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6화 (6/309)

00006 1. 모든 것을 잃은 소년 =========================

“좋겠다... 너 시험 잘 봤지?”

“어, 뭐... 그럭저럭. 너는?”

“나도... 그럭저럭.”

그리고 헤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직인들의 작업장이나 사관학교로 가는 많은 사람들이 곤돌라로 오고 있었다. 북쪽의 병영에서도, 내가 올라온 남쪽의 거주구역에서도 사람들이 다가왔다. 서른 명 정도 되는 곤돌라의 좌석이 대략 다 찰 때쯤, 수로의 저 편에서 새 곤돌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갈 때는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수로의 물 흐름을 타고 내려가고, 올 때는 사공 아저씨의 삿대와 아카데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충전해주는 마력 동력원의 힘을 빌리는 곤돌라였다.

“출발합니다~”

우리 아버지뻘 되는 사공 아저씨가 삿대를 이용해 곤돌라를 정류장에서 밀어내었다. 곤돌라는 물의 흐름을 따라 부드럽게, 하지만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헤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부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기색으로 그녀가 물었다.

“기리인, 제도 아카데미에서 초청장이 온다는 거, 사실이야?”

하기 싫었는데, 결국은 그 얘기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언제나처럼 미움사지 않을 적당한 정도의 답변을 건넸다.

“몰라... 와 봐야 아는 거지.”

“또, 또, 또. 내가 전에 너 그 겸손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지 말라고 했지?”

그렇게 말하며 헤나는 손을 뻗어 내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 헤나가 그렇게 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헤나가 손을 놓고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예전처럼 밝지만은 않다는 점을 나는 알기 싫어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런 표정 지을 줄 알았지. 그래서 꼬집게 가만 내버려 뒀고, 하고 잠시 생각한 나는, 화살의 방향을 헤나 쪽으로 돌렸다.

“너는? 몇 등 정도 할 거 같아?”

헤나는 고개를 돌려 배가 나아가는 앞쪽을 보며,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죽였다. 귀엽다. 언제나처럼.

“몇 등이라고 해 봐야... 너 정도 등수 안 나오면 의미 없잖아.”

“그래도 첫 부임지가 달라지니까...”

헤나는 다시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난 그 정도 등수는 안 돼. 아무래도 첫 2년간은 감시탑 근무가 확정일 것 같아. 애초부터 맨날 중간이었던 애가 아무리 대박이 터져도 10등 안에 어떻게 드냐.”

어느새 곤돌라는 중앙 광장 아래의 수로로 들어가고 있었다. 요새의 서북쪽에서 갈라진 물길은, 우리가 타고 온 서쪽 지류와, 병영 한 가운데를 지나는 북쪽 지류로 나뉘었다가, 이 곳 중앙 광장 아래에서 합쳐진다.

물살이 거칠고 불규칙하고, 지하라 시끄러워서 대화 나누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포함한 곤돌라의 탑승객들은 입을 다물었다.

“꽉 잡으세요.”

사공 아저씨가 여유있게 말하고는 삿대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두 물줄기가 합쳐지며 어지러운 물길이었지만, 아저씨는 매일 겪는 일이라는 듯 어렵지 않게 배를 몰았다. 거의 흔들리지 않고 난류가 일어나는 지점을 지나자, 물결이 다시 안정적이 되었다. 우리가 탄 곤돌라는 중앙 광장 아래, 마법 전등이 밝혀진 수로를 따라 한참 흘러 내려갔다.

잠시 수로의 천장을 보다가, 눈길을 돌려 헤나를 보았다. 계속 나를 보고 있던 헤나의 눈길이 느껴져서였다. 헤나가 ‘왜?’라고 말하는 듯 눈을 약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주자 헤나는 다시 아까처럼 배시시 웃었다. 전에는 그 웃음에 씁쓸함은 없었는데.

헤나에게 새삼, 미안하다. 헤나가 나를 원망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안다. 나도, 머릿속으로는 내가 헤나에게 미안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헤나를 사귈 때 내가 모든 마음을 쏟아부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헤나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헤나가 웃는 걸 보면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헤나만이 아니다. 다른 여자들도, 아카데미 안에서든 밖에서든 만난 여자들에게도 언제나 그랬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나도 그녀들도 잘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들에게 항상 미안했다.

