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281화 (281/296)

00279 가웨인 =========================

로드는 왕실의원과 이야기를 나눈 뒤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의식 불명, 상처가 깊어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의원의 설명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귀엽게 커피를 따라주던 베아트리체가, 자신 대신에 피를 흥건히 쏟은 채로 쓰러져 있는 그 광경은 로드에겐 씻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베아트리체의 쓰러진 모습 다음에는 가웨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증오심 가득한 얼굴로 내뱉는 그 저주의 말들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신은 황제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수많은 감정들의 소용돌이에 로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아아.”

책상에 앉은 로드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받친 채 가만히 있었다. 어째선지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나보고 어쩌란 거냐고, 빌어먹을……!”

*

그 사건으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다.

과연 정보부의 솜씨는 훌륭했다. 왕궁의 폭발 사건은 흔히 있던 하버트의 신제품 폭발 사고로 위장되어 마무리되었고, 그나마 목격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메이드들은 확실한 정보 차단을 위해 임시적인 귀가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큰 난리가 난 것에 비해 전혀 소문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일이 묻어가는 듯싶었으나, 언더하임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이 사건이 이상하게도 엠파이어에서 터져버렸다.

“로드 폴렌티아가 가웨인을 언더하임으로 불러들여 처참하게 살해했다!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가웨인은 불합리한 명령을 받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기사답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진정한 귀사의 귀감이다!”

“역시 근본부터 명예라고는 없는 범죄자들의 나라 어비스는 믿을 수가 없다! 모두 일어나서 가웨인 경의 뒤를 따르라!”

기껏 장례식과 티아의 연설, 언데드의 화형으로 진정시켰던 여론이 다시 들끓어 올랐고, 마침내 엠파이어에서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가웨인의 사망 소식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다른 지역의 카사르 귀족들까지 병력을 이끌고 엠파이어로 집결했다. 주둔 중이던 키리안과 병사들은 안팎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키리안은 부상까지 입은 채 레드킵으로 후퇴했다.

“…폐하! 이건 반란입니다!”

“다른 영지에서도 이 상황을 눈 여겨 보고 있습니다! 단호히 대처하셔야 합니다!”

긴급 회의에 참석한 가신들과 클랜장들은 하나같이 카사르 척결에 의견을 모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로드는 진압군 파견을 확정지었다.

“병력을 준비시켜. 편제는 티아와 의논 후 결정해서 통보하겠다.”

“예!”

로드가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폐, 폐하? 아직 중요한 안건이…….”

그때 이브가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그 클랜장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이 쏙 들어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브가 재차 선언했다. 로드는 제일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고, 뒤따라온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폐하. 별채로 들어가서 한 숨 주무시는 게…….”

“반란이 일어났는데 잠은 무슨 잠이야. 티아는 어디 있어?”

“군무업무로 밖에 나가있어요.”

“출전 준비하나 보네. 하여간 빠르다니까. 티아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겠지.”

“…폐하. 이번 일은…….”

걸음을 멈춘 로드가 이브를 돌아보았다. 수심 가득한 그녀의 얼굴 아래로 붕대로 칭칭 감긴 오른손이 보였다.

“난 괜찮아.”

로드가 빙긋 웃어보였다.

로드는 회의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정보부요원들이 딱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폐하! 큰일 났…….”

“……잠깐만.”

로드가 손바닥을 펼쳐 그들의 입을 막았다.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지금, 좋지 않은 소식을 연달아 들어버리면 정말로 멘탈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로드는 창문을 열고 잠시 찬바람을 쐤다. 정신이 바로 맑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식힐 수는 있었다.

“좋아, 들을 준비됐어. 말해봐.”

“…….”

당장 이 따끈따끈한 뉴스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죽을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굴던 정보부요원들이 갑자기 머뭇거렸다.

“…폐하. 몸이 편찮으시면 나중에 들으시는 것이…….”

“마, 맞습니다! 우선 티아님과 이브님과 말해놓겠습니다.”

“아, 괜찮아! 말해보래도!”

로드가 아까 이브에게 써먹었던 그 억지 미소를 재현하며 말했다. 아,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자꾸 걱정 하는 거지? 이정도 업무 스트레스는 얼마든지 겪어왔다.

“……알겠습니다.”

