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289화 (289/296)

00287 대영주 회담 =========================

드디어 대영주 회담 당일이 되었다. 왕궁 입구에는 대영주를 보러온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고, 병사들은 삼엄한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저기 로즈 님이 오신다!”

“오오, 로즈 님! 부디 바드들의 근무 환경 개선을!”

“티아 님! 반드시 위그드라실 확장에 대한 건의를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소망을 들으며 대영주들이 하나 둘씩 왕궁 입구를 통과했다. 회담장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대영주 본인과 조언자 한 사람 뿐이었다.

“으아아, 떨려라! 그래도 기대되네요! 스승님!”

가장 먼저 회담장의 마당 앞에 도착한 사람은 로즈안느와 티아였다. 티아가 빙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녀도 기대되노라. 세계수에 대한 합리적인 정책들을 준비해놓았다.”

“헤헤. 저도 예술가들이 마음껏 본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거예요! 콘서트 홀도 늘리고! 새로운 악기도 도입하고! 그리고 또…….”

“음, 좋지. 하지만 명심할게 있다.”

티아가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회담에서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선 무언가를 버려야 하느니라. 백성들은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을 더 크게 느끼니, 취사선택을 잘해야 한다. 그 콘서트 홀이라는 걸 늘리기 위해 베틀린 특구의 무엇을 희생할 지 생각해 보았느냐?”

“앗, 그냥 부탁하면 로드님이 다 들어주는 거 아니었어요?”

“……아무리 왕실이라 해도 땅 파서 돈 버는 게 아니다.”

티아가 로즈안느의 조언자로 따라온 원로의 눈치를 힐긋 보았다. 원로는 주먹을 파르르 떨며 분노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동안 뭘 배운 거야!’라고 윽박지를 듯한 표정이었다.

“두 분, 그렇게 꼭 붙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벌써 동맹이라도 맺은 겁니까?”

키리안이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지며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단정은 정복 차림이었지만 다리에는 여전히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어머, 키리안! 정말 오랜만이에요! 몸은 괜찮아요?”

“예, 누님. 끄덕없…… 윽!”

본인의 건재함을 과시하려 보디빌더 포즈를 취하던 키리안의 몸에서 두둑! 소리가 났다. 그가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하자 로즈안느가 어쩔줄 몰라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키리안의 입가에 아빠미소가 그려졌다.

“카사르에서 고생 많았다. 키리안 영주.”

티아의 목소리에 키리안이 군기 들린 군인처럼 번쩍 몸을 세웠다.

“아, 아닙니다! 제가 엠파이어를 잘 지키고 있었더라면…….”

“다들 안녕하세용!”

카사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바로 이때에 타이밍 나쁘게도, 카사르 팀인 클랜장 바톨과 아론다이트가 등장했다. 키리안의 인상이 조금 굳어졌다.

“…후우, 제 상처는 그렇다 치더라도 카사르 영지가 이 회담에 참석할 수 있다니…….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앗! 거기 소년, 지금 우릴 욕하는 거야?”

아론다이트가 바로 그 목소리를 캐치하고는 물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키리안은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어머, 어머, 계속해!”

“……예?”

“계속 날 매도해! 더욱 더 심한 말로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히라고!”

“…….”

키리안은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아론다이트님은 이제 어비스에 협조하기로 하신 건가요?”

로즈안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론다이트는 보호트의 자리를 물려받아 마스터 나이트가 된 심복이었다. 보호트를 죽인 어비스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민감한 질문이었지만 아론다이트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응! 협조할거야!”

“…명색이 기사라는 자가 자존심도 없습니까? 우리는 당신의 왕을 죽였던 적입니다. 그런데도 머리를 숙이겠다구요?”

키리안이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지만 아론다이트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미안! 난 머리가 멍청해서 사람간의 관계가 어떻고 나라간 사정이 어떻고 복잡한 건 잘 모르겠지만 말야. 그래도 남겨진 카사르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거야! 그게 보호트 경도 바라는 일일 테니까.”

“……결국 득 보는 짓은 다 하겠다는 거군.”

아론다이트가 살랑살랑 팔을 흔들었다.

“너무 그렇게 핏대 세우지 말라구우! 난 그때 수용소에 있어서 이야기만 들었지만, 엠파이어의 반란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하잖아.”

“그렇다고 한들, 엠파이어에서 허무하게 죽은 내 동료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요.”

키리안은 어린나이에 실력을 인정받아 어비스군의 장군과 아로게쓰 영지의 대영주라는 중책을 맡고 있다지만, 그 속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묵은 감정을 그리 쉬이 풀어내지 못하였고, 숨기는 것도 어설펐다.

“아아, 뭐 그렇네. 내가 미움 받는 건 어쩔 수 없으려나? 그래도 좋아!”