그래서 나는 헤어지고 나서 그녀들에게 더 잘해주려 노력했다. 다정하게, 신사적으로. 그게 그녀들에게 위안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길다고는 볼 수 없는 간격으로 계속 여자친구가 바뀌어도 부러움의 목소리 말고 비난이 크지 않은 것은 내 노력이 약간은 먹혔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게, 그 여자 때문이다. 나는 헤나와, 아니 다른 여자친구였던 여자들과 모두 이별하게 된 원흉인 누군가를 잠시 떠올리고는, 머리를 다시 휘휘 내저었다. 아침부터 불쾌한 생각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너 오늘 좀 이상해.”

헤나가 내가 고개 흔드는 보며 말했다. 이대로 두면 열나는 거 아니냐 라고 이마에 손을 짚어올 것 같아서, 나는 헤나를 바라보며 뭔가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으려 했다.

‘정보 확인.’

“그 머리핀...”

나는 헤나의 머리핀을 가리키며 물었다. 헤나는 초록색의 머리를 한 가닥으로 땋아 뒤로 늘어트리고 있었고, 거기에 초록색의 머리에 잘 어울리는 황금빛의 해바라기 모양의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어, 이거? 왜?”

“아티팩트(artifact)네?”

헤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야~ 역시 수석! 눈썰미도 대단한데?”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내심 찔끔했다. 내가 헤나의 머리핀이 아티팩트인 것을 안 것은, 눈썰미가 탁월해서가 아니라...

<물품 정보>

<해바라기 머리핀. 아티팩트. 내구도 : 3/3 랭크 : D+

헤나 이크록이 부모님에게 받은 머리핀.

기억력과 집중력을 약간 높이는 작용이 있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마음을 먹으면 이런 ‘창’을 띄워올릴 수 있기 때문이지... 새삼, 가방 속에 든 금화 여섯 닢이 더 무겁다는 걸 느끼며, 여전히 내 얼굴을 바라보며 생글거리고 있는 헤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보면 확률이 더 올라간다고 했지. 부모님들이야 나를 믿어주시는 분들이니까 그렇다 쳐도, 헤나는 어떨까.’

나는 헤나의 눈을 보며 ‘정보 확인’ 이라고 떠올렸다. 그러자 역시 눈 앞에 창이 떠올랐다.

이름          : 헤나 이크록

나이          : 18

HP           : 950/950

힘            : 65

민첩          : 68

지력          : 86

마나친화력    : 85

매력          : 84

지구력        : 63

특수          : -

스킬          : 정통마법 B+>

‘아...’

나는 내 힘과 민첩의 수치가 헤나보다도 못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몸이 약한 것, 체력적으로는 학교에서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점수로 확인받고 나니 더 참담했다.

내가 이 약한 몸 때문에, 아무리 단련해도 나아지기는커녕 더 자주 앓아눕게 되는 이 몸 때문에 어릴 적부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이 곳은 북부다. 매일 북부의 하얀 산맥에서 내려오는 마수(魔獸)들과 전투가 일상인, 무(武)를 숭상하는 이 곳. 약한 남자는 사랑받지 못하는 이 곳.

하다못해 우리 아버지마저도, 몸이 약하디 약해 자주 병치레를 하는 걸 달갑지 않은 눈으로 보실 때가 있었지. 1학년 때 학교를 다니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고. 내가 공부라도, 마법이라도 잘 하지 않았다면, 어떤 역경도 다 씹어먹은 강철같은 의지력을 가지고 학교에 개근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마법 아카데미, 마법 아카데미 정류장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공 아저씨가 배를 서서히 수로의 옆쪽에다 가져다 댔다.

“다 왔다, 내리자.”

“응.”

나와 헤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사공 아저씨에게 내고, 배에서 내려 수로를 나가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 이외에도 많은 아카데미 학생들이 같이 내려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평소에도 나를 흘깃거리는 눈길을 겪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아... 헤나가 아침에 부러워했던 것처럼, 내가 제도의 그랜드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간다는 얘기가 이미 널리 퍼진 거겠지. 부러움, 시샘, 질시의 눈빛.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인건가...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침부터 한숨이셔?”

