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8 대영주 회담 =========================
낮부터 시작된 회담은 어둑어둑해지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큰 진전은 없었지만, 생산품 할당량 문제는 그래도 로드가 시세표를 건네준 이후 서서히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중립 입장인 로드의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토론이 과열되면 중재하거나, 공정하지 않은 포인트를 짚어내 지적하거나, 가끔씩 키리안, 룬팽, 치마르마에게 유난히 집중 포화를 받고 있는 아론다이트를 구제해주는 정도였다.
회담이 장기전으로 흐르자 로드도 슬슬 피로함을 느끼고 있는데 유니벨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회담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로드가 슬쩍 회담 테이블에서 빠져나와 그녀에게 다가갔다. 대영주들은 토론에 열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경비 수고하네. 밖엔 별일 없었어?”
로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조용해. 정문 쪽에 몰려왔던 사람들도 이제 다 빠져나가는 추세야. 여긴 어때?”
“뭐, 쭉 살펴봤지만 별달리 신경 쓰이는 부분은 없네. 다들 회담에만 집중하고 있어.”
“흐응.”
유니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변태 가르마 녀석이 말한 전제부터 잘못된 거 아냐? 그런 서신이 발견됐다고 해서 꼭 대영주들이 범인이란 법은 없잖아.”
“…확률의 문제지. 대영주들이 범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거야. 영지민 전부를 수사 리스트에 넣을 수는 없으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중, 회담 테이블의 로즈안느가 유니벨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러다 결국 조언자에게 꿀밤을 맞으며 집중하라고 한 소리 들었다. 유니벨이 킥킥거렸다.
“쟨 언제 철들려나?”
“이제라도 널 보는 내 심정을 이해해주니 다행이다.”
“…야! 왜 시비야!”
까치발을 든 그녀가 양 주먹으로 투툭하고 로드의 가슴을 때렸다. 오, 제법 귀여운 행동도 보여주질 않은가.
로드가 능글맞은 미소를 짓자 그녀가 웃지 말라는 듯 옆구리를 퍽 때렸다. 이번엔 조금 아팠다.
“그럼 지금 가장 의심 가는 사람은 누구야?”
“……글쎄.”
로드가 대영주들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오펙투스의 조언자인 엔즈라는 남자가 그마나…?”
기립해 있는 통통한 중년남자가 끊임없이 피에르에게 귓속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왜? 수상한 행동이라도 했어?”
“그 반대야. 배경 정보도 적고 회담장에서도 별다른 특징도 없어서 한 번 꼽아봤어.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숨기려는 느낌이랄까.”
유니벨이 인상을 구겼다.
“에이씨, 얼마나 단서가 없으면 특징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꼽을 정도야? 뭔가 파바박! 하고 느낌 오는 사람 없어?”
“……파바박이 뭔데?”
“딱 봐도 범인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그런 거 말야!
로드가 다시 회담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행동으로 꼽자면 룬팽이려나.”
“왜?”
로드는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룬팽을 가리켰다. 회담 내내 큰 목소리로 상대를 윽박지르던 그였지만 글레이시온이 화제에 빠져 있을 때에는 가만있질 못하고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었다. 유니벨이 바짝 로드에게 바짝 붙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네! 회담에만 신경 쓰면 되지 뭘 자꾸 기웃거리는 거야? 저놈이 범인이네!”
그때 룬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타임!”
로드와 유니벨이 움찔했다. 대영주들또 대화를 멈추고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백하고 싶은 게 있소!”
로드가 눈을 빛냈다. 오오, 글레이시온의 대영주로서 뭔가 승부수를 던지려는 건가? 아니면 내통자로서 단서가 될 만한 뭔가를?
“오줌 좀 싸고 오겠소이다!”
“…….”
그냥 바보다.
룬팽이 ‘으하핫!’ 하고 웃으며 걸어가다가 기둥 앞에서 바지춤을 내리려고 했다. 이브가 벌떡 일어나 제지했다.
“룬팽 영주! 화장실은 저쪽입니다!”
“……엥? 그냥 여기서 싸려는데 안 되는 거요?”
“안됩니다!”
“에이, 기둥이 닮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안 되오?
“안돼요!”
