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1. 모든 것을 잃은 소년 =========================
일단... 왠지 내 손길을 유혹하는, 퀘스트 옆의 + 자가 적힌 버튼을 손으로 건드렸다. 아까의 물에 손을 넣는 것 같은 가벼운 저항감이 느껴지며, + 글자가 – 로 바뀌었다. 동시에 내 눈 앞에, 조금 전 보았던 <메인 퀘스트>가 적힌 창이 펼졌다. 다시 – 버튼을 건드리자 창이 휙 하고 버튼 쪽으로 접히며 – 자가 +로 바뀌었다.
폈다가 접을 수 있군. 다행이다. 내가 적응만 할 수 있다면 시야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겠군. 완전히 가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내가 손을 뻗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고, 건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아까처럼 버튼이 건드려지거나 창을 닫거나 할 수 있다. 그럼, 다음은... 나는 익숙하게 회로를 돌리며 마법을 발현시켰다.
“라이트(light).”
내 심장에서 오른손 끝까지 이어진 마나 회로를 통해, 익숙한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며 마법이 펼쳐졌다. 서클조차도 돌릴 필요 없는 단순한 라이트 마법이 익숙하게 시전되며, 내 오른손 끝에 주먹만한 동그란 하얀색의 빛덩어리가 떠올랐다. 나는 오른손을 눈 앞으로 들어올려 주변을 밝히며, 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변화하는지 살폈다.
변화하지 않는다. 밝아져도 보이는 건 똑같다. 그럼, 이게 마법적인 빛과 태양빛의 차이가 있는지 살펴봐야 하니,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해 봐야지.
그럼 다음은 뭘 확인해 볼까. 나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 벽에 붙어있는, 초도 없고 촛농받이도 없는 초걸이에 내 오른손 끝의 빛덩어리를 옮겨놓았다. 그리고 책상에 앉았다.
아까 부모님께는 아예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럼 그건 정보전달 자체를 막는 것인가, 아니면 말만 못하게 하는 것인가? 나는 종이 하나를 꺼내고, 책상 위에 있던 잉크병의 뚜껑을 열었다. 지금 보이는 것을 그려보자. 문구도 써 보고.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펜을 집어들고 잉크병에 담그려고 하던 내 손길이 덜컥 멎었다. 마치 홀드(hold) 마법을 학교에서 서로 쓰고 당해보며 배울 때처럼, 나는 눈동자를 제외한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오. 아주 철저하기 짝이 없구만. 알았어. 안 쓸게. 안 쓰면 되잖아. 안 쓴다고!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내 몸을 구속하던 정체모를 힘이 씻은 듯 사라졌다.
새삼 무서워졌다. 내가 누군가에게, 마법으로, 이런 현상을 겪게 하기 위해서는... 아니, 불가능하다.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아까는 정신지배를 생각했지만, 지금 나는 현재의 내 상태에 대해 의문을 갖고,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이런 정신상태를 만들려면, 그냥 정신지배가 아닌 고급 정신지배가 필요하다. 그럼 9서클. 드래곤 말고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존재하기는 한지도 의문이다.
내가 무서워하거나 말거나 ‘가장 냉정한 부분’은 현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말이나 그림이나 글자나, 뭐가 됐든 간에 남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려고 하면 몸이 딱 멈춰버린다는 거군. 트리클 신의 역사...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 이걸 누구한테 물어볼 수가 없으니 신전에 가도 소용이 없겠군. 하이고... 일단 조금 더 두고 보자. 지금 고민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정리하고 나는 혹시 내가 놓친 것들이 있는가 이리저리 시선을 옮겨보았다. 왼쪽 아래에, 아까 + 글자가 적힌 버튼보다 약간 큰 ? 모양의 버튼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누르자 아까 <퀘스트>라고 적혀 있던 크기 정도의 창이 눈 앞에 떠올랐다.
<도움말 : 정보 확인에 대해>
<사람이나 물품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대해 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이나 물품을 바라보며 ‘정보 확인’이라고 생각하면 그에 해당하는 정보가 제공됩니다. 사람은 개개인의 능력치가, 물품은 간단한 정보나 능력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들이 표시되며, 퀘스트와 관련이 있을 경우는 그에 관련된 내용도 표시됩니다. 단 너무 사소한 물품의 경우에는 정보 확인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정보 확인은 레벨이 높을수록 많은 정보가 제공됩니다. 또한, 사람의 경우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정보가 떠오를 확률이 높아지며, 적대적인 관계의 사람의 경우에는 일부 정보가 확인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매력수치가 높은 사람이 정보를 확인할수록, 상대의 정보를 확인할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정보 확인은 Lv. 1입니다.>
<자신의 정보를 보고 싶으면 대상을 지정하지 않은 채 ‘정보 확인’을 하세요.>
‘정보 확인.’
