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7 가웨인 =========================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폐하.”
“예, 말씀하시죠.”
평화로운 근황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제 민감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로드는 짐작했다.
기사들의 살아있는 전설 가웨인. 아크와 보호트가 모두 죽음을 맞이한 지금, 카사르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녀는 어비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물러서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카사르 영지의 안정화를 위해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설득해야 하는 인물이다.
“소장이 카사르의 대영주가 되어야 한다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입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천천히 이어 말했다.
“……어비스가 엠파이어에 언데드들을 풀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그렇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로드는 각오를 굳혔다.
“예. 그렇습니다.”
그녀를 동료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녀에게만큼은 진실을 이야기해줘야만 했다.
“……그렇군요.”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흘렀다. 이유는 묻지 않는 건가? 로드는 이쪽의 입장을 전달할 여지를 줬으면 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고 결국 로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비스의 왕으로서 이번 일에 큰 책임을 느낍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로드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모두 제 섣부른 판단이 낳은 일입니다. 엠파이어를 피해 없이 무너뜨릴 계획은 있었지만, 미처 하데스가 뒤를 치는 상황까지는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저희에겐 큰 고비였습니다. 여기까지 저를 믿고 따라왔던 병사들의 희생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로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언데드가 된 루나와 마녀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한때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로드가 에덴에서 보아왔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광경이었다.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저는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반드시 하데스로부터 승리하여 살아있는 제 백성들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그런 절박한 마음에 ‘승리하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어떤 사죄의 말로도 부족하겠지만, 결코 민간인들의 희생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카사르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습니다.”
로드는 꾸며내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진심을 보이고 진실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어비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에.
“……그곳 백성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소장에게 사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녀가 답변을 들려주었다.
더 이상 사과할 필요가 없다니, 이게 무슨 뜻이지? 로드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큰 표정 변화는 없었다.
“…폐하.”
“예.”
“기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돌아온 것은 이상한 물음이었다.
“…봉건 계약을 맺고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검의 달인들…….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녀가 단정 짓듯 말했다.
“기사는 명예의 길을 걷는 자들이옵니다, 폐하. 기사가 되기 전에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서약’입니다. 국가에 충성하고, 약자를 지키고, 정의와 선을 수행하고, 악과 불의를 타파할 것.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명예’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검술은 명예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모든 기사는 목숨보다 명예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목숨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지만 명예는 영원히 남는 까닭입니다.”
그녀는 진지한 어조로 그렇게 이야기 한 다음, 목이 타는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 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소장이 은퇴한 것으로 알고 계시지만, 은퇴는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소장은 기사의 자격이 박탈된 것에 더 가깝습니다.”
로드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장황한 이야기들을 깔아두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덤덤히 들어주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왕실 기사의 서약 그 첫 번째, ‘국가에 충성하라.’ 소장은 왕을 버리고 적대국으로 하여금 왕을 치는 것을 방임했습니다. 그때 소장의 명예는 쓰레기가 되었고, 기사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가웨인 님! 그때의 아크는……!”
“폐하.”
그녀가 로드의 말을 단호히 잘랐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어마어마한 감정의 파문에 로드의 말은 목구멍으로 도로 들어갔다.
“소장이 아크의 지독한 시련에도 등을 돌리지 않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한 이유는, 그저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기사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크가 소장을 버림 수로 삼고 도망치려 할 때에, 폐하께서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소장을 설득하셨습니다. 그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리는군요.”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백성이야 말로 나라이고, 백성들은 당신이 살기를 원한다.”
“…….”
“폐하께서는 소장의 부하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장은 고개를 돌려 부하들과 눈을 마주했습니다. 그들은 살고 싶어 했습니다. 허망하게 아크의 버림 수로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아했고, 살아 돌아가 가족들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나 하나의 명예를 위해 이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소장은…….”
잔을 든 그녀의 손이 심하게 달달 떨리며 내용물이 바닥에 투둑 툭 떨어졌다.
“명예를 버렸습니다. 기사임을 포기하고, 그동안 쌓아온 인생 전부를 부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카사르의 본토로 향하여 엠파이어를 공격했지요. 소장의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될지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기껏 눈을 감으면 지독한 악몽에 시달려 다시 깨어나야 했고, 죄책감에 절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명예를 버린 기사에게 안식은 사치이고, 또한 책임져야 할 이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표정이 한결 가라앉은 후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여전히 그때를 회상하듯 눈을 감은채로.
“그리고 소장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언데드 군세가 전쟁에 난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중 로드는 뼈에 사무치는 한기를 느꼈다. 집무실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며 방 곳곳에 서리가 끼고 있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언데드들을 엠파이어에 떨어뜨려 죄 없는 백성들까지 학살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눈을 뜨자, 로드는 온 몸에 소름이 오도도 돋아났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깃든 것은 여태껏 본 적 없는 극도로 응축된 증오심이었다.