그가 투덜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이브와 로즈안느가 동시에 안도했다.
“야, 팬더. 쟤는 절대 아닌 것 같아. 그냥 제 2의 피닉스 같은 놈이잖아.”
유니벨이 단정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로드도 동의했다.
마침 룬팽 때문에 회담 테이블도 어수선해진 겸해서 로드가 대영주들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 그럼 잠깐 휴식 시간을…….”
나름 배려심 깊은 군왕의 면모를 보이려던 로드의 의도는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에 끊기고 말았다.
콰콰쾅!
대영주를 비롯한 모두의 귀를 가득 매운 것은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강렬한 폭음이었다.
새까만 폭발 구름이 천장을 뒤덮고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샹들리에가 바닥에 떨어져 회담장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였다.
“테러야! 다들 엎으려!”
유니벨이 소리쳤다. 화륵! 바닥의 카펫에 불이 붙으며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꺄아아아아!”
“무, 무슨 일이야?”
대영주들은 혼란에 빠졌다. 꽈아아아앙! 2차 폭발이 일어나자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들이 몸을 낮추고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귀가 먹먹한 폭음 사이로 마구 소리치고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야 또한 타오르는 불길만 보일뿐, 어둠과 연기로 뒤덮인 회담장은 한치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완전한 혼란이었다.
“으으…….”
그나마 로즈안느는 제일 먼저 패닉에서 빠져나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출구 쪽으로 기어가던 그녀의 눈앞에, 검은 뭔가가 우뚝 서 있었다.
새까만 전신 타이즈에 얼굴도 마스크로 가리고 있는 남자였다. 결단코 어비스 암살단원들의 복장은 아니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은 벌써 누군가를 베었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공포스러운 광경에 그녀는 즉시 움직임을 멈추었지만, 남자가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딱 마주치고 멀었다.
저벅 저벅.
그가 로즈안느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도망가야 하나? 맞서 싸워야 하나? 그녀의 머릿속 생각들이 뒤죽박죽 엉켰다. 그때 남자가 로즈안느가 있는 방향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이, 이능으로 공격?’
그녀가 대처하려고 재빨리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능이 아니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자게 무슨 뜻인지, 그녀에게 말하는 것인지, 전부 불분명했다.
‘…알게 뭐야! 저 자객들은 로드님을 노리고 온 거야!’
류트는 숙소에 두고 와서 소환이 먹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연주 없이 노래를 불렀다. 터져 나오는 폭발음 때문에 주위가 시끄러웠지만 ‘선율의 아이’의 효과로 만들어지는 음악은 소리가 나지 않아도 마력 형태로 방출된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자객 또한 검을 세우고 그녀에게 뛰어 들어왔다.
‘……큭!’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은 출중하지만 로즈안느는 아직 현장 경험이 부족했다. 요란한 폭음에 집중력이 깨져나가며 준비한 스펠 뮤직이 흩뜨려졌다. 그녀는 노래를 계속하는 대신 몸을 옆으로 날리는 회피를 선택했다.
후웅! 공기를 가르는 검격이 머리 바로 위를 지나며 그녀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 휘날렸다. 바닥에 넘어진 그녀가 바닥을 대굴대굴 구르는 사이 주위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나며 잔해가 떨어졌다. 연기에 집어삼켜진 그녀는 자신이 어딜 가는 지도 모르고 계속 움직였다.
쿵!
벽에 부딪치며 그녀의 몸이 멈췄다.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이 몸을 일으킨 그녀가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검을 휘두른 암살자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썩 보기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따돌린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또 다른 자객이 보였다. 침입자는 여러 명이었다. 또 다른 자객이 치마르마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크, 큰일이야!’
치마르마와 자객이 대치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자객이 걸음을 멈추고는 손짓했다. 로즈안느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
잠시 후, 그녀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치, 치마르마 님?’
치마르마가 고개를 돌려 로즈안느를 돌아보았다.
폭발 속에서, 그녀는 웃고 있었다.
어깨를 파르르 떠는 로즈안느의 뒤로 검은 인형이 훅 다가와 입을 헝겊으로 틀어막았다.
*
쿠쿵! 콰콰콰쾅!