“……?”

“사람을 미워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감정이잖아? 계속 날 미워해! 그리고 분노해! 가끔 내 엉덩이를 때리는 걸로 분노가 풀린다면 그것도 환영!”

“……상대하기도 싫군요.”

뒤이어서 룬팽과 치마르마와 도착했다. 같은 북부 쪽 출신이라 그런지 두 사람은 꽤 죽이 잘 맞아 보였다. 다만 둘이 붙어 있을 때 한 쪽은 두터운 털 갑주이고 한 쪽은 노출 많은 옷이라는 의상 차이의 괴리감이 있었다.

“음하하! 좋군. 좋아!”

룬팽이 큰 소리로 웃으며 아론다이트의 어깨위에 팔을 둘렀다.

“이게 누구신가? 아론다이트! 우릴 멸망시킨 나라의 대표지만 이젠 다 같이 동등하게 떨어진 신세가 됐구만! 하하하!”

“증오스러운 카사르의 기사인가.”

치마르마의 혓바닥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조심해. 당신의 목덜미에 독니를 박아 넣을 때를 기다리고 있겠다.”

“으와아! 나 엄청 미움 받고 있구나!”

아론다이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와는 달리 얼굴은 매도당한 흥분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만들 하시오.”

바톨이 다가와 두 사람을 밀어냈다. 그제야 룬팽과 치마르마는 공세적인 시선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났다. 대영주 자격을 따냈다고는 하나 아직 외부인 딱지가 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니 클랜장에게 밉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대영주들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마지막으로 게노세르크의 대영주 케이론과 오펙투스의 관리자로 뽑힌 클랜장 피에르가 나타났다. 오즈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 엔즈도 피에르의 옆에 있었다. 그는 인상 좋고 통통한 몸집의 중년 마법사였다.

“어, 두 팀이 왜 같이 와? 게노세르크와 오펙투스 짜고 치는 거요?”

“수인과 마법? 뭔가 안 어울리네요.”

“하하하!”

대영주들이 농담을 던지면서 긴장을 풀고 있는 그때, 회담장 문을 열고 이브가 나타났다.

“반가워요, 여러분.”

“이브 님!”

“들어오세요. 폐하께서도 곧 오실 거예요.”

회담장으로 들어오자 모두들 화려한 그 외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리석으로 만든 벽은 번쩍번쩍 광이 났고 천장에는 신화 속의 웅장한 장면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흔들릴 때마다 찬란하게 빛나는 대형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밝혔다.

회담장의 중앙에는 아홉 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메이드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음료와 과자를 나르고 있었다.

대영주들은 각자 이름이 있는 자리에 앉았고, 그 뒤로 조언자들이와서 섰다. 아론다이트와 엔즈 또한 조언자로서 클랜장들 뒤에 기립했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곧이어 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영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드를 맞이했다. 로드도 웃는 얼굴로 화답하며 상석에 앉았다.

“바쁘신 와중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로드가 그들에게도 앉으라며 손짓한 뒤 대영주들의 얼굴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침묵 속에서 모두의 시선이 로드에게 집중되었다.

“……뭐, 딱히 떠벌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공식적인 자리니까 기조연설은 해야겠죠.”

로즈안느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입모양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로드가 그녀의 파이팅에 힘입어 일을 열었다.

“사시사철 혹한이 몰아치는 북방의 땅도, 매일 매일 탐스러운 과실이 익어서 떨어지는 어머니 나무의 품도, 먹고 먹히는 양육강식이 지배하는 왕국도, 찬란한 문명이 꽃피는 문화의 도시도, 그리고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하여 버려진 땅에 모인 낙오자들의 뒷골목까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그 세월의 벽이 하루아침에 무뎌질 것이라 낙관하지 않습니다만,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우리도 바뀌어야 합니다.”

회담장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로드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목받고 있다는 것은 긴장되지만 기분은 좋았다. 로드는 덤덤하게 연설을 이어나갔다.

“차이를 인정하지 못해 검을 휘둘러 굴복시키는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행각입니다. 대륙은 이제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십시오. 서로 다른 것은 죄가 아니라 아름다운 것입니다. 차이를 넘어 공존하는 것이 대륙에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는 일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의견이든 가감 없이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오오!’ 흥분한 룬팽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가 환호했다. 로드가 감사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긴말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하죠.”

*

회담 첫날의 주요 쟁점은 각 영지의 생산품 할당량에 대한 것이었다. 자원의 생산량과 가치는 영지마다 기준이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간의 협의가 반드시 이루어져야했다.

“우리의 밀 생산량에 비해 육류의 기본 생산량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키리안 영주.”

