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2 대영주 회담 =========================
딸칵.
로드는 아무도 없는 빈방에 홀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지휘관 창을 열었다.
- ‘로드 폴렌티아’님이 1:1대화를 수락하셨습니다.
우웅! 로드가 수락버튼을 누르자마자 새로운 화면에 파스칼의 모습이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몸 전체를 뒤덮는 깃털망토를 두른 괴기한 차림이었다.
“오랜만이데이, 로드.”
인사를 전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러네요. 그간 잘 지내셨죠?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로드가 빙그레 웃으며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틀림없이 제안을 가져왔으리라. 그것을 끄집어내야 한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남들이 보기엔 평범하게 안부를 주고받으며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모습이었지만 이미 서로간의 날선 탐색전은 시작되었다. 로드가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자 파스칼은 훅. 하고 한숨을 쉬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마.”
그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말씀하시죠.”
로드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아르곤의 움직임이 심상찮데이.”
“저도 보고받아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에브게니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들’의 움직임만 심상치 않은 거죠.”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듯 파스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세레스티나 때와는 달라. 정보로 우위를 점할 생각이라면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에브게니아의 바로 옆이 이카루스의 영토다. 이것은 아르곤이 여지없이 그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큼. 흠흠. 아무튼 아르곤군의 움직임이 심상찮데이.”
“네.”
파스칼이 애써 환한 미소를 꾸며냈다.
”아르곤은 우리 공동의 적 아이겠나? 니 그때 기억하제? 아르곤이 대륙으로 넘어올 때 공동전선을 짰던 거.”
“사실 파스칼 님의 제안 때문에 저도 덩달아 세레스티나의 책략에 말려들었을 뿐이지만요. 그리고 공동전선이라고 하기엔 함께 싸워보지도 못했잖습니까.”
“하하! 같이 아르곤을 공격한 게 공동전선이 아니면 뭐꼬?”
서론이 참 길었다. 어차피 제안할 내용도 다 들통내놓고는 왜 저렇게 질질 끈단 말인가? 로드가 찬바람 쌩쌩 날리는 태도로 일관하자 결국 파스칼이 두 손 들었다.
“……마, 그래서 말인데. 로드”
“네.”
“이번에도 같이 공동전선을 펼치는 게 어떻노?”
“저는 아직 전쟁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로드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카사르를 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영토가 너무 늘어나 버려서 지금은 내정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사실 방금까지도 대영주 회담을 하고 있던 중이었거든요.”
“암만 그래도 아르곤은…….”
“아직 문화시대 특화병종이 준비가 되지 않은 시점에서 제가 아르곤과 싸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로드가 또박 또박 대꾸할수록 파스칼의 표정은 점점 더 딱딱해져갔다.
“달리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후아아.”
파스칼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알겠다, 마. 속국! 속국해주면 될 꺼 아이가?”
“……음, 그렇군요.”
로드가 짐짓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확실히, 이카루스가 제 밑으로 들어와 준다면야 제 전력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할 당위성이 갖춰지긴 하네요.”
“……마, 로드!”
“좋습니다, 속국으로 받아들이죠.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파스칼이 불안한 듯 침을 꼴딱 삼켰다.
“이카루스가 가져갔던 루미너스의 영토, 이제 돌려주십시오.”
“뭐, 뭐라카노? 지금!”
“잊으셨습니까? 멸망한 게노세르크의 통치지역을 이카루스가 무단으로 가져갔지 않습니까? 제가 아크와 대립하는 사이에 말이죠.”
“……끄윽.”
파스칼도 이건 꽤 고민이 되는 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니 이제 땅도 억수로 많다아이가? 그 쪼매난 루미너스 땅 가져가봐야 뭣에 쓰겠노? 차라리 속국이 쓰는 게 전력상으로도 효율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파스칼 님. 같은 진형을 꾸리기 전에 정산할건 깔끔히 정산하고 넘어가자는 의미입니다. 제 원래 영토를 돌려받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파스칼이 삐질 땀을 흘렸다.
“그, 그럼 거점영지 한 개로…….”
“저는 강탈당한 루미너스의 전 영토를 원합니다. 어차피 제가 지켜드릴 텐데 그렇게 영토가 많이 필요합니까?”
로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면 설마, 힘을 모아 독립이라도 준비하려고 본토 외에 다른 땅이 필요하신 건 아니죠?”
“으으으으으!”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파스칼이 근처에 있는 테이블을 발로 밀었다. 와장창창! 물건들이 마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알았다! 알았다 마! 이카루스 영토 다 줄 테니 병력이나 빨리 보내!”
“감사합니다.”
로드가 씨익 웃었다.
“루미너스 땅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주시고 영지 양도 서류를 준비해 주십시오. 병력은 어비스 최강군으로 보내드리죠.”
“……고맙데이.”
“그리고 하나 더.”
파스칼이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또 뭐꼬? 있는 놈이 더 하다더니! 아주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을 작정이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로드는 이때 자신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스스로도 무척 얄미운 표정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적하는 게 늦었는데, 저는 존대 꼬박꼬박 하고 있는데 왜 파스칼 님만 반말 씁니까?”
“…….”
“…….”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 이제부터…… 존대 쓰면 될 거 아이가! 아니, 쓰겠습니다. 마!”
“아하하! 농담입니다. 이제 같은 팀이 됐으니 남은 주신전, 잘 부탁드립니다.”
지휘관 창을 닫은 로드가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재밌어라. 역시 외교의 꽃은 갑질이야.”
협상을 다소 뺀질거리며 한건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예전에 루미너스 영토를 차지해놓고는 뻔뻔하게 구는 게 무척 짜증났던 터라 언젠가 한 번 쯤 되돌려주고 싶었다.