요원들이 정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첫 번째 소식은 카사르에 이어서, 오펙투스 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반란군은 어비스의 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을 요구했다. 그들은 오즈를 점령한 후 로드가 보낸 피닉스군과 전투를 벌이는 중이라고 했다. 반란군의 수장은 그동안 행방불명이었던 마도사 멜로디였다.

‘결국 그 녀석이 나타났구나.’

로드가 이마를 감쌌다. 멜로디는 콜린과 선대 마도사를 죽인 어비스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 그녀와의 끝없는 악연. 이것도 가웨인이 말한 업이란 말인가.

“……폐, 폐하. 정말 괜찮으세요?”

보다 못한 여성 정보부요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와아악!”

로드가 난데없이 버럭 소리쳤다. 요원들 모두가 놀란 얼굴로 얼어붙어있자 로드가 그들의 얼굴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아하하하! 장난이야, 장난. 항상 혁명단으로 반란을 부추기는 입장이었다가 반란을 당하는 입장이 되어보니까 뭔가 신선한데, 그렇지 않아? 그동안 내 혁명단에게 휘둘렸던 말렉, 플로라, 아크, 그리고 이름 까먹은 흑사회의 보스 등등에게 심심한 유감의 말을 남기고 싶다. 하하하!”

“…….”

한바탕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은 로드가 털썩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평상시의 톤으로 돌아와 물었다.

“…피닉스가 이기겠지?”

눈치를 보던 정보부 요원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저, 전력상으론 잘 훈련된 우리 쪽이 유리하지만 성을 끼고 있어서 함락에는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걱정되시면 증원을 보내시겠습니까?”

갑자기 다른 동료들이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해!’ 그러나 로드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군무 건은 엠파이어 문제랑 겹치기도 하니까, 나중에 티아와 의논해서 판단할게.”

“……아, 알겠습니다. 폐하!”

두 번째 소식은 엠파이어와 오즈에서 폭동이 일어난 뒤 그에 맞춰 글레이시온, 카르프리 영지 측에서 연락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장 대영주 후보자를 대령하겠다며 굽실거리던 그들이 하루 만에 태도가 싹 바뀐 것이다.

아마도 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지는 소식들도 대충 비슷한 내용이었다. 몇몇 카사르나 오펙투스의 영지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인다. 중립 상단들이 대규모 거래에 대해 갑자기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등등.

그리고 마지막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애니록스가 직접 찾아와 보고했다.

“알란드의 왕 올리버에 대한 정보입니다.”

올리버는 글레이시온의 영토에서도 최북단에 있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의 얼음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런 외진 곳에 갇혀 있었으니 정보부에서 찾아내는데 시간이 걸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올리버는 이미 그 안에 없었다.

“빠져나갔다고……?”

“네. 정확히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얼음감옥의 간수들은 모두 죽은 시체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습니다.”

“……실버시타델에서 올리버가 왔다는 연락은 아직 없고?”

“네.”

로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사르의 반란, 멜로디의 등장. 올리버의 실종,

이 일련의 사건들, 왠지 모르게 공통된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니록스.”

“예, 폐하.”

“실버시타델에 쪽에도 스파이 심어뒀지? 책임자와 직접 이야기해보고 싶어.”

로드는 스파이와 통신수정구로 대면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결과 몇 가지 재미있는 일들을 알아냈다.

과학자들은 올리버가 없더라도 과학 연구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으며 그 기술이 상당 수준까지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과학자들은 연구 성과들과 장비들을 가지고 실버시타델을 이탈하기도 했다. 목적지는 알 수 없었다.

‘……올리버.’

로드는 정보부 요원들이 모두 떠나고 지휘관 창으로 1:1연락을 취해보았다.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감금 때는 손발이 묶여 있어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탈출했다면 동맹국의 연락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납치당해 묶여있거나, 혹은 일부로 연락을 받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였다.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자들이 있군. 내가 예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

*

바쁜 하루가 끝나고 밤이 찾아왔다.

로드는 여전히 집무실에 있었다. 평소 잠을 자러가던 별채에 안 들어간 지 오래였다. 언제나 야근을 강요하던 이브가 제발 자러 가달라고 옷자락을 붙잡고 부탁할 정도로 역사적인 사건도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베아나 보러 가볼까.”