“저희 영지는 퍼들스퀘어 하나뿐이니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럼 아로게쓰의 산간지역에 대대적으로 목장을 만드는 건 어때요?”

“그럼 또 예산이 빠질 것이니라. 목축업에 예산이 들어가는 만큼 아로게쓰 영지 육류의 기본 할당량을 높일 것인데 괜찮겠느냐? 그리고 아직 그곳은 ‘마운틴 고블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만.”

“지금은 육류가 문제가 아니라 날로 먹는 카사르가 문제지! 강철과 무구는 언더하임에서도 생산할 수 있는 품목 아니오?”

“앗! 앗! 왜 자꾸 절 걸고 넘어져요? 자꾸 저를 매도하시면 기분 좋…… 가 아니라! 애초에 주품목이 강철이랑 무구인데 언더하임과 겹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난 조언자가 아니라 대영주 대리에게 물은 것이오!”

“카사르의 새로운 생산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류를 맡은 아로게쓰의 육류 생산량이 떨어지니 카사르에서 대신 하는 게…….”

“카사르에서 짐승을 키우라니 말도 안 돼! 그리고 그쪽 카르프리도 목재는 알브헤임과 겹치잖아요!”

“정글의 나무와 숲의 나무는 엄연히 용도가 틀립니다!”

“나무가 그냥 다 같은 나무지 뭐!”

“아, 자꾸 조언자가 발언해도 되는 것이오?”

회담 첫날이라 그런지 불꽃 튀는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격한 토론을 보고 있던 로드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와, 나 혹시 너무 심하게 경쟁 붙인 게 아닐까?’

가장 재밌는 구경은 싸움 구경이라는 말도 있다지만, 질서와 중심이 잡히지 않은 토론은 난장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중재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브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래야겠다.”

로드가 손짓하자 구석에 박혀있던 애니록스와 정보부요원들이 다가왔다. 마침 룬팽이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북방의 약초는 쌀 한가마니 정도의 값어치인데 이걸 몇 백뿌리나 가져다 바치라고? 말도 안…….”

“잠깐만요, 룬팽.”

로드가 애니록스에게서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 약초 이름이 ‘백야초’ 맞습니까? 상태 좋은 한 뿌리에 500실버 정도.”

“……!”

룬팽과 그의 조언자가 움찔했다.

“그러니까 세 뿌리는 되어야 쌀 한 가마니 값이겠군요.”

“그, 그 시세는 대체…….”

“대형 중립 상단 10곳의 시세를 종합하여 낸 결과입니다.”

로드가 시세표를 테이블에 착 올려두었다.

“시장가라는 게 절대적이진 않더라도, 가치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보부 요원들이 각종 물품의 시세표와 연간 생산량 등의 자료들을 대영주들 앞으로 펼쳐놓았다.

“이, 이런 귀한 정보를!”

“대단하군.”

대영주들은 웅성거리며 자신의 조언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맞춰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조금 정리가 되려나.’

다시 회담이 재개되었다. 데이터를 바탕으로 명확한 자료가 있으니 전처럼 약초 한 뿌리에 쌀 한가마니니 두가마니니 같은 진실공방이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로드는 턱을 괴고 대영주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토론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테러, 그리고 내통자라……. 아직까지 수상한 낌새는 없는데 말이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이번주 월요병도 힘차게 이겨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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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라토텝 / 무서운 그분들;;

天空意行劍 / 오호, 그렇군요. 신기신기

T스톤 / 그냥 감정의 흔들림 없이 내뱉는 거짓말은 감지하지 못하나 보군요!

알테니아 / ....너무 강력해욧!

Euphoria17 / 오오,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말을 할때의 신체 변화를 탐지하는 거군요. 좋은 해설 감사드립니다!

wnsdlfh / 얼굴 붉히며 흥흥 거리는 유니벨을 그대로 덮... 이 아니라 아껴줍시다.

로리콤MK / ㅠㅠㅠㅠ 저 별은 베아별. 이 별도 벼아별.

...(-1)... / 쌍문동공포의젖꼭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심리효과가 없다면 장난감이겠군요. 법적 효력은 없겠네요!

빛과하늘 / 포돌이를 불러서 저를 묶어놓고 거짓말 탐지기를 가져다대고 저의 대답은 변함없습니다! 제 취향은 건전합니다!

이즈니임 / ㅠㅠㅠㅠㅠ 베아야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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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 헉, 신뢰도가 90퍼 이상? 대단히 높군요.

@Karla / 무, 무서우신분...;; 소설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껴야 하는 로리와 메인히로인에게 그런 험한 난관을 ㅠㅠㅠ 멘탈 스크래치가 아니라 자살안하면 다행아닌가요 ㄷㄷ;

@책읽는고래 / 헉 ㅠㅠ 아직 멀으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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