아무튼 파스칼과 이야기는 잘 됐다.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세레스티나를 싫어하고 있고, 완패를 당하기도 했다. 복수전을 꿈꾸는 파스칼이 그녀에게 무릎을 꿇는 건 죽기보다 싫을 것이다.
만약 자존심을 버리고 아르곤에 붙는다고 해도 불안한건 마찬가지이다. 어비스야 멸망보너스가 차고 넘치지만, 아르곤은 이카루스를 속국으로 부리는 것보다 그냥 멸망보너스를 취해버리는 편이 더 깔끔했다.
즉, 파스칼은 로드와 손 잡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질질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스칼과 이야기를 마친 뒤 로드는 주요 가신들을 집무실로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지침을 내리겠어.”
먼저 로드는 미네를 바라보았다.
“미네.”
“네, 폐하.”
“암살단원들과 함께 카르프리로 올라가 족장들을 제거해. 모든 계획은 네 판단에 맡기겠어.”
“천신이 명을 받듭니다.”
미네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비월.”
“하명하시옵소서.”
“이카루스에게서 구원요청이 왔다. 1만을 줄 테니 이카루스로 가서 그들을 구원해.”
“삼가 받들겠사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니벨이 놀라서 물었다.
“야, 팬더. 1만은 너무 많은 거 아냐? 아직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라며.”
“이 1만이 비월이 이끌 군단의 기초가 될 거야. 본 전쟁 전에 미리 호흡을 맞춰볼 수 있겠지.”
“화, 황송하옵니다. 폐하.”
놀란 비월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야! 왜 나는 1만 안주고 군단장도 안 시켜줘?”
역시나 유니벨이 칭얼거렸다.
“넌 재정관이라는 직책이 있잖아. 그리고 전시에는 나랑 같이 본군을 이끌거고.”
“…….”
그 말에 유니벨이 뺨이 살짝 상기되었다.
“…흐, 흥. 그래 뭐, 알았어! 어, 얼른 보내버리라구!”
‘놀라운 태세전환이로군.’
“주공.”
티아가 손을 들고 발언했다.
“다 좋지만 미네까지 가버리면 회담은 어찌 하는가? 카르프리 영지를 대변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로드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본녀의 생각으론 카르프리를 장악하는 게 더 중요하니, 회담을 뒤로 미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만.”
“…히익!”
로즈안느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대영주 회담 삼일 중 하루를 힘들게 버텨냈건만, 회담 자체가 미뤄져 버린다면 그동안 장로들에게 붙잡혀서 또다시 고문과 같은 교육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로드 또한 회담을 미루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다들 준비해 온 게 있는데 미루는 건 좀 그렇고, 이번 사건에 책임이 있는 카르프리에 핸디캡을 부여하는 의미에서, 이브가 대신 임시 대영주로 참가하는 건 어떤가요?”
“……주, 주공? 총무가 대신 한단 말인가?”
“괜찮지? 이브.”
이브가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의 명이라면요.”
“내일 바로 시작하려면 자료나 정보가 부족할 텐데 가능하겠어?”
“자료는 치마르마 측이 가져온 것들을 보면 충분해요. 그리고…….”
그녀의 눈에 얼핏 으스스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토론하는 꼴들을 보니까 자료가 없어도 질 것 같지 않던데요?”
“…….”
자리에 있던 로즈안느와 키리안이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그럼 저는 내일 회담 준비나 하러 갈게요.”
이브가 집무실을 떠났다. 잠시 멍하니 있던 가신들 중 티아만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주, 주공! 총무가 대신 하는 건 핸디캡이 아니라 어드밴티지 같다만…….”
“…하, 하하.”
로드가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다들 고생해라. B급 정치형 클래스를 상대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아마도.
*
며칠 후.
전 카르프리의 수도, 크루바칸.
“이렇게 빨리 도착하다니!”
“중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네! 서두르세!”
치마르마의 귀환 소식을 전해들은 네 명의 족장들이 헐레벌떡 회의장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의장 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미네가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족장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저주받은 왕실의 피. 그들이 미네를 살려두는 이유는 백성들의 분노를 집중시킬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써먹기 좋은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치마르마는 어디 있느냐?”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켜.”
족장들이 그녀를 거칠게 밀쳐 넘어뜨리며 회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치마르…… 허억!”
“……!”
족장들은 우뚝 멈춰선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치마르마, 아니 한때 그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몸뚱이는 회의장에 한 가운데에 빨래처럼 널려있었다.
몸통은 햇빛에 의해 건어물처럼 바짝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얼굴만이 탱탱한 윤곽이 남아있어 ‘치마르마’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고 누군가는 바닥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했다.
“천신은 이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딸칵. 미네가 문을 닫아 잠그며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도와달라는데 역으로 영토나 뺏고 있는 주인공 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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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 역시 걸그룹 멤버 스카우터;
왜이리들다재밌지 / 오늘도 코멘 감사합니다!
wnsdlfh / ㅆㅇㄷ!
T스톤 / 이카루스 플레이어입니다 ㅋㅋㅋ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군요
로리콤MK / 아앗! 역시 로리에게는 공평하게 애정을 쏟으시는 ㅠㅠㅠ 존경합니다
책읽는고래 / 으아아아아앙ㅠㅠ 돌아온게 돌아온게 아니야
니알라토텝 / 아하 ㅋㅋㅋ 미네 최종 흑막설이 많네요
...(-1)... / 저도 벌레 극혐합니다 ㅠㅠ 원룸살때 바퀴벌레 100마리는 죽인듯;
알테니아 / ㅋㅋㅋ? 비월이 안나와서 그런가 오랜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