연이어 터져 나오는 폭발 속에서, 자객과 치마르마는 시선을 마주했다. 자객은 등을 돌려 벽 끝으로 걸어가 손바닥을 짚었다. 벽의 한 부분이 액체처럼 녹아 흐르며 밖으로 나가는 공간이 생겼다.
자객이 따라오라고 손짓하자 치마르마는 지체 없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밤의 어둠을 틈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회담장의 정문 쪽에는 이미 병사들이 잔뜩 몰려있는 듯 고함소리가 가득했다.
“무, 문이 잠겨있어!”
“뭐해? 그냥 부수고 들어가!”
난리를 틈타 자객과 치마르마는 빠르게 회담장을 지나 왕궁 뒤편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다리에 모든 마력을 집중한 채 도주하는 두 사람의 옆으로 배경이 휙휙 지나갔다.
앞서 달려가던 자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마르마는 답답함을 느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계획과 다르잖아!”
“…….”
“거사는 둘째 날에 하는 거 아니었어? 폭발은 또 뭐고?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
그제서야 자객이 뒤를 돌아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로드 폴렌티아가 우리 계획을 눈치 챘다.”
“……뭐?”
“당신에게 보낸 밀서가 중간에 탈취 당했다. 그래서 놈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계획을 바꿔 첫째 날에 테러를 감행했다.”
그 말에 치마르마가 혀를 내둘렀다. 적에게 일정이 들켰다면 보통은 다음을 기약할 텐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저지르다니. 무모하지만, 또 과감했다.
“서둘러. 어비스의 어쌔신들이 쫓아 올 거다. 동료들과 합류하여 빠져나간다.”
“그들은 어디 있는데?”
“언더하임 도시에 숨어서 우리 기다리고 있다. 마차를 타고 바로 이동한다.”
두 사람은 이제 왕궁을 빠져나와 미로 같은 거주지의 골목들을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체력에 자신 있던 치마르마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도주 루트를 비비 꼬아서 그런지 아직 추격자들은 없었다.
“이쪽이다.”
자객이 골목에서 몸을 홱 틀었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이미 상인으로 분장한 두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무사했군. 타시오. 경비들에게 돈을 뿌려놓긴 했지만 검문을 한다면 힘으로 뚫고 나가서 말로 갈아탈 것이오.”
치마르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로 들어가려는 그때였다.
꾸욱!
자객 두 명이 순식간에 그녀의 뒤로 돌아와 양 팔을 붙잡아 꺾었다. 치마르마가 반응하기도 전에 또 마차 안에서 숨어있던 자객이 튀어나와 그녀의 복부를 발로 가격했다.
“커헉!”
내장을 뒤흔드는 충격에 치마르마가 헛구역질을 했다. 양 팔을 잡은 자객이 그녀의 다리를 차서 바닥에 무릎 꿇리고는 양 팔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웠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녀가 마력을 일으켜 변신하려는 순간 검 끝이 그녀의 턱 밑으로 척 다가왔다.
“무의미한 저항은 관두시지요.”
“……!”
치마르마가 식은땀을 흘리며 검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타이즈 차림의 자객이 머리에 쓴 두건을 벗어냈다. 밤하늘 같은 흑발이 찰랑거리며 흘러내렸다.
“다, 당신은……!”
“대영주 치마르마, 테러 혐의자로서 그대를 체포하옵니다.”
비월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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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올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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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sdlfh / 로드 한일 : 정리
니알라토텝 / ㅠㅠㅠ 그래도 찔끔찔끔 성장하는 무늬만 쥔공
책읽는고래 / 으앙앙! 힘내새요!
T스톤 / 전편에선 전혀 알 수 없었죠 ㅋㅋ
로리콤MK / 반전...?!
최카츄 / 사실은 비월 특별판이었습니다...! (퍽
...(-1)... / 면담이 너무 잔혹한거 아닙니까? 1.희동이 2.둘리 3.고길동씨 라인업이 ㅋㅋㅋㅋ 인권 존중좀!
벌레 / 그렇군요. 제 예상은 한 20% 라서 상대적으로 높게 보였나 봅니다 ㅋㅋㅋ
사탕수수158 / 핥핥짝!
Karla / ....배우신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