구만! 그놈의 효율! 효율!”
“그리고 네 의견은 효율의 문제를 떠나서 그냥 자살행위일 뿐.”
“헹! 네년이 전투에 대해 뭘 안다고!”
제로스가 아이 다루듯 세레스티나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전투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 나라면 수천 군대를 상대해도…….”
“멍청이.”
그녀가 차갑게 말을 자르며 제로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제로스가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세레스티나가 다가오자 부관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군례를 올렸다. 그녀가 시릴 듯한 백발을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되어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관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 성벽 끝에 서서 팔을 기대었다. 산 너머로 저무는 태양이 보였다.
“……로드 폴렌티아.”
아마 저 방향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슬며시 옅은 미소가 걸렸다.
“너라면 즐겁게 해주겠지? 그때처럼.”
*
“…폐하! 전 백제의 수도 ‘위례’가 아르곤에게 함락 당했습니다!”
애니록스의 보고를 들으며 로드는 턱을 괴었다. 백제라면 아로게쓰 영토의 바로 옆이었다.
“흠, 켈타인을 무너뜨린 건 하데스니까 백제의 땅도 당연히 하데스가 차지할 줄 알았는데, 아르곤이 먹었다라… 이렇게 되면…….”
“예, 아르곤과 우리 영토가 맞닿게 되어 ‘국경’이 생겼습니다.”
세레스티나는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쪽이 먼저 오려나, 내가 먼저 가야하나.’
로드는 이제 막 문화시대에 들어선 입장이다. 새로이 통치해야 할 영지들을 모두 안정시키고 데몬, 체이서, 쉐이프 시프터까지 세 개의 특화병종을 전부 사용할 수 있을 때에 싸우는 것이 로드에게 있어서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다.
로드는 그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버티면서 내정을 다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레스티나는 어비스가 발전하는 것을 마냥 기다려 주지는 않을 것이다.
즉, 공격은 아르곤 측에서 먼저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만약에, 어비스가 ‘만전의 상태’를 갖춘 뒤에도 아르곤이 공격을 해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위험하다.
유리한 타이밍에 전쟁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때’를 만들기 위함이기에, 즉 아르곤이 ‘마지막 시대’발전을 준비한다는 소리였다.
문화시대를 거쳐 ‘4단계 시대’에서는 나라마다 고유한 이름이 붙는다. 카오스월드의 기록을 살펴보면 카사르는 ‘영광의 시대’, 가이아는 ‘성령의 시대’였다.
마지막 시대에 대한 데이터가 별로 없는 이유는, 카오스 월드에선 대부분 3단계인 문화시대에서 결판이 나기 때문이었다. 4단계 시대로 진입하는 것은 문화시대가 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자원과 노력이 소모된다.
그래도 4단계 시대로 진입만 한다면 각 나라별 ‘최종 테크트리’를 탈 수 있게 된다. 이 최종 테크트리의 기술들은 각 나라의 문명이 극한까지 발전하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다. 2차 베타 테스트에서 성령의 시대에 진입한 가이아는 하늘문을 열고 ‘신의 군대’를 불러 들였다. 페가수스를 타고 온 몸에서 강대한 신성력을 내뿜는 ‘발키리아’들은 규격외의 존재들이었고 인간의 재래식 군대로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그 가이아는 최후의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고 우승했다.
‘용의 나라 아르곤의 고유 시대라……. 가이아의 신의 군대를 능가했으면 능가했지 결코 그보다 약하지는 않을 거야. 얼마나 강력할지 상상도 못하겠군.’
세레스티나가 마지막 시대로 향하려고 한다면 어비스에서 먼저 공격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그 어떤 나라보다도 가장 빠르게 문화시대에 진입한 세레스티나가 ‘마지막 시대’를 준비할지, 아니면 문화시대 중에서 끝장을 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아르곤의 생산 현황을 훔쳐보아도 당장 눈에 띄게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다.
일단은 문화시대에서 아르곤이 선제공격해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고, 이쪽에서 먼저 공격을 하려해도 준비가 필요했다. 로드는 내정에 집중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어비스의 최종 시대도 궁금하네. 궁금하긴 하지만 거기까지 갈 일은 없겠지?’
“폐하!”