언제나 인자하고 명예롭던 그녀의 두 번째 얼굴과 로드는 대면하고 있었다.
‘……뭐야, 이게.’
이 상황을 인지하려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는 로드의 두뇌가, 뭔가가 잘못됐다고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가웨인이 화를 낼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지만 이건 뭔가 이상했다. 다중인격자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런 의문을 품는 순간 방금 전에 말했던 그녀의 한 마디가 귓가에 울렸다.
‘……그곳 백성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소장에게 사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로드는 전류가 흘러들어온 것 같은 전율이 일었다. 그녀는 스스로 기사이기를 포기했다고 했다. 명예를 버렸다고 했다. 이제 그녀는 기사가 아니라 일개 개인이고, 그녀에게는 더 이상 ‘백성들의 희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첫 퍼즐부터가 잘못됐다.
로드는 처음에, 백성들과 나라가 아닌 ‘그녀 개인’에게 사과했어야 했다.
“가웨인 님! 잠시만 진정을……! 제 이야기를 좀 들어보세요!”
“폐하께서는 비겁하게도, 저의 부하들을 가리키며 그들의 목숨을 ‘미끼’로 소장의 체념을 끌어내셨습니다. 백성이 곧 국가라는 논리로 소장의 명예를 져버리게 했고, 쌓아온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소장이 길을 비켜드리자마자 폐하께서는 그런 소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백성’들을 무참히 짓밟으셨습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소장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집무실의 온도가 점점 더 낮아졌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팔을 뻗자 얼음의 기운이 모여들어 검의 형상이 되었다.
“마을이 안정되면 소장은 죽기로 했습니다. 죽기 전에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 보았고,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녀가 얼음검을 들고 저벅저벅 다가왔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로드가 이를 악물며 항상 품속에 두고 있는 총전총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뽑으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 없다.’
온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벌써 가웨인이 손을 써둔 것 같았다.
“당신만큼은 죽이고 가자. 그렇게 결심하였습니다.”
“……!”
가웨인은 애초부터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목숨을 내던지며 암살을 하러 온 것이다.
“당신은 황제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아니, 당신 같은 끔찍한 자는 절대로 황제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대륙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핏빛으로 물들 것입니다.”
“가웨인! 제발 진정하고 설명을 들어보세요! 납득할만할 이유가 있……!”
“당신의 더러운 혓바닥에서 나오는 소리는 더 이상 듣기 싫소!”
가웨인이 차갑게 일갈했다. 로드는 어느새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살얼음이 몸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소. 지금은 난세. 입장차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오. 그대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소. 그러니 나도 스스로의 원한을 풀기 위해 그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 뭐가 잘못됐소?”
“……!”
마침내 그녀의 눈동자에는 증오를 넘어 살의가 담기게 되었다.
“부디 지옥에나 떨어지시오.”
가웨인이 검을 세워드는 순간, 로드의 몸이 흐릿해졌다.
‘아, 안 돼!’
로드는 열리지 않는 입으로 소리쳤다.
‘베아야! 안 돼!’
파아앗! 로드의 몸이 공간을 넘어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곳은 왕궁의 복도 어딘가 였다.
“베아야!”
로드가 미친 듯이 달렸다. 바닥에 한번 미끄러져 쓰러져 벽에 머리를 부딪쳤지만 괴성을 내지르며 다시 달렸다. 그리고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
검을 휘두른 자세의 가웨인이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는, 피를 흥건하게 흘린 채 쓰러진 은발의 소녀가 있었다.
“흠, 이런.”
가웨인의 시선이 로드 쪽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대의 업이 또 무고한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군.”
============================ 작품 후기 ============================
아스칼 / ㅠㅠ.. 하하, 저도 다루어보고 싶긴 하지만 어떨지
로리콤MK / 쓰담쓰담 껴안고 싶은 포스라...! 쿨레라군님은 바쁘신걸까요 ㅠㅠ
알테니아 / ㅋㅋㅋ 인정합비월. 비월? 어 비월.
lTemL / 소중한 쿠폰 감사드립니다!
Karla / 이분 코멘트 필력이; 필력이 좋아서 먹을만하게 들리지만 못먹겠어요!
할레데임 / 티아가 고환충이라니ㅋㅋㅋㅋㅋ 그보다 택배 테러는 참아주세요 ㅠㅠ
wnsdlfh / 문명 시스템을 많이 채택하긴 했습니다만 아쉽게도 그런건 없습니다 ㅎㅎ;
아프게했어 / 가웨인이 베아를 부관으로 둘 일은... 없을듯 합니다 ㅠㅠ
니알라토텝 / 으잉? 좋겠지만 안되겠지가 클리셰인가요!
...(-1)... / 최종시대 둘리소환; 벨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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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스톤 / 로드의 재평가;;
@벌레 / 기사 바니걸 좋습니다..만... 아이돌 후보의 그분이 스토리 상...
@ghost0590 / 사랑이죠. 정말 사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