로드는 엉덩이를 슬그머니 땠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그녀에 몸 상태에 대한 것은 실시간으로 보고 받고 있었다. 그녀를 직접 보러 가면 집중력만 깨져버릴 것 같았다.

‘……하아아.’

왕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정말 정신병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크가 쿡 찌르니 와르르 무너져 내렸는지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심적인 고충이 너무나 컸다.

“똑똑.”

노크 소리가 아닌, 문밖에서 누군가가 의성어를 소리 내어 발음하고 있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대번 눈치 챈 로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들어와, 치엘로.”

“헤헤, 안녕하세요! 로드 오빠!”

그녀가 언제나 같은 발랄한 미소를 지으며 사뿐하게 집무실에 들어왔다. 모자와 부츠를 홀라당 벗어던진 그녀가 이제는 자신의 전용 좌석처럼 쓰는 오른쪽 소파에 몸을 뉘였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로드 오빠는요?”

“나야 뭐, 일해야지.”

“저는 놀러 왔죠.”

이 꼬맹이가……

그러나 화를 낼 힘도 없던 로드가 한숨을 쉬며 책상에 바짝 엎드렸다.

“…그리고 넌 무슨 애가 겁도 없냐? 남자랑 야심한 밤 같은 방에 단둘이 있게 됐는데 경계심도 안 생겨?”

그 말에 치엘로가 멈칫했다. 놀란 듯 당황한 듯 입을 살짝 벌린 채.

‘오, 제법 귀여운 반응도 보이네?’

그러나 로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치엘로는 요란하게 꺄르르 웃어대더니 휙휙 손사래를 쳤다.

“에에이! 걱정 없어요. 로드 오빠가 밑도 끝도 없이 막 들이댈 만큼 배짱 있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

도발이다.

“그리고 잊었어요? 치엘로가 더 무력등급 높거든요! 역으로 저에게 덮쳐질 걱정이나 하시죠?”

또 도발이다. 그녀는 크지도 않은 가슴을 당당하게 펴며 콧김을 내뿜었다. 이 얄미운 동생을 어쩌면 좋을까.

============================ 작품 후기 ============================

남이 승리하는 역전극을 보는건 고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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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sdlfh / 여기서 가웨인이 더 날뛰었다면 그야말로 일났죠

벌레 / 아아, 바니걸 기사돌이 ㅠㅠ

오스카 / 심경의 변화가 생기겠죠.!

T스톤 / 히익;

알테니아 / 새로운 언어 비월어를 창조하셨군요

룬네이쳐 / ㄷㄷㄷㄷ;

헬크랩 / 복수귀 전개라.. 베아 죽고 로드 빡돌고 피바람이네요

쿠죠죠타로 / 입장 차이가 크죠. 어비스는 승리를위한 최선의 전략을 썼지만 민간인이 휘말린 격이고, 카사르는 그냥 민간인들을 건드렸다라고 생각하죠. 말씀대로 카사르는 먹기 힘든 땅이 되어버린..

이즈니임 / 인재부족이 크네요. 카사르를 먹었지만 카사르 인재들은 결국;

삼초필패 / 헉; 피폐물로..? 반응이 극과 극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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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콤MK / 그렇죠. 전편에 드러난 상황으로는 판단할 수 없네요. 결국 힘을 쓰게 된 꼴이지만 ㅠㅠ

@쿨레라군 / 왕명을 비판할 조직이 미흡한건 사실이네요. 사실 지금 로드의 힘이 워낙 세다보니까 저항할 조직이 없다는게 문제; 그리고 행동기반이라... 초반에는 어비스의 생존! 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지만 갈수록 영토도 넓어지고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하다보니 행동기반이 모호해진 느낌이 있기는 하네요. 좀 더 보완해보겠습니다.

@니알라토텝 / 정확한 진단이십니다. 살육병기를 통제하기 위한 정신적 무장 수단.

@...(-1)... / 벨붕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초월적인 우주스케일의 존재를 불러들이시는군요 ㅋㅋㅋㅋ 여긴 연약한 에덴이라구욧!

@할레데임 / 이런 위기 상황만 오면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는군요 ㅠㅠ. 노블인데 너무 희망적이다. 더 세게하자 or 싫어요 퉷. 전개가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니 죄송스럽네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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