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0 가웨인 =========================
치엘로의 도발에도, 로드는 평소처럼 발끈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치엘로도 그것을 느꼈는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리액션 없어서 노잼.”
“…그러니 제발 집에나 좀 가라. 놀아줄 기분 아냐.”
“…….”
치엘로가 스르륵 일어나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그 위에 얼굴을 올려두고는 나지막한 시선으로 로드를 보았다.
“절 원망하지 않아요?”
평소처럼 애교 섞인 달달한 음성이 아닌, 조금은 가라앉은 톤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워프게이트를 활용해서 언데드들을 몰아넣는 방법을 처음 제안한 건 저니까요.”
“…그리고 그 의견을 채택한 건 나잖아.”
로드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의견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낼 수 있는 거고, 책임을 지는 건 그 의견을 선택해 실현시킨 결정권자지. 널 원망할 이유가 어디 있어?”
“…흐응, 알긴 아시네요.”
“……?”
로드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녀와 대화를 하면 왜 항상 산으로 올라가는 걸까.
“그럼 속 시원히 말해줘요. 왜 그렇게 힘들어 하시는 건데요?”
“…….”
치엘로는 꽤나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로드는 최근 힘내라는 둥, 단장이 그렇게 된 건 폐하의 잘못이 아니라는 둥, 원치 않게 여러 위로들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왜 힘들어요?’라고 물은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떠벌 떠벌 남에게 고민을 늘어놓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로드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입이 떨어지고 있었다.
“……죄책감, 이랄까.”
“죄책이요? 로드 오빠가 뭘 잘못했길래요?”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로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자, 치엘로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대응했다. 마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손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래서 호랑이는 어떻게 됐는데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티 없는 순수함이었다. 결국 로드가 기싸움을 포기하고 말문을 열었다.
“……난 이미 한 번 가웨인을 설득한 적이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어.”
잠시 가웨인의 증오어린 눈동자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명색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서 이용해야 할 모략가가, 상대방의 깊숙한 심리를 제대로 꿰차지 못했던 거야. 그런 내 오만 때문에 베아가 다쳤고, 키리안이 다쳤어. 또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지. 전부 내 잘못이야.”
“…흐으응.”
그녀는 로드가 한말을 떠올려보는 듯 잠시 얌전히 있었다.
“그럼 제가 반박해볼까요?”
“……뭐?”
“사람은 수많은 면들을 가졌어요.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소우주를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죠. 로드 오빠는 가웨인을 정의롭고 명예로운 기사로 알고 계셨지만, 그녀는 평생 지켜온 명예를 잃었다고 느꼈을 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고 말았어요.”
“……그 이야기는 또 어디서 들었어?”
로드가 중간에 이야기를 끊으며 물음을 던지자 치엘로가 방긋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이브 언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이브였구나. 로드가 실소를 흘렸다.
“…괜한 걱정을 시켰네. 이런 꼬맹이까지 동원하게 하다니.”
“아, 그런 건 됐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 봐요!”
그녀가 자기 무릎위에 주 두먹을 탕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크의 집요한 괴롭힘에도 굴하지 않았던, 단단하고 곧은 심지를 가진 가웨인이 갑자기 그렇게 돌변해서 덤벼들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로드 오빠가 무슨 가웨인의 엄마라도 돼요? 아님 뭐 최소한 가웨인과 날 잡고 이야기 해본 적이라도 있냔 말이에요!”
“…아니, 네가 왜 거기서 화를 내…….”
“확실히 해둘게요!”
그녀가 눈에 힘을 주고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한 채로 접근한 것이 오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꿰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에요!”
“……!”
로드의 입이 벌어졌다.
“사람의 마음은 간단하지 않다구요! 얕보지 말란 말이에요!”
그녀가 시원스럽게 소리치며 팔짱을 꼈다. 거기서 왜 그녀가 잘난 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사람의 심리를 꿰차고 있어야 했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되풀이해도, 명예로운 기사 가웨인이 자신을 암살할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할 수 있었을까? 워프게이트가 아닌 다른 방법을 썼더라도, 비월이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킨 지금의 상황보다 나아졌을까?
“…정말이지, 저번 엠파이어에서도 그랬지만 로드 오빠는 가끔 너무 완벽주의자처럼 되려는 경향이 있다니까요? 자기 자신의 약점과 실수를 허용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툭 하면 흔들리는 거예요.”