뒤에서 웬지 끈적하게 젖어있는 느낌의,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싫다. 역겹다. 남은 등굣길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것만 같다. 하지만 얼굴에 그 느낌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맨날 익숙하게 하고 있는 거니까. 나는, 돌아서서, 반가운 척, 인사했다.

“안녕, 리미.”

‘정보 확인.’

이름          : 리미 요뢰브

나이          : 18

HP           : 1040/1040

힘            : 72

민첩          : 74

지력          : 80

마나친화력    : 79

매력          : 75

지구력        : 72

특수          : 카리스마 70

스킬          :

카리스마... 70이면, 어머니나 아버지, 헤나를 본 것에서 추정하면, 있긴 있는데 높은 편은 아니구나. 내가 그녀의 정보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옆에 있던 헤나가 말했다.

“기리인, 나 먼저 갈게.”

그녀의 얼굴빛은 확연하게 흐려져 있었다. 내 인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뒤돌아 가버렸다. 나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아까 내가 곤돌라에서 느꼈던, 일말의 미안함이 확 커진 느낌이었다. 헤나와 만날 때도, 헤나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던 착한 그녀. 그러기에 리미 같은 여자의 괴롭힘을 버티기 힘들었던 거겠지. 나중에 꼭 인사해야지. 나는 헤나가 보지 않더라도 헤나의 등에 손을 들어보인 후, 뒤로 돌아섰다.

제법 늘씬한 몸매의, 약간은 칙칙한 색이지만 그래도 금발이라고 봐줄만 한 머리카락을 한, 약간은 오만한 인상을 한 그런대로 미녀 축에 드는, ‘아카데미의 여왕’ 리미가, 예의 그 ‘귀족스러운’ 느릿느릿하고 약간 흐느적대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흐느적대는 어디가 귀족스러운 걸까 하는 궁금함은 처음 리미를 본 4년 전부터 지금까지 내내 갖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걸 대놓고 이야기할 배짱은 나에게는 없다. 아니, 그건 배짱이 아니고 멍청한 거지. 이 북부대요새의 2인자이자 기사단장이자 백작인 사람의 영애를 망신주는 건데.

리미는, 분명 아카데미 지정 교복인, 기리인이나 헤나와 같은 로브였을텐데, 같은 로브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뀐 옷을 입고 있었다. 앞부분의 옷감이 약간 도톰한 가슴까지 드러나 있고, 분명 아래로 펑퍼짐하게 늘어져야 할 로브자락은 마치 드레스같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게다가 군데군데 프릴에다, 가슴에는 코사쥬(cosage)까지 달려 있었다. 그럭저럭은 봐줄만은 했다. 교칙위반일 게 뻔하지만, 선생님들도 쉽게 지적은 못하는 거겠지. 리미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한두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키가 껑충한 노집사 자크가 가방을 들고 있었다.

표정관리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요안나 선생님의 말을 기억하자. 나는 심호흡을 하며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리미는 성큼성큼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내 왼팔에 덥석 팔을 감아왔다.

“안녕, 기리인.”

약간은 느끼하게 느껴지는, 평소보다 약간 낮고 물기가 있는 목소리로 리미가 인사했다. 아, 좀. 남의 팔은 왜 잡고 그러냐. 나는 속으로만 그렇게 말하며, 겉으로는 표정관리를 하기 위해 한층 더 신경썼다. 4년 내내 해 온 일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가볍게 비벼지는 리미의 가슴. 큰 편은 아니지만, 꽤 훌륭한 축에는 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그 자극을 무시하며 기분나쁘지 않게 슬쩍 팔을 빼냈다. 지금 나에게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리미의 괴롭힘을 두려워한 여자들이 스스로 나를 멀리해 6개월 넘게 내가 솔로로 지내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상한 음식을 먹느니, 체하는 게 나으니까.

“어, 안녕, 리미.”

“잘 잤어? 얼굴이 좋아보인다?”

너 정말 관심이 없구나. 나 밤새서 별로 좋은 얼굴이 아닐텐데 나를 보고 좋다는 얘기가 나오니.

그래. 나는 리미가 싫다. 원래는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처음 본 순간부터 나에게 호감을 표해온 리미를 곤란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신분의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귀었다가 깨지면 많은 곤란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리미가 내 취향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1학년 때부터 내 마음 속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으니까.

============================ 작품 후기 ============================

리미를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쁘게 봐주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주시고 가시면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