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1 대영주 회담 =========================
미네는 집무실로 들어와서 로드와 마주했다. 로드의 곁에는 이브와 티아, 유니벨이 있었다.
“마셔요.”
이브가 따뜻한 홍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네는 감사의 의미로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멀뚱히 잔을 보고만 있었다.
“꼭 날개를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그녀는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어 팔을 자유로이 쓰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충인족은 몸에서 페로몬을 방출합니다. 몸에서 나는 땀처럼 완전히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이라…….”
그래서 저렇게 날개로 막고 있는 것인가? 참 독특하다.
“그럼 차는 어떻게 마시는데?”
그녀가 앉은 자세에서 머리가 테이블에 닿을 만큼 허리를 숙여보였다. ……설마 저 자세로 혓바닥만 날름거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어쩐지 보는 사람만 민망해졌다.
“……충분해. 이해했어.”
그녀가 다시 곧게 허리를 폈다. 그냥 팔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저러는 이유가 있으려니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보다 B급 지략형 영웅이라…….’
로드는 이곳으로 오는 중에 그녀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했다. 처음 티아와 마주했을 때와 동일한 지략B등급. 물론 지금의 티아는 B+로 성장했지만 지략형 클래스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어떤 방법으로 이 여자를 심문할지 고민하던 로드였지만 스테이터스를 봐 버린 뒤에는 중증인 인재 수집병이 도지는 것을 느꼈다. 초강대국 카사르를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쪽 영웅들이 대부분 죽어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인재 수급을 하지 못해 씁쓸한 와중이었다. 그나마 이렇게 룬팽이나 미네 같은 차세대 영웅들이 튀어나와줘서 다행이었지만.
‘정신 차리자.’
로드는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진정시켰다. 인재라고 해도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치마르마도 무력 C+, 지략 C+ 라는 출중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을 노리던 자객이지 않았던가. 플레이어의 스테이터스 기능은 사람이 배신할지 하지 않을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로드는 애니록스가 가져다 준 그녀의 프로필이 적힌 서류를 보았다.
“…테스카틀리포카 가문이로군?”
“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지만 카프르리 왕실의 성이다. 로즈안느와 마찬가지로 왕족, 즉 공주님이다.
로드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였군. 슈네처의 약혼자가.”
“네에에?”
“뭐, 뭐라고?”
뒤에서 가신들이 놀란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게 죽은 치마르마는 자신이 슈네처의 연인이라고 말했고, 슈네처를 죽인 어비스에 복수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약혼자가 여기 있는 미네라니.
로드는 끌끌 혀를 찼다. 그냥 흔히 퇴장한 엑스트라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죄 많은 남자였구나, 슈네처.
“묻고 싶은 게 산더미야.”
로드가 프로필을 테이블에 툭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왕실의 핏줄인 네가 일개 족장의 시중을 들고 있었지? 그리고 네가 약혼자라면 슈네처의 연인이라고 주장한 치마르마는 뭐고? 심지어 넌 치마르마가 슈네처를 사랑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어. 그녀의 개인원한으로 인한 테러라는 것까지 추측해 냈으니까.”
“네.”
…말수가 많은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네 이야기를 들려줘.”
“폐하께서 보잘 것 없는 천신의 이야기를 어찌…….”
“명령이다.”
“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르프리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은 왕실에 있었다. 이웃한 국가인 카사르는 글레이시온과 긴 전쟁을 펼치고 있었고 알란드는 연구와 시대 발전에 전념했다. 다른 나라들이 멸국을 이어가는 가운데에서도 카르프리는 더없이 평화로웠으나 이것은 ‘독’이었다. 왕은 어느 순간부터 평화에 심취해 정치에 손을 놓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들어 방탕한 생활을 해나갔다.
로드는 여기까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입맛이 씁쓸했다. 미네는 왕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정도로 표현했지만 로드는 그 속을 짐작하고 있었다.
‘플레이어가 문제였군.’
지구에서 지내던 일개 소시민이 왕정사회의 왕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한 순간에 나라 안의 모든 권력을 거머쥐게 되며 산해진미와 빼어난 미녀들, 원하는 것은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 주지육림을 한번이라도 맛보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 오죽하면 망치고 싶은 적수가 있을 때엔 기꺼이 전재산을 털어 주지육림을 대접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로드는 본의 아니게 꼭두각시 왕에 깃들어 주신전을 시작하자마자 온갖 고충을 다 겪었지만, 평화로운 구석 나라의 왕으로 시작했다면 자신도 나태한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평화는 잠시뿐, 카르프리의 난관은 지금부터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카사르와 글레이시온의 전쟁이 임시 휴전을 맺은 것이다.
그 휴전이 카르프리 입장에선 결정타가 되었다. 카사르는 칼끝을 카르프리로 돌렸다. 그동안 아득바득 군사력을 키웠어도 모자랄 판에 전쟁 준비는커녕 모두가 평화에 심취해있었으니, 전쟁으로 단련된 카사르 기사단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카르프리의 영토는 유린당했고 순식간에 수도 크루바칸이 함락 당하였으며 마침내 플레이어의 목까지 떨어졌다. 왕실은 몰락하고 각 지역을 다스리던 다섯 족장들이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었다.
카사르는 카르프리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고 쥐어짜내어 자신들의 군사력 바탕으로 삼았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야했고 모든 원망은 카르프리 왕실에 전가되었다.
미네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카르프리의 핏줄이었지만 이제 왕실은 카르프리 내에서 미움 받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한때 왕족의 상징인 충인족의 날개와 더듬이를 본 사람들은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오물을 던지며 외쳤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런 참담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슈네처였다. 슈네처는 아크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장군이 되었고, 자신의 입지를 굳혀 그 힘으로 카르프리를 보호하려 했다.