그녀가 로드와 눈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로드 오빠가 느끼는 죄책감은 무의미하고,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요. 그러니까 되든 안 되든 하늘에 맡기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구요! 중요한 건 지금이에요.”
로드는 목을 젖혀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 자세 그대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하,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이브의 사주를 받고 내 멘탈을 케어해주려 했던 모양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위로를 들어도 그리 기분이 나아지진 않는걸.”
“어머, 그래요? 그럼 로드 오빠가 스트레스를 받는 요인이 더 있나 봐요. 맞춰볼까요?”
마치 네 이상형이 뭔지 맞춰볼까? 하고 여고생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처럼 간단히 말하는 치엘로였다.
“베아 언니가 다쳤고, 가웨인의 말이 신경 쓰이고, 일에 집중하려 해도 상황이 더럽게 꼬이기만 하고.”
“…….”
정말이다. 들을 때마다 바늘로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베아 언니가 다친 건 금방 해결되겠네요! 곧 멀쩡하게 눈을 뜰 테니까요!”
“……무슨 자신감이냐.”
“하프 밴쉬는 그리 쉽게 안 죽어요! 그리고! 가웨인의 말이 신경 쓰이는 것도 과거의 일일 뿐이잖아요. 차차 잊어버리면 그만! 명색이 정치 쪽 일에 종사한다면 얼른 미움 받는 것에도 익숙해지시라구요!”
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주 되는대로 조언하는구나.
“그럼 남은 건….”
“상황이 더럽게 꼬인 것 말이지.”
“네, 이건 로드 오빠가 지금 하기에 따라서 바꿀 수 있는 일이에요.”
그녀가 착 손가락을 내밀어 로드의 얼굴 쪽으로 뻗었다.
“여기까지 잘 헤쳐 나왔잖아요? 이제는 1등이고, 로드 오빠가 최강인데, 뭐가 두려운 건데요?”
“…….”
그래, 뭐가 두려웠던 걸까?
나의 행동으로 파생된 일들이 내 소중한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다치게 하는 것.
하지만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누구도 다치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상처받고, 상처 입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생각해라. 소중한 것들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흐응응.”
치엘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이제야 좀 볼만한 로드 오빠 같은 표정을 짓네요.”
“……그럼 아까는 안 볼만한 로드 오빠였다는 거냐?”
“그럼요. 다 큰 남자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어깨 축 처지고 시무룩한 모습이 진짜 꼴불견…….”
“…시끄럽다”
로드가 삐딱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당장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집중해야겠어.”
“뭘요?”
“반란 진압.”
로드가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단호히 조치하겠어. 난 아직도 현대인의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여기는 에덴이니까 살아남으려면 내가 바뀌어야겠지.”
“흐응, 어쩌시게요?”
“네가 예전에 말한 지침대로 할거야. 기억 안나?”
치엘로가 고개를 갸웃하자 로드가 덧붙였다.
“1위국은 이미지 싸움이라고.”
적대하는 자들에게 보여줘야 할 것은 힘과 공포.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뻔한 좌절감을 맛본 지금에야 비로소,
흙탕물에 발을 들일 각오가 선다.
*
다음날 로드는 결단을 내렸다.
‘유니벨 풀하우스를 총사령관으로 1만 명을 반란 진압군으로 편성해 엠파이어로 보낸다.’
‘티아 그란디네를 파견사령관으로 4천 명을 증원군으로 편성해 오즈로 보낸다.’
‘스카파치노군 3천명을 파견병으로 실버시타델에 보낸다.’
사람들이 예상한 것보다 진압군들의 규모가 훨씬 컸다. 개척시대 기준이었으면 군대 하나가 나라도 무너뜨릴 정도의 화력이었다.
“다들 모였어?”
로드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그의 앞에는 이제 막 출정식을 마친 장군들. 티아, 스카파치노, 유니벨 세 사람이 정렬해 서 있었다.
“왔나? 주공.”
“오홍홍! 오랜만이군용! 폐하!”
“뭐야? 팬더! 출정식엔 나오지도 않다가 이렇게 따로 불러내기야?”
“쭉 바빴어.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사람 바글거리는 행사는 싫어하는 거 알잖아.”
로드가 웃차 하는 소리를 내며 계단 중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다지 해줄 말은 없지만… 일단 유니벨.”
“왜?”
“되도록이면 민간인 사상자를 늘리지 않도록 주의해줘.”
그 말을 들은 유니벨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냥 방해하는 새끼들은 다 쳐부술 건데?”