로드가 상념에 잠겨있을 때 집무실 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오셨어요.”
“…누군데?”
“가웨인 님이요.”
“아…!”
드디어 올게 왔다. 로드는 가볍게 책상 한쪽에 놓인 거울을 보고 앞머리를 정리한 다음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네.”
“힘내십시오, 폐하!”
애니록스가 작은 목소리로 응원했다. 가웨인은 가장 골치를 썩이고 있는 카사르 영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키’였다. 반드시 그녀를 설득해야만 했다.
끼이익. 곧 문이 열리며 청발의 여기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로드는 깜짝 놀랐다. 언제나 갑옷으로 몸을 꽁꽁 숨기고 다녔던 가웨인의 사복 차림은 이번에 처음 보았다. 청색 생머리를 풀어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린넨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모습은 수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잠시 그녀의 낯선 모습에 넋을 놓고 있던 로드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바, 반갑습니다, 가웨인 님. 이쪽으로…….”
로드와 그녀가 마주 앉았다. 애니록스는 인사를 건넨 후 물러났고, 이브가 다가와서 물었다.
“마실 건 어떤 걸로……?”
“소장은 뭐든 괜찮습니다.”
로드는 커피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헉!’
여느 때처럼 이브나 메이드들이 가져올 줄 알았지만 웬일로 베아트리체가 총총걸음으로 등장했다.
‘가끔 이런 서비스 아주 좋아! 심장에 무리가 가는 것만 빼면…!’
그녀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직접 뜨거운 커피를 따라주었다. 향긋한 커피향이 집무실에 가득 찼다.
“고마워, 베아야.”
“…수, 수고하세요. 주인님!”
그녀는 조그맣게 중얼거린 후 다시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내 가신이지만 뒷모습마저 이리 사랑스러울 수가……!
‘아차.’
손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로드가 어색한 헛기침을 흘리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귀여운 아이로군요. 전장에서 보았을 땐 저런 귀신이 있나 싶었는데, 이렇게 평시에서 보니 사뭇 느낌이 다릅니다.”
가웨인도 베아트리체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푸근한 엄마미소를 짓고 있었다. 베아트리체 덕분에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은퇴하시고 부하들의 가족들과 함께 작은 마을을 꾸려서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곳인데 어떻게 아시고…… 역시 어비스의 정보망은 대단하군요.”
“…하하, 저희도 고생 좀 했죠. 그런데 산골짜기면 몬스터들이 많아서 위험하지 않습니까?”
“처음엔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고생했지만, 나중엔 알아서 피하더군요.”
로드는 속으로 웃었다. 아무리 몬스터들이라도 B+급 영웅과 기사들이 사는 마을을 공격하는 자살행위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살가운 표정이 가시며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그녀를 대면하고 있던 로드는 갑작스런 긴장감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소장이 카사르 영지의 대영주가 되었으면 하시는 것이옵니까?”
“예, 그렇습니다.”
로드는 대답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폐하.”
============================ 작품 후기 ============================
wnsdlfh / 하하하... 그래도 티아는 이겼으니까요 (응?)
T스톤 / 쪼그만 닭의 고환은 먹을수도 있겠지만 몬스터의 고환은... 큭...!
Gneji / 못하는게 뭔가요 ㅠㅠ
민트레인 / ㅋㅋㅋㅋㅋ 충공
노레롱 / 리듬발효공법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로 있는건가요? 와우;;
아프게했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괜히 하체가 불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밤 사이에 잘 지켜야겠군요. 이런.
dlstka / 베아는 맛있게 잘 먹었답니다 (?)
app2225 / 드, 드셔보셨습니까 설마.. 힉
알테니아 / 비월이 비월한 것은 비월하므로 비월하네요
로리콤MK / 정말 좋은 의견들 잘 받아보았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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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라토텝 / 의외의 저격에 성공했군요.. ㅇ.ㅇ
@...(-1)... / 천엽, 콩팥, 내장 다 먹지만 소 고환은 글쎄요... 흠흠;
@Schmerzs / 아니 이런 대단한! 티아가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요! 바로 로드의 왕 버프로 1등을 할 수 있었을 텐...! (정력 만세!)
@Karla / ....음 어, 어떤 맛인가요?; 식재료의 세계는 참으로 넓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