그렇게 말하자 눈 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이름 : 기리인 모스
나이 : 18
HP : 950/950
힘 : 50
민첩 : 50
지력 : 100
마나친화력 : 100
매력 : 100
지구력 : 60
특수 : 의지력 100, 언변 90
스킬 : 정보확인 Lv.1, 정통마법 A0(5.5서클)>
응? 내 이름? 이건 뭐야. 그럼, 저게 내 ‘정보’인 거야? 저 수치는 뭘 얘기하는 거지? 그때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도움말 : 능력치에 대해>
<능력치에 대한 간단한 설명입니다.
HP : 이 수치가 0이 되면 죽습니다. 피로하거나, 상처를 입었을 경우 감소하며, 치유를 받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하면 회복됩니다.
힘 : 물리적인 힘입니다. 수치가 높으면 무기를 휘두르거나, 육체적인 일이나 노동을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민첩 : 몸의 빠르기와 정확도와 관계됩니다. 빠르게 움직이거나,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지능 : 전반적인 지능지수입니다. 수치가 높으면 기억력, 분석력, 이해력 등 전반적인 지력 전체가 올라갑니다. 단, 지식의 수준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지능이 높은 어린아이보다 지능이 낮은 어른이 현명할 수 있습니다.
마나친화력 : 수치가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만 마나를 느끼거나 이용할 수 있으며, 수치가 높으면 같은 마법을 써도 더욱 강력하거나 효과적입니다. 마법사의 서클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친화력이 높으면 서클을 올리기 쉽습니다.
매력 : 인간적인 호감 수치입니다. 연령대가 가까운 이성에게는 이성적인 매력으로도 작용합니다. 수치가 높을수록 남을 설득하는 것이 쉬워지거나, 거래에 유리하거나 합니다.
지구력 : 오래 버티는 능력입니다. 수치가 높을수록 장기간 활동하거나, 고통을 참는 능력이 높습니다.
특수 : 각 캐릭터가 특별히 갖고 있는 능력이나 특성에 대한 수치입니다.
스킬 : 각 캐릭터가 직업이나 교육으로 얻은 능력이나 특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나는 찬찬히 저 설명을 읽고, 내 정보라고 표시된 것의 능력치를 읽었다. 흠... 수치는 나오는데 이게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네. 높은 건지, 낮은 건지... 하다못해 A가 좋은 쪽인지 아닌지도... 뭐, 내 지력이나 마나친화력이 낮을 리는 없으니까, 저건 높은 편이겠지...? 내일 다른 사람들을 확인해보자.
‘띠링!’
어머나 깜짝이야. 갑자기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창이 훅 하고 하나 떠올라왔다. 뭐, 뭐야.
<히든 트리비아 퀘스트 달성 - 1>
<적응이 빠른 당신.
1) 패닉하지 않고,
2) 냉정히 주변 상황을 확인하고
3) 주어진 정보를 분석하며
4) 할 수 있는 모든 기능에 대한 확인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5) 앞으로의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극한의 이성적인 대처를 보여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며, 가벼운 보상을 지급합니다.
보상 : 5드로그 / 보너스 스탯 1>
짤그랑!
내 앞에서 작지만 확실한 소리가 났다. 황급히 책상 위를 내려다본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책상 위에는 내 라이트 마법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화 다섯 개가 놓여있었다. 뭐야. 이 ‘보상’이라는 게,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고, 진짜 물질적인 보상인 거야? 나는 손을 뻗어 금화를 집어들었다. 만져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유달리 무거웠다. 드로그 금화에는 양쪽에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이건...
‘정보 확인.’
<물품 정보>
<드로그 금화>
<트리클 신전에서 함량과 무게가 확인된 정품 주화.>
그래. 이 구멍 두 개는 신전에서 금화의 무게와 크기가 정품이라는 것을, 깎아내거나 한 게 아니라는 것을 표시해 주는 거지. 게다가 정보 확인까지 저렇게 나오면, 금화 자체는 진짜라고 봐야겠지...가 아니고! 신전에 들러서 진짜인지 확인해 봐야지! 구멍 두 개 뚫렸다고 믿었다가 낭패본 사람들이 한둘이냐! 내일 오는 길에 중앙광장 신전에 들러 보자. 이 금화가 진짜라면...
‘띠링!’
<히든 트리비아 퀘스트 달성 – 2>
<모든 것을 의심할 줄 아는 당신. 눈 앞에 있는, 당신으로서는 큰 재물 앞에서도 이 현상의 진위를 생각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는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합니다.
보상 : 1드로그>
쨍그랑. 금화가 다시 한 닢, 이미 올라와 있던 금화 위로 떨어졌다.
졌다, 졌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나머지 금화도 한 닢 한 닢 들어서 살펴보았다. 겹쳐도 보고, 무게를 비교해 보고, 한 닢 한 닢 정보확인을 해 보았다. 혹시 알아? 다른 퀘스트의 대상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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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
자꾸만 하품이 나온다. 나는 가방을 등에 메고 신발을 꿰어 신었다. 어머니가 내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시며 말씀하셨다.