“……유니벨 장군.”
티아가 눈치를 주었지만 유니벨은 꿈쩍도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 진짜! 다들 답답하게 굴 거야? 리체를 다치게 한 적들에게 동정심이라도 생긴 거냐고! 그리고 이번 반란은 정규군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영지민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사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선 말야!”
이번 일로 누구보다 분노한 사람이 유니벨이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왕궁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훈련에만 매진하기도 했다.
“그러니 날 가로막는다면 전부 박살낼 뿐이야.”
로드가 시선을 돌려 티아를 바라보았다.
“티아는 어떻게 생각하죠?”
“학살이 공포를 심기 위한 중요한 수단인 것은 인정하노라. 그러나 주공은 이제 이 대륙에서 가장 황제에 가까운 남자. 품격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학살은 하책이니라.”
“…야! 학살은 무슨! 이상한 사람 만들고 있어!”
로드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인명피해는 최소화하라는 거야. 대신 내 계획은…….”
로드가 설명을 마치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만만찮게 악독한데?”
유니벨이 말했다.
“…정말로 주공의 생각인가?”
“네. 본보기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로드가 대답하며 이번엔 티아 쪽을 보았다.
“티아의 병력은요?”
“알브헤임에서 본녀의 3천 궁병대가 올라오고 있느니라. 본녀는 언더하임의 1천을 이끌고 중간에 합류해 오즈로 갈 것이니라.”
“훌륭해요, 스카파치노는?”
“오홍홍! 이미 실버시타델은 훤히 꿰차고 있지용! 명령만 내리시면 며칠 안에 답을 들고오도록 하겠어용!”
“좋아.”
로드가 몸을 일으켰다.
“이번 전투는 내부 반란 진압전이야. 국가를 상대했던 것만큼 치열하진 않겠지만 무척 중요한 전투야. 키워드는 공포심과 압도적인 승리.”
로드의 말에 그녀들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생각해도 어비스가 그렇게 강력한 이미지는 아니잖아? 대륙의 온갖 문제아들과 낙오자들이 모여 세운 골칫덩이 국가, 범죄자들의 집합소, 대륙민들은 아직도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거야. 아직 어비스를 자신들의 주인으로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거지. 이번이 선입견을 깰 좋은 기회야.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주고 오라고.”
세 장군이 일제히 로드에게 군례를 올리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도합 1만 7천의 어비스군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눈 깜짝할 사이에 토요일이네요. 한주 마무리 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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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 언제나, 특히 악조건이 닥칠수록 성장할 기미는 있죠.
lTemL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Tntn12 / 응원 감사합니다!
하찮은세상 / 그러네요. 이게 바로 가치충돌이라는 건가요? ㄷㄷ
한고급검 / 이제 막 전쟁 종결이 되었고 아직 정국이 안정화되기 전이라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는거죠. 화력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그 화력으로 반란진압;)
룬네이쳐 / 조금씩 나아질 겁니다!
이즈니임 / 카사르 영웅들이 몰살하는 바람에 인력이 부족해버린건 맞네요 ㅠㅠ 정보부족은 글쎄요, 지금 정보부요원들이 열일 하고 있는것 이상으로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면 그냥 치트 맵핵 수준이 되야하지 않을까요?
로리콤MK / 로리콤님의 코멘트나 쪽지를 보면 가끔씩 정말 놀라게 되네요; 물 흐르듯이 깔끔한 어비스의 상황 정리! 핀치가 오면 아쉬움을 표현하는 코멘트가 달리는건 어쩔 수 없다고 보아요. 그래도 로드의 정신적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wnsdlfh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런 띵언이..!;
T스톤 / 이제 단속팀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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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테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운율보소;
@Karla / 말씀대로 제국이 만들어 지기 위한 진통이라고 봅니다! 반란 한번 안 일어난 나라가 어디있겠어요 ㅎㅎ! 어비스의 후반도 기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고대신의 나라는 확실히 변수가 될 수 있겠네요. 바다에 있어서 유일하게 어비스의 정보가 닿질 않는나라;
@...(-1)... / ㅋㅋㅋㅋ 헉..! 자박꼼(?)드립! 그리고 오늘도 어서 주인공이 죽기를 기대하시는 마이너스님!
@니알라토텝 / 리얼밴쉬?!!
@벌레 / ㅠㅠㅠㅠㅠ 가웨인이 없으니 대타로 아론다이트는 어떠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