한편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치마르마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슈네처는 왕실이 건재할 당시 공주 미네와 약혼했었다. 왕과 대장군의 정략혼인은 흔히 있어온 일이었으니 이상할 게 없었다. 치마르마는 미네를 미워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그녀는 미네를 시녀로 데리고 다니며 끊임없이 못살게 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카르프리의 희망인 슈네처가 어비스전에서 전사했다. 그 이후 카사르 자체가 멸망했고 어비스는 카사르의 통치지였던 카르프리를 자신들이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비스와 싸워 이기면 독립할 수 있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족장들은 통치를 받아들었다.
그러던 중 아르곤 출신의 관리가 찾아왔고, 지금의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구나. 리네는 몰락왕실의 핏줄. 족장 세력이 무너지면 카르프리의 새로운 통치자로서의 정통성도 확보된다.’
참 어떤 나라던 간에 사정없는 나라는 없다고, 로드는 생각했다.
그녀와의 이야기로 얻은 게 많았다. 우선 그녀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족장 세력을 몰아내고 자신이 카르프리의 통치자가 되는 것이 살아남는 것 이상으로 그녀에게 있어서는 숙명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혹시 족장들에게 접촉한 아르곤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
티아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로브 차림에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족장회의에서 드러냈겠지만 천신은 그곳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렇군. 혹시 아직도 카르프리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웬일로 얌전히 있던 유니벨이 팔짱을 끼며 다가왔다.
“다들 이 여자를 믿을 수 있겠어?”
“유니벨.”
“같은 동료를 일말의 동요도 없이 베었던 여자야. 이런 녀석들은 대부분 권력에 미친 사이코패스들이라고!”
“그들은 동료가 아닙니다.”
미네가 대답했다.
“아, 혹시 밥이 식었다고 머리에 똥물을 끼얹거나, 메뚜기에 오를 때마다 받침대로 쓰거나, 심심하면 광장에 묶어놓고 백성들이 던지는 오물을 맞게 하는 자들도 함께 다니기만 하면 동료에 해당된다고 규정하시면…….”
“그만.”
로드가 재빨리 손을 뻗어 자제시켰다.
‘아주 제대로 벼르고 있었구만, 이 녀석.’
난세, 참으로 무서운 시대다.
“좋아, 미네. 네 동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됐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난 네 야망이 궁금하다.”
“……?”
“지금 네가 가진 건 살의뿐이잖아? 카르프리의 대영주가 되어서 뭘 하고 싶지?”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통치입니다.”
“…….”
마치 마법사가 되어서 뭘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마법’이라고 답하는 레벨의 수준이었다.
“…그래 어떻게 통치하고 싶은데?”
“잘 통치하고 싶습니다.”
이쯤 되면 로드는 스테이터스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략등급 B 맞나? 그때 언제나 시크하던 그녀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실은 복수를 하고 권력을 되찾는 것 이외에는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그래 보인다.”
다른 가신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저는 제 권력의 원천이 될 어비스를 배신하지 못합니다. 어비스는 카르프리 영지를 온전히 손에 넣고 싶습니다.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합니까?”
“…그렇군.”
로드가 씩 웃었다. 비즈니스 관계라면 그게 맞겠지.
“하지만 대영주가 되면 넌 내 가신이 되는 거잖아.”
“예.”
“난 내 가신들이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걸 원하지 않아. 나와 가신들, 그리고 이 나라의 모두가 함께 성장했으면 한다.”
로드가 손을 내밀었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암살단원들을 빌려주지. 하지만 이건 네 계획과는 별개의 숙제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
그녀가 로드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맞잡았다.
“네, 폐하.”
- 미네 테스카틀리포카(B)이 소속 가신이 되었습니다.
로드가 그녀를 받아들이자 이브와 티아도 새로운 동료에게 친근한 인사말을 건넸다. 유니벨은 조금 시큰둥한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인사치레 정도는 했다.
‘……음, 그럼 카르프리 숙청은 언제 하는 게 좋으려나?’
로드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시야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 ‘파스칼 아틀루스’님이 ‘로드 폴렌티아’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이카루스다!’
로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신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로드는 대강 화장실 좀 다녀온다며 둘러대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흐흐,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파스칼.’
재밌는 협상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부로 2017년 마지막 달! 12월이 왔습니다! (와; 미친; 벌써;;; 시간 너무 빨라)
한해 마무리 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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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sdlfh / 핡핡!
벌레 / 헉! 하지만 그 사실과는 달랐습니다! 몰락 왕실의 핏줄
시즈프레어 / 등장과 동시에 흑막설!
T스톤 / 엥? 이정도 패시브는 모든 남주들이 다 가지고 있는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Gneji / 안말렸으면 바로 발가락으로 넘어갔을;
Schmerzs / 로드도 왕인 주제에 여왕만 두명이네요. 이런 이득이;
로리콤MK / 베아는 병실에 누워있으니까 의심을 할 수가 없죠 ㅠㅠ 그리고 베아같이 귀여운 아이를 의심할바는 로드는 죽음을 택했을 겁니다. 그러디 그 칼좀 일단 치워주...
니알라토텝 / 넵?? 그 정도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1)...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곤충여왕 = 캐리건 = 칼날여왕?; 그분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기화랑 / 진범설이 많군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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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워커 / 왕들의게임입니다!
@왜이리들다재밌지 / 힐링 코멘 감사합니다! 독자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책읽는고래 / 돌아오셨군요! 와아아아! 시험 잘쳤나 못쳤나는 묻지 않겠어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