“결국 잠을 설쳤구나... 몸은 괜찮니? 아프지는 않니? 열은 안 나고?”
“잠을 설치기는 했지만 몸은 가뿐해요. 열도 안 나고요. 걱정 마세요, 어머니.”
여기서 어머니 앞에서 ‘혹시라도 한 닢 더 떨어질까봐 이것저것 해 보다가 밤을 꼬빡 새 버렸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그래... 그래도 오늘은 곤돌라 타고 가거라.”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동전 세 개를 내미셨다. 나는 ‘괜찮다’고 한 번 더 말씀드리려다가, 아무 말 없이 어머니 손에서 동전을 받아들었다. 늘 자주 앓아누웠던 나를 키우느라 어머니는 늘 노심초사하셨다. 내가 늘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니는지, 열이 나지는 않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살펴보시는 어머니. 왠지 쑥쓰러워 ‘내가 애에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럼 아프지나 말든가’라고 잔소리만 늘어날 뿐이라는 걸 나는 경험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추스르며 말했다.
“아버지는요?”
“니 아버지 아침이 얼마나 빠른 줄 잘 알잖니? 이미 출근하신지 오래 됐지. 아마 지금쯤 화로에 불 한창 넣고 계실 거다.”
“어머니도 얼른 준비하고 가셔야죠. 늦겠어요.”
“나야 얼른 뛰어가면 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어머니께서도 외투를 걸치고 계셨다. 단추를 잠그던 어머니께서 아, 하고 말씀하시더니 물어보셨다.
“시험 결과는 나왔니?”
“오늘 나온댔어요.”
“그래... 잘 했겠지, 우리 아들이니까. 몸 조심하렴. 아프면 바로 집에 오고.”
“그럴게요.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관사의 문을 나섰다. 평소처럼 서쪽으로 걸어 바로 상업지구를 가로지르는 게 아니고, 북쪽 길로 향했다. 동대로 쪽으로 가서, 길 옆의 계단을 통해 길 아래로 내려가, 대로 아래로 흐르는 수로에서 출퇴근 및 등교를 위해 운영되는 곤돌라를 타고 가다가, 아카데미 근처에서 내리면 된다.
곤돌라를 타면 20분은 일찍 학교에 갈 수 있고, 숨가쁠 일도 전혀 없다. 건강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나에게 있어, 아침에 걷는 날과 곤돌라를 타는 날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하지만, 우리 집은 나에게 들어가는 돈만 해도 많다. 두 분 모두 버신다고 해도 넉넉하지는 않은 군인가정에서, 아무리 관사가 제공되고 아카데미 학비가 면제라 해도 등교에 이루그 동전(銅錢, 구리돈) 세 개를 꼬박꼬박 받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더 참으면 되는 거니까.
이런 날은 1년에 서너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날이다. 예를 들면, 내가 아프거나 하는, 그런 날 말이다.
“어? 기리인!”
어. 계단을 통해 곤돌라 정류장에 가까이 가자, 이미 곤돌라에 타고 있던 누군가가 손을 들어 흔들며 기리인을 부르고 있었다. 초록색의 로브를 입은, 역시 초록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누군가였다. 익숙한 목소리다. 나는 마주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좋은 아침, 헤나.”
헤나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배로 올라, 헤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웬일이야? 곤돌라를 다 타러... 괜찮아?”
헤나는 반갑게 인사를 하다 말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내 꼬라지가 그 정도로 엉망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 그렇게 엉망이야?”
나는 짐짓 진지하게 물었다. 헤나의 뺨에 홍조가 살짝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잠깐 사귈 때도 그랬고, 어쩔 수 없이 헤어졌을 때도 그랬지. 헤나는 내가 약간 얼굴을 가까이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면, 늘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아니아니! 괜찮아. 평소랑 같아.”
“아, 그래... 사실 어젯밤에 잠을 잘 못자서 걱정했거든.”
헤나가 번뜩 고개를 들고 나를 돌아보았다.
“너도?”
“응? 뭐가?”
“너도 잠을 잘 못 잤어? 와... 4년 내내 수석에 졸업시험도 수석일 게 뻔한 너도 걱정하느라 잠을 못 이루기도 하는구나...”
아... 그거 얘기구나. 대답하기 좀 곤란하다. 헤나의 감탄은, 장난기는 약간 섞여 있었을지언정, 비꼼이나 질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요만큼도 없는 순수한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착한 헤나. 나는 정말 오랜만에 말이 꼬이는 것을 느꼈다.
“아냐, 그런 거.”
여전히 헤나는 순수하게 감탄 중이었다.
============================ 작품 후기 ============================
15kb씩 담으니 비축분이 팍팍팍 줄어드네요. 무섭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삐카 님 // 반갑습니다. 어, 자세한 내용은 뒤에 나오겠지만, 주인공은 '자기는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는 다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