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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7화 (7/309)

00007 1. 모든 것을 잃은 소년 =========================

가끔씩, 기약없는 짝사랑에 너무 지칠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봐 주지 않을 때, 나는 나를 좋아해주는 다른 사람을 잠시 만나기도 했었다. 헤나도 그런 여자 중 하나였다. 안다. 내가 그녀들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걸. 그래도 나는 마음의 전부는 아니었을망정, 내 양심에 거리끼지 않게 그녀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녀들에게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나에게 보내준 다정함과 애정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어, 뭐. 너도 잘 잤니? 자크씨도 안녕하세요?”

나는 리미의 뒤에 서 있던 노집사 자크에게 인사하며, 실제로는 ‘좀 도와주세요’라는 눈빛을 보냈다. 한 주에 두세번은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크씨는 익숙하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가씨.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알았어, 자크. 잔소리는. 뭐 하루이틀인가?”

약간은 뾰족해진 목소리로 말하며 리미는 휘감은 팔을 풀었지만, 팔을 놓지는 않았다. 나는 리미가 보지 못하게 노집사 자크에게 감사의 눈짓을 보냈다. 자크 할아버지도 마주 눈짓해왔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욕봤네’가 아닐까.

리미에 관해 나는 지난 4년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리미를 받아들이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렇다고 리미를 울리는 건 더 멍청한 짓이다. 리미의 성격상, 그리고 리미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기사단장 각하를 생각해보면 분명 우리 부모님에게까지 여파가 미칠 게 뻔하니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리미는 나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한 번쯤은 나를 원망할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녀에게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한 내 필사적인 노력이 조금이나마 효과있지 않았을까. 리미는 대신 나와 사귀게 된 여자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애초에 여자애들에 대해 더 지배력을 발휘했으니 그게 더 쉽기도 했겠지. 하여튼 리미는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이 포착된 여자들을 지독하게도 괴롭혔다.

모르게 한다고 했지만, 모를 리가 있나. 내가 그걸 처음 알게 된 건 2년 전이었다.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지는 그녀들의 표정 때문에, 그리고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내 마음도 너무 아팠다. 가끔씩 버티는 여자들이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북부군에서 일하는 그녀들의 부모에게까지 압박이 들어갔다. 결국 모두 얼마 버티지 못하고 헤어지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리미가 싫다. 역겹다. 저 뻔뻔함이 더 싫다. 내 앞에서는 아닌척하며 부모까지 동원해서 비열하게 구는 저 뻔뻔함이, 그리고서도 내 앞에서는 아닌척하는 저 뻔뻔함이 역겹다.

“좋은 아침에 왜 한숨이야?”

며칠만 참자. 며칠만 참으면 된다. 나는, 언제나 리미를 대할 때 그랬듯 영혼 없는 친절한 태도로 말을 붙였다.

“시험은 잘 봤어?”

“뭐 그냥저냥. 잘봐도 못봐도 똑같은걸 뭐.”

정말로 관심없다는 듯 말하는 리미.

“하긴... 리미 너는 군에 들어갈 거 아니랬지.”

“그럼. 사실 아카데미도 그래. 나 같은 고귀한 사람에게 아카데미가 뭐야? 이 타고난 미모와 매력으로 따뜻한 남쪽 나라 사교계에 일찍 데뷔했으면, 지금쯤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고 있었을텐데!”

잠시나마 나이에 걸맞는 톤으로 누군가 – 보나마나 그녀의 아버지인 요뢰브 백작님이겠지만 – 에게 불만을 토하던 리미는, 곧 다시 예의 그 끈적한 톤으로 돌아와 나를 바라다보며 말했다.

“뭐, 그 덕에 누구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말야.”

“아하하...”

여기서 예스든 노든 얘기하는 순간 후폭풍이 생긴다. 참자. 나는 부드럽게 웃음으로 때워넘긴 후 말을 돌렸다.

“그래서 졸업하면 바로 내려가?”

“아니. 4년간 아카데미에 다녔으니 전혀 그런 쪽으로 준비가 안 되어있잖아? 1년 정도 집에서 사교계 수업을 받아야지. 기리인, 너도 북부에 있을 거지? 군에 들어갈 거지?”

그러면서 리미는 다시 잡고 있던 팔을 끌어당기려 했다.

어라. 이거 잘 하면...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니? 아쉽네. 제도에 가면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으려나 했더니.”

“뭐?”

리미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완전한 무방비상태의 리미의 표정은, 어설프게 얹어놓고 있던 끈적함이 사라지며 오히려 나이에 걸맞는 매력이 있구나. 끝까지 표정 관리해야 한다. 복수의 쾌감 같은 것이 나오지 않게끔 말이다. 나는 정말로 몰랐다는 듯 리미에게 말했다.

“어... 몰랐구나? 확실하지는 않은데, 나 그랜드 아카데미에 들어갈 것 같아.”

“뭐?!”

리미의 크게 뜬, 약간은 날카로운 인상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연기하고 있던 자신이 깨져, 안팎으로 모두 당황해버렸다. 아카데미의 여왕님이, 눈물이라니.

“말도 안 돼! 왜! 왜 말 안했어!”

끝까지 조심하자. 빌미를 주면 안된다.

“왜라니...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진로 문제라, 친구 사이에서는 조금 얘기하기 그렇잖아?”

알아들었을까? ‘너하고 나는 그냥 친구 사이일뿐 아무 것도 아니잖아’라는 말인데.

그나저나 리미가 몰랐다는 게 조금 의외다. 여자들끼리는 가십 같은 거 많이 얘기들 하지 않던가... 친구가 없어서 그러나.

아니, 저 지독히도 자기중심적인 ‘아카데미의 여왕’ 리미가 그럴 리가 없지 아마,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가 졸업하면 자기 곁에 있을 거다, 라고 생각해 버린 거겠지. 아마 그래서일거야. 그 동안 내 여자친구들은 괴롭혀도 나는 괴롭히지 않았던 거고. 내가 자기를 미워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그랬겠지. 언젠가는 자기 것이 될 테니까.

참 유아스러운 생각이다, 라고,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 동안 리미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크를 돌아보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크, 사실이야?”

자크는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입니다, 아가씨. 아카데미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얘기이죠. 아가씨가 모르신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당혹에 약간 분노가 더해져 리미는 자크에게 소리쳤다.

“그럼 왜 어제 내가 아버님께 말씀드릴 때 미리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자크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는 이미 기리인군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리미 아가씨가 기리인군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도, 기리인군과 사귄 여학생들에게 이런 저런 압박을 했던 것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기리인군이 아가씨에게 끝까지 신사적으로 대한 것도 말이지요.”

충격으로 굳어있던 리미의, 내 팔의 옷깃을 잡은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리미 아가씨가 가끔씩 주인님께 흉을 본 사람들이 있었지요. 주인님께서 그 사람들이 기리인군이 잠시 만났던 아가씨들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아가씨를 아끼시지만, 아가씨의 응석을 들어주어 북부 대요새의 인재를 버릴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단지, 아가씨가 스스로 정신을 차릴 날이 오겠거니 하고 기대하시며, 그 분들에게도 ‘부탁’을 하셨지요. 자식 키우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하신 걸로 압니다.”

그 까탈스러운 ‘여왕’ 리미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겠지. 리미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을 그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복수의 쾌감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리미를 동정해서는 아닐 텐데, 왜 내가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백작님과 자크 할아버지의 공정한 태도 때문이려나.

“주인님께서 저에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기리인군이 때가 되면 제도로 떠날 것이고, 리미에게 신사적으로 대하고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다. 단지 리미에게는 미리 그 사실을 이야기해 주지 마라. 스스로 알게 되면 리미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 때의 문제고, 내가 아는 리미라면 아마 나나 식구들, 사용인들이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경험이라도 겪지 않으면 리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라고요. 결국, 주인님의 예상이 맞으셨습니다. 졸업 전날에야 알게 되시는군요.”

리미는 결국 “와앙!” 하고,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주저앉아 버렸다. 설마 그 ‘아카데미의 여왕’ 리미가 이렇게 아이처럼 울어버릴 줄은 몰랐다. 나는 당황해하며 리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자크는 손바닥을 세워 내 쪽으로 내밀었다.

‘놔두십시오.’

그러면서, 온화한 표정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자크 할아버지. 아마 백작님의 지시가 있었겠지. 아니, 그 전에, 내가 지금 리미에게 다가가면, 리미에게 오히려 안 좋은 결과가 되겠군. 나는 다시 한 번 자크에게 고마움을 담아 목례한 후 돌아섰다.

사람들의 쏟아지는 눈길을 무시하며 나는 얼마 안 남은 등굣길을 황급히 걸어갔다. 리미가 나타났을 때의 좋지 않은 예감이 현실화된 그 씁쓸함을 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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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던 대화소리가 점차 끊기며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길들을 하나하나 바라봐주자 다들 눈을 피했다. 내가 내 자리로 걸어가 가방을 내려놓자, 잠시 끊겼던 대화는 속삭임으로 재개되었다. 아까 리미 사건 이후 계속 입 안을 맴돌고 있었던 쓴 맛이, 좀 더 강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평소에 평범하게 이야기하던 친구들마저 나를 돌아보며 다른 친구들과 속닥이는 것을 보니 더 그랬다.

물론 예상했던 일이고 각오했던 일이었다. 2백년 전에 당시 북부 대공작의 맏아들이 있었다. 허영심에 비해 지성이 적어 몰래몰래 ‘바보 도련님’이라고 불리던 이 분은 어느 날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것이 될 대공작위를 반납하고 수도의 사교계로 뛰어들었다. 물론 수도의 사교계 같은 험난한 곳에서 그 지성이 적은 분이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 이래로, 위로는 북부 대공작령의 대공작님(archduke)부터 아래로는 이 북부 대요새 남쪽의 평원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까지, 이 북부 대요새 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그 ‘따뜻한 남쪽 나라’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꿈만 꿀 뿐, 대공작님부터 농부들까지 모두가 이 북부 대공작령의 중심인 북부 대요새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북부는 척박하다. 가용 자원이 없어 가지고 있는 인구를 모두 군대와 그 보조에 투입해야만 한다. 대공작가 마저도 수도에 저택을 두지 않고 이 북부에 계속 거주하고 있다. 북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북부에서 교육받고 자라, 북부에서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북부를 마수들로부터 지키며 살아가다가, 북부에서 죽는다. 이것이 북부 사람들의 일생이었다.

그러니, 나처럼,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내려갈 수 있는 사람, 몇십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행운아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은 이해한다. 그리고 그 부러움은 곧 질투가 되고,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는 것도. 그래, 예전에 1학년 때, 이미 유년학교에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났던 내가 아카데미에서도 역시 몇십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처럼 말이다.

“후우...”

나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겪어봤던 일이다. 신경쓰지 말자. 요안나 선생님 말씀을 기억하자.

요안나.

그 이름을 생각하면, 그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그녀의 향기가 먼저 떠오른다. 모두의 눈길을 의식해 억지로 억누르는데도 그 향기는 내 입가에 미소를 비죽 튀어나오게 한다.

그리고, 교실 문이 열리고, 우리 교복과는 다른 로브를 입은 한 여자가 들어온다.

“자, 바로 앉으세요.”

요안나 이스카. 우리 반, 그러니까 북부 마법 아카데미 졸업반의 담임 교사 마법사. 쉽게 말해, 내 선생님이다. 보통 키에, 팔다리는 늘씬하면서도, 풍성한 마법사용 로브로도 다 감춰지지 않는 빵빵한 몸매를 가진 선생님. 순해 보이는 눈매와 순수하고 청초한 인상의 얼굴, 그리고 그에 걸맞는 다정한 품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웬지 모를 범접하기 어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입꼬리가 더 올라가지 않게끔 온 힘을 다해 미소를 억눌러야 했다.

금빛의 긴 생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어올려, 그 조각상 같은 치명적인 목의 곡선이 다 드러나 있었다. 아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고는 찔끔해서 누가 들었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선생님은 가지고 온 출석부와 종이를 교탁 위에 내려놓은 후, 예의 그 다정한 웃음을 띄우며,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다 왔나요? 아... 리미가 없구나?”

“리미는 아까 집사와 함께 집 쪽으로 돌아가던데요.”

뒷줄에서 누군가 말했다. 사정을 아는 몇 명의 눈길이 내 쪽으로 꽂혀 왔다. 나는 모르는 척 했다. 솔직히 지금은 리미따위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작품 후기 ============================

헤나도 리미도 곧 다시 나올 때가 있을 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취향을 많이 타는 글이라 그런지 영 반응이 미적지근하네요.

선작, 추천, 코멘트 좀 